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89화 (89/100)

89화.

“머리로는 형이 더 이상 저 인간 안 좋아하는 거 알겠는데 둘이 있는 걸 보면 자꾸 울컥울컥하는 걸 어떡해요.”

“누가 보면 내가 저 형이랑 세기의 연애라도 한 줄 알겠다. 말했잖아. 우리 그런 사이 아니었어.”

“알아요. 아는데……. 아, 몰라요. 그냥 제가 질투에 미친 놈이라 그래요.”

자기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거울 봐. 거울. 그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매일 보는 얼굴에 무슨 감흥이 생긴다고요.”

“난 매일 새로운데.”

암, 새롭지. 제현의 턱을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어제보다 오늘 더 끝내 주는 얼굴이었다. 아마 오늘보다는 내일 더 잘생겼겠지. 아직도 뚱한 표정이었지만 그 표정도 나름의 맛이 있었다.

“몰라요.”

기껏 기다려 줬더니 성큼성큼 앞서 걷는 제현이었다. 목이 까슬한 느낌에 잔기침을 연신 하며 제현을 뒤따라 걸었다. 인간관계 어렵다. 어려워.

***

- 유럽의 자존심 버닝 비스트를 3:0으로 잡으면서 MVP가 4강에 진출합니다!!!

- 역시 유력 우승 후보 아니겠습니까! MVP의 폭주를 막을 팀은 누구인가!!

다 같이 모여서 MVP의 8강 경기를 보고 있었다. 이길 거라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3:0으로 손쉽게 잡으며 우리보다 빠르게 버닝 비스트를 잡고 4강에 진출한 MVP였다.

“진형이 스타일이 많이 변했네.”

“오더를 주도적으로 하는 것 같더라고요. 점점 맵 보는 실력이 늘더니 이제는 시야가 보통 딜러들보다 훨씬 넓어요. 세미 버퍼급? 폼도 3연속 우승하면서 오를 대로 올랐고.”

감독님의 감탄에 북미 리그를 오래 시청한 지운이 조목조목 분석을 늘어놓았다.

- 이번 경기 MVP는…… 역시, 킹 선수입니다! 정말 딜러의 교과서 같은 존재 아니겠습니까?

- 맞습니다! MVP의 MVP! 이렇게 말하니까 왕중왕을 말하는 것 같은데요, 하하!

- 왕중왕도 맞죠! 킹 중의 킹! K.I.N.G!

장비를 정리하는 MVP 팀을 찍던 카메라가 진형에게 다다르자 진형이 따봉 자세를 취하더니 엄지손가락에 입술을 댔다가 카메라에 쿡 찍었다. 스크린으로 같은 화면을 보고 있던 관객석에서는 환호가 들렸고 우리 대기실에서는 화면을 보던 제현이 오만상을 하고 속이 안 좋은 듯 신음했다.

“어우, 속 안 좋아. 저 한국 돌아갈래요.”

“왜 또 이번엔 제현이가 난리냐.”

원래 한국 간다는 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는 건 나였는데 제현이 마른세수하며 중얼거렸다.

“김치 먹어. 한국인은 김치 먹으면 나아.”

봉지에 담긴 볶음 김치를 퍼먹으며 경기를 봤던 준이 주머니에서 같은 것 하나를 꺼내 제현에게 던져 주자 넋이 나간 것 같은 제현이 얌전히 뜯어서 우적우적 김치를 씹었다.

“얘들아, 밥이라도 줄까? 너희 그러고 있으니까 기괴해…….”

“쟤네 저녁 먹었어. 배고파서 저러는 거 아니니까 그냥 저렇게 놔둬.”

한쪽에 모여 앉아 김치를 씹고 있는 20살들을 형들과 함께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으니 기묘하긴 했다.

“한국 제일 가고 싶어 하던 찬희는 멀쩡한데 말이지.”

“쟤가 언제 먹을 거 찾은 적 있나. 세계 각지에 떨궈 놔도 한국 음식 달라는 소리는 안 할걸.”

“그건 그렇지. 지운이 형 그거 기억나요? 저희 찬희 빼고 일본 다녀왔을 때?”

지운이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입을 쩍 벌리더니 빽 소리를 질렀다.

“아! 그때!!!”

“진짜 레전드였는데.”

“그때가 언제인데요? 왜요?”

제현이 멍한 얼굴로 김치를 씹다 말고 내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는지 눈을 빛내며 묻자 지운이 과하게 훌쩍이는 시늉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아니, 우리 차니차니가 어디 가는 걸 어지간히 싫어했어야 말이지. 1박 2일에 무슨 일이 있겠냐 싶어서 숙소에 혼자 두고 나랑 동진이랑 진형이랑 셋이 일본 여행 다녀온 적이 있었거든.”

“무슨 6살짜리 혼자 두고 여행 간 것처럼 그래요?”

“보통의 6살이 당시의 찬희보다는 더 믿음직하지.”

준의 물음에 동진이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하고 음산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공항에서 나오니까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어. 가뜩이나 차도 막히는데 찬희한테 전화며, 메시지며 날리는데 답이 없는 거야.”

“무슨 일이라도 있나 걱정하면서 겨우 숙소에 도착해 보니까 고요해. 쥐새끼 숨소리 하나가 안 들려.”

둘이 무슨 공포 괴담이라도 말하듯 분위기를 잡으며 말하자 제현과 준이 침을 꿀꺽 삼키며 집중했다.

“발치에 뭐가 걸려서 내가 와인 잔 열두 개는 깰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불을 켜 보니까 바닥에 뻗어 있는 차니니였어.”

“우리 없는 동안 잘 챙겨 먹으라고 여행가는 부모님처럼 끓여 뒀던 사골은 우리가 나갔던 그대로고 그동안 도대체 뭘 먹은 거냐고 물었더니…….”

지운이 동진이 말하는 동안 핸드폰을 뒤적이더니 플래시를 터트려 무슨 범죄 현장처럼 찍힌 사진 한 장을 제현과 준에게 들이밀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에너지 드링크 캔 12개였다.

“에너지 드링크……?”

“각 끼니당 300칼로리 맞춘다고 2캔씩. 이틀간 먹은 게 고작 에너지 음료 12캔.”

“와……. 요단강 건너고 싶어서 안달 난 사람도 아니고…….”

“이게 실화예요?”

“100%.”

정말 무서운 괴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새하얗게 질려서 묻는 제현에게 지운이 경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진짜 단백질 초콜릿 같은 거라던가 간편 끼니 대용식 정도만 됐어도 그렇게 식겁하진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진짜 우리가 1박 2일이 아니라 5박 6일같이 길게 갔다고 생각하니까 등골이 다 서늘하더라. 시체 치울 뻔했지.”

“어떻게 에너지 드링크로 끼니를 때울 생각을 하지? 보통의 사람 머리에서는 나올 수 없는 발상이라니까.”

“아예 안 먹는 것보단 낫잖아.”

사람을 앞에 두고 자꾸 말을 얹길래 고까워져서 한마디 대꾸하자 방안에 싸한 공기가 돌았다.

“찬희야. 형이 뭐라고 그랬지? 인간의 몸은 생존을 위해서 밥이라는 것을 먹어야 한다고 그랬지? 아, 얘가 아직 머신 러닝이 덜됐어.”

“찬희 가끔 ‘로봇이 아닙니다.’ 테스트도 실패하잖아.”

이젠 하다 하다 사람을 인공 지능 취급했다.

“형, 저는 절대 형 혼자 두고 여행 같은 거 안 갈게요.”

그 와중에 제현이 내 손을 꼭 붙들고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를 하기에 손을 휘저어 떨어뜨렸다.

“그땐 어려서 그랬고…….”

“허, 지금은 무슨 이백 살이신가 봐요?”

다들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하나같이 제현에게 몰려가 제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쩐지 나에 대한 팀 내부 신뢰도는 한없이 0%에 가까운 것 같았다.

***

- 트릭스 게이밍!!! 연이은 실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면서 게임 마무리됩니다!!!

-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 같던 트릭스 게이밍의 연승가도를 KJ 스노우가 끊습니다!

- 아, 이번 월드 시리즈에서 트릭스 게이밍이 최초로 전 세트 승리 우승이라는 역대급 기록을 세우는 것 아닌가 했거든요!

- 그만큼 트릭스 게이밍이 보여 준 경기력은 엄청났는데…… 그래도 같은 한국 팀에게 저지당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려나요? 하하.

- 아무래도 그분의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데요.

오랜만에 맛보는 패배감에 입맛이 썼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기실로 들어오는 동안 그 누구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좀 어때요?”

“열은 좀 떨어졌어.”

대기실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있는 찬희에게 다가갔다. 주먹만 한 얼굴이 마스크에 거의 뒤덮인 채로 쌕쌕거리며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찬희가 며칠 전부터 잔기침을 달고 살더니 목에 아프다고 하기에 팀에 비상이 걸려서 도라지며 배즙이며 구해다 먹이고 덥다고 투덜거릴 정도로 둘둘 싸맸지만,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오늘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경기장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내가 업고 데려왔는데 잠시 맞닿은 등이 데인 듯 후끈거릴 정도로 몸이 불덩이였다.

열이 내려가지 않아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경기 뛰겠다는 사람을 눕혀다가 수액을 맞히고 난 후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영화였다.

나이츠 리그에서 5번째 서브 선수는 포지션 상관없이 대타로 기용될 수 있었으나 보통 이렇게 서브 선수의 포지션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영화가 원래 버퍼였다고는 하나 딜러로 전향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난 터라 현역 때보다는 실력이 무뎌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조별리그나 8강에서 세계 무대 경험치를 먹여 주겠다고 데려온 건데 전승 우승 각이 보여 경기 한 번을 안 보내 놓고 갑자기 난데없이 4강 경기에서, 그것도 버퍼로 뛰게 된 영화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경기력으로 여실히 드러났다.

“죄송해요.”

초반에는 그럭저럭 흘러갔지만, 소통이 늦어 적팀보다 한발 늦게 지원을 온다든가 당황해서 손이 꼬이는 바람에 스킬 타이밍을 놓치는 등 프로 레벨에서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연달아 저지른 영화는 새파랗게 질려서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야, 영화야. 고개 들어 인마. 무슨 범죄 저질렀냐.”

“동형 말이 맞아. 야, 그게 뭐 네 잘못이냐. 갑자기 투입되어서 정신없을 만했지. 근데 마지막 스킬 미스는 좀 범죄급이었던 듯.”

“김준……!”

“중범죄는 아니고 경범죄, 어억!”

눈치도 없이 농담처럼 한소리를 했다가 동진에게 등짝을 철썩 맞는 준이었다.

‘저러다 애 울겠네.’

땀에 젖은 찬희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다가 한숨을 작게 쉬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영화 옆에 가서 섰다.

“긴장만 안 하면 돼. 너 지금 생각이 너무 많아.”

“네, 네. 생각이…….”

“딜러 하다가 와서 지금 버퍼는 이래야 한다,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느라 행동이 한 박자 느린 거야.”

“네…….”

내 말을 참 절실하게 듣는 것 같은데 워낙 움츠러든 상태라서 어째 반절은 그냥 튕겨 나온 것 같았다.

감독님도 엄지손톱을 다 갈아 마실 것처럼 잘근잘근 씹어 대며 지운과 뭐라고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월드 시리즈 첫 번째 패배인데 이거 무슨 조별리그 탈락 때보다 분위기가 우중충해서야 원.”

동진이 볼을 긁적이다 돌아가면서 팀원들의 어깨를 툭툭 도닥였다.

“너무 쳐지지 말고! 2세트 더 잘하면 돼!”

그 순간 소파에서 찬희가 벌떡 일어났다.

‘형 저혈압 때문에 컨디션 최상일 때도 저렇게 벌떡벌떡 일어나면 안 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일어서자마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다시 쓰러지는 걸 달려가 몸으로 받아들었다.

“형, 미쳤어요?”

놀란 마음에 버럭 소리 질렀는데…….

“혀, 형. 웃, 웃어요. 지금……?”

마스크 위로 덩그러니 나온 커다란 눈이 반으로 접히며 해맑게 방긋 웃고 있었다.

“코치님, 해열제 먹인 거 맞아요? 뭐 이상한 거 먹인 거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지운이 감독님과 이야기하다 말고 인상을 팍 쓰면서 오다가 내 품에서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찬희가 소리 내며 바보처럼 헤헤 웃자 입을 쩍 벌렸다.

“뭘 먹인 거야, 도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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