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TGT Darling: 아, 이거 이제는 제가 시작 안 하면 이상할 것 같은데요. 이거 누구를 또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겨야 하나.
HEG Tang: 달링 선수는 힐러라고 하기엔 공격력이 너무 높지 않나요?
HEG Spark: 딜러로 포지션 변경 안 하시나요? (웃음)
TGT Darling: 그분들은 너무 겁먹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제가 공격할 사람은 따로 있지 않겠습니까.
HEG DDuru: 전가요? 하하, 준이 많이 컸네.
TGT Darling: 많이 큰 건 성환이죠. 한국에 남아 있었으면 스프링 시즌에 저한테 혼쭐났을 텐데 멀리 가더니 간덩이가 커져서…….
HEG DDuru: 아, 키는 제가 더 크긴 해요.
TGT Darling: …….
TGT Guri: 그런 얘기를 했어요? 큰일 났네. 최초로 사전 인터뷰 저희가 질 것 같은데요.
TGT Checkmate: 게임으로 이기면 됩니다.
TGT Joker: (끄덕)
- 이거 달링 선수가 제대로 한 방 먹었는데요?
- 하하, 경기 시작 전부터 뚜루 선수의 매서운 펀치! 역시 딜러는 딜러인가 봅니다.
- 아, 경기 준비가 되었나 본데요? 나이츠 월드 시리즈 8강전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과 HEG의 경기 지금 시작합니다!
“아오! 한마디 더 해 줬어야 하는데! 또 열받네.”
“네가 참아.”
“3:0으로 이기면 되는 거지.”
경기 전부터 손바닥에 워터파크라도 개장한 것처럼 자꾸 땀이 차 닦기 바빴던 나를 빼고는 다들 느긋한 마음인 것 같아 다행이었다.
어제 지운과 한참 이야기 나누었던 것처럼 공격적으로 조합을 맞췄다.
“찬희야, 내 눈이 좀 침침한가. 맵이 좀 어둡다?”
“저쪽이 시야 장악을 공격적으로 하고 있어서 주도권 잡기 쉽지 않아요.”
나도 시야만큼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보는 편인데도 은근히 밀렸다. 경험치를 포기하고서라도 시야를 잡는 모습에 혀를 내둘러야 했다. 밴픽을 튼튼하게 하기도 했지만 단단함은 코렉트의 시야 장악에서 나왔다. 우리 위치를 거의 다 파악하고 있으니 잘리지도 않는다.
“이거 드러누우면 답 없는데. 제현아, 지원 가면 킬각 나와?”
“음, 저 데미지 모자랄 것 같은데. 동형은 못 올 것 같고.”
“괜찮아. 그건 내가 채울 수 있어.”
- 아, 초반에 강한 조합의 트릭스게이밍인데 지금 거의 중반에 접어들었는데도 킬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이거 후반으로 끌리면 방패로 얻어맞다가 끝나거든요?
- 맞습니다. 초반에 제대로 부수려고 공격적인 조합을 꺼내 들었는데 지금까지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 네, 말씀하시는 순간 조커가 파고들어 뚜루와 스파크에게 궁극기를 난사합니다! 아……! 딜이 제대로 박히지 않는데요.
- 체크메이트가 지원을 오지만…… 어? 어어?
- 녹아요!!! 녹습니다!!! 조커의 더블킬!!!
- 아, 체크메이트 신발도 안 뽑고 타락한 월계관 쓰고 있어요!!! 지금 코렉트 선수는 조합 아이템도 다 못 사고 있는데요!! 골드차이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 아이템 차이가 이렇게까지 나나요?
- 어쩐지 체크메이트가 시야 싸움에 적극적인 선수인데 오늘따라 토템 구매를 좀 덜 한다 싶었거든요!!! 그게 다 코어템을 빨리 뽑으려고!!! 대단합니다!!!
“야, 찬희 딜 살벌하네.”
“제현이만큼은 아닌데 그래도 잘 나와요.”
동진은 이번에도 순탱으로 체력, 방어력 템을 둘둘 말고 있어서 데미지는 0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상대도 순탱이라 서로 편안하게 몸 부대끼며 종일 스킬을 퍼부어도 양쪽 그 누구도 죽지 않는 땀 냄새 물씬 나는 탱커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얘네 진짜 잘 빠지네요.”
제현이 거의 다잡은 버퍼를 놓치면서 탄식했다. 잘 물리지도 않는데 퇴로를 찾는 속도가 단언컨대 세계 제일이었다.
“저기 버퍼 머리 돌아가는 속도가 서찬희 급인데?”
“저보다 빠른 것 같아요.”
내가 공격력 아이템을 간 이상 내 역할은 화력 지원이 우선인데 제현과 함께 들이박는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효과가 미미했고 제현도 마찬가지였다.
- 아, 트릭스게이밍 이대로 후반으로 질질 끌려가나요? HEG가 패배한 게임은 30분 안에 끝났고 30분이 넘어가는 게임에서 진 적이 없거든요!
- 시간은 어느새 벌써 29분……! 현실적으로 1분 안에 게임을 끝내는 건 어려워 보입니다.
- 30분이 넘어가면 이제 HEG의 세상인데요. 조커의 힘도 빠지기 시작합니다!
코렉트 선수의 리그 별명이 재림공명이라더니 머리 회전이 빠르고 피지컬도 좋았다.
“4:4 전면전은 우리가 손해인데……. 지금 딜러 빼고 모여 있긴 하거든?”
“뚜루 지금 돌아서 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이 사이에 열죠?”
“시야 없어서 위치 파악 안 되는데 도는지 어떻게 알아?”
확신에 찬 제현의 말에 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묻자 제현이 음산하게 웃었다.
“나성환 패턴 뻔하지.”
- 지금 뚜루 빙 돌아서 오고 있는데…… 이거 뚜루 도착하는 순간 100% 집니다! 빠지든가 지금 치든가 해야 해요!
- 아니, 트릭스게이밍? 혹시 지금 저희랑 텔레파시라도 통했나요! 들어갑니다! 지금 뚜루가 허겁지겁 달리고 있지만……!
- 와, 힐러부터 깔끔하게 녹습니다. 지금 타게팅 너무 깔끔합니다! 너무 좋아요!!
- 코렉트 아웃!!! 체크메이트의 더블킬!!! 4:1로 두들겨 맞으면 아무리 탱커라고 해도 어떻게 버티나요!!! 탕 아웃!!!
- 급기야 뚜루 선수 혼자 남고 마는데요!!!
“어딜 도망가려고.”
어차피 세 명을 잡은 상태에서 성환을 잡으나 놓치나 상관도 없고 잡으려 한다고 해도 내가 도울 필요가 없어서 동진과 오브젝트를 챙기러 가는데 제현의 눈에 잔잔한 광기가 돌았다.
- 어딜 도망가!!! 조커가 따라잡으면서 조커도 더블킬! 깔끔하게 다 잡습니다!!!
- 이야, 조금 전 한 타 다시 볼까요. 구리 선수가 먼저 파고들어서 광역 도발을 걸자 그사이 조커가 한 방! 체크메이트가 마무리!!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깔끔한 한 타였습니다!
- 캬, 기세 좋게 성문까지 두드려 봅니다.
- 아, 부활하자마자 달려와 보지만 뚜루가 늦게 잡혀서 이거 셋이서 어떻게 막습니까!
- 트릭스게이밍!!! 무엇이든 뚫는 창이 방패를 뚫어냈습니다!!! 지금 마의 30분을 넘기고도 HEG에게 승리한 유일한 팀이죠?
- 이게 초반부터 잡힐 듯 말 듯……! 어우, 답답하던 게 뻥 뚫리는 시원한 한 타! 시원한 승리!
2, 3세트도 비슷한 양상으로 제현이 성환의 움직임을 예측하자 게임은 걱정한 것보다 훨씬 쉽게 흘러갔다. 3세트 승리 표시가 뜨고 일어나 HEG 쪽으로 가서 악수를 청했다.
“대진운이 안 좋았다.”
“그러게요. 하필 형을 만나서.”
성환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제현은 악수 대신 성환을 와락 끌어안았다.
“100만 원 기다리고 있을게.”
“너는 진짜 친구가 우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나 잡고 올라가는 거니까 꼭 우승해.”
“그건 걱정하지 마.”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장비를 챙기는데 관중석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서 보니 진형이었다.
“뭐야, 직관했어?”
“응. 너 떨어질까 걱정돼서.”
“내일 경기 있는 사람이? 자신 있나 봐?”
“어차피 너희랑 붙을 때 봐야 할 거 직관으로 보나, 나중에 보나.”
아직 4강 진출도 못 한 사람이 벌써 결승 진출 따 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그러다 떨어지지나 마.”
“역시 이기는 게 좋긴 좋아? 얼굴 많이 좋아졌네.”
“3세트 끝나면서 뭔가 얹힌 게 싹 내려가는 느낌이더라고.”
“기특하네.”
진형이 내 머리를 쓱쓱 휘저어 산발을 만들었다. 내 어깨 너머를 한참 보기에 나도 뒤돌았더니 인터뷰를 위해 스테이지에서 혼자 대기하고 있는 제현이 상큼한 얼굴로 뭐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거리가 있어서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는 거야.”
“내가 독순술을 좀 할 줄 아는데. ‘내가 앓다 죽든가, 저 족제비 놈을’ 이거 나 말하는 건가? ‘눈앞에서…… 치워 버리든 해야지.’라고 하는데.”
“뭐래. 맘대로 지어내지 마.”
저렇게 예쁘게 웃고 있는 제현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쟤 네 앞에서도 나한테 함부로 굴잖아.”
“그건 그렇지만. 내가 하는 거 보고 배운 거지.”
제현이가 자기는 나한테 죽어도 못난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고 했으면서 진형의 앞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함부로 말하곤 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다고 하면 안 되겠지. 제현이 조심하게 되면 내 볼거리만 주는 셈이었다.
“서찬희, 나한테 너무 매정해졌어. 파리에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린 나는 뭐가 돼.”
과하게 슬퍼하는 척을 하는 진형을 보자 웃음이 다 나왔다. 나 없이도 잘만 살았을 거면서.
“형한테는 늘 고맙게 생각해. 같은 팀원도 아닌데 이렇게 살뜰하게 챙겨 주고.”
오늘도 관전 온 이유가 우리 팀 전력 파악에도 있었겠지만, 우리가 아직 결승에 올라갈지도 모르는데 온 것을 보면 응원차 온 게 분명했다.
“고마우면 뭐 안 해 주나.”
“뭘 원하는데.”
진형이 제 볼을 톡톡 검지로 두드렸다.
“뽀뽀.”
“미쳤어?”
“아, 왜. 프랑스에서는 인사야.”
얼토당토않은 생떼를 부리기에 들이미는 얼굴을 밀어냈다.
“진짜 이러지 말자. 나 간만에 기분 좋은데.”
“그래서 좀 들이대 봤어. 오늘은 좀 받아 줄 것 같아서.”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 이거지. 한창 시시덕거리고 있으니 제현이 인터뷰를 끝내고 이쪽으로 허겁지겁 뛰어왔다.
“뭐 급하다고 뛰어와?”
“급하죠. 누가 또 어떤 개수작 부릴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안 급해요?”
“들켰나.”
능글맞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진형을 나와 제현이 동시에 째려보았다. 왜 애 속을 긁고 난리인지.
“아, 너무 그러지 마. 나 내일 8강 경기 있는 사람이라고.”
“너, 내 손으로 떨어뜨리고 싶으니까 지지 마.”
“그건 걱정하지 마. 나 잘하거든.”
왜 벌써 둘이 아웅다웅하는지 모르겠다.
“야, 황제현. 너 괜찮아?”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니, 답답해 보여서 그래.”
“네 얼굴 보면 답답하긴 해.”
“그게 아니고…….”
진형이 아래위로 제현을 쓱 훑어보았다. 제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러다 또 싸움이라도 날까 봐 서둘러 둘 사이에 파고들었다.
“둘 다 이제 그만해. 이상한데 힘 빼지 마. 형 아까 형네 감독님이 빨리 오라고 부르지 않았어?”
“어차피 전략 회의하고 쉴 건데 급하게 갈 필요 없어.”
“그렇게 느긋하게 굴다가 지면 10년은 놀릴 거야.”
“근데 너 목 조금 잠긴 거 보니까 내일 목쉬겠다. 목캔디 줄까?”
“됐으니까 좀 가.”
“알았어. 방에 가면 따듯한 차라도 한 잔 마셔.”
하여간 아직도 자기 팀원처럼 이렇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챙겨 주니 고맙고 미안한데 제현의 눈치는 보이고 중간에서 미칠 것 같았다.
진형의 등을 떠밀며 보내자 실실 웃으며 밀려나면서도 제현에게 윙크까지 하면서 갔다. 제현이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저 형이 진짜 요즘 왜 저러는지. 진형이 가고 제현이 말을 고르는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 혹시…….”
“너 또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잘 생각하고 해라.”
“…….”
무던한 녀석이 진형과 관련된 일에만 유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