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87화 (87/100)

87화.

조식 시간에 모여 앉은 얼굴들이 다들 숙취라도 겪고 있는 얼굴이었다. 8강 경기가 하루하루 다가올수록 웃음이 사라져 갔다.

“그래도 버닝 비스트가 HEG 보단 상대하기 낫지.”

“홈팀인데? 다른 나라 팀들도 응원해 주긴 하는데 아무래도 유럽팀이랑 붙으면 차이가 나더라.”

“그건 그래. 팬들 응원받는 게 또 버프인데.”

“내년 월드 시리즈는 아직 예정이지만 한국이 유력하지롱?”

지운이 어깨를 흔들며 깐족거렸다. 진형의 옆에 앉은 선수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다 말고 눈인사를 건넸다. C 가문으로 나와 함께 엮이는 Carnival 카니발 선수였다.

“둘이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내가 중간에 통역할게.”

진형의 말에 카니발 선수나 나나 둘 다 어깨만 으쓱했다.

“둘이 성격 되게 비슷한 거 알아? 버퍼 특인 줄 알았잖아.”

저쪽도 나만큼이나 내향적인 성격인 것 같았다. 진형이 영어로 뭐라 뭐라고 하는데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다시 자기 접시에 시선을 박았다. 지운과 동갑이라고 했으니 28살, 현 NKL 최고참이었다. 나보다 데뷔도 빠르니 업계 선배라고 해야 할까.

“와, 여기 코렉트 선수만 오면 명문 버퍼 C 가문 사람들 다 모이네.”

“헐. 근데 지금 찬희 형이랑 합 맞췄던 딜러들 지금 C 가문 하나씩 끼고 있지 않아요? 소름…….”

“아, 코렉트 선수 스프링에 HEG 갔지. 대박이네.”

다들 우승도 하고 이렇게 큰 무대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또 마냥 좋지도 않았다. 서로 아는 사이다 보니까 나쁜 버릇이라거나 특정 상황의 대처 방법이라든가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거기다 든든한 버퍼들도 달고 있으니 머리가 아프다. 진형이 내 접시를 톡톡 두드렸다.

“아파?”

“아니야.”

“컨디션 조절 잘해야지. 이틀 뒤가 8강인데. 결승 올라와야 겨우 만나잖아.”

MVP의 상대는 버닝 비스트로 EKL 서머 시즌 우승팀이었지만 경기력은 어딘가 부족해서 사실 진형보다는 우리가 걱정이 많았다.

“형이나 잘해. 자만하다가 떨어지지 말고.”

“알겠어.”

근데 또 말은 겁먹은 것처럼 보이기는 싫어 괜히 강하게 나갔다. 진형과 함께일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옆에서 멍하니 빈 물컵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제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어, 네, 네.”

요즘 제현이 생각에 잠겨 멍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안 그러던 애가 저러니 아무래도 걱정스러워 지운에게 슬쩍 이야기도 했었다.

‘네가 걔 걱정할 때냐?’

‘그건 아는데 원래 안 그러던 애가 그러니까.’

‘게임에 영향 주지는 않을 테니 그냥 내버려 둬. 정 거슬리면 잡아 놓고 뽀뽀라도 해 주든가.’

별것도 아닌 걸로 유난이라는 듯이 머리를 긁으며 하는 소리에 사레들려서 한참을 콜록거려야 했다.

“황제현.”

“네?”

잡아 놓고, 뽀뽀라니 역시 그건 좀. 지운의 말대로 지금 제현을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코앞에 닥친 8강 전까지 지금의 무난한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찼다. 제현이 저렇게 멍하다가도 연습 경기를 할 때는 제대로 집중하니 괜한 걱정일지도 몰랐다.

“아니야.”

“……정말 어디 안 좋아요?”

“아니라니까.”

제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괜히 걱정하다가 제현에게 쓸데없는 걱정이나 시킨 것 같았다.

***

- KJ 스노우가 S7을 3:1로 잡으며 당당히 4강에 진출합니다!!!

- 유럽팀의 첫 탈락으로 경기장 내에 탄식이 가득합니다!!!

“와, 잘한다.”

“확실히 잘하긴 하네요.”

“괜히 우리 천적이 아니라니까.”

“이제 천적 아니지 않아?”

결승 때보다 탄탄해진 KJ 스노우였다. 탱커 맨데이의 폼이 날이 가면 갈수록 오르고 있었다.

“젊은 피 무섭네.”

동진이 세상 다 산 것 같은 노인처럼 말했다.

“내가 그래서 은퇴했잖아.”

“와, 나 형 은퇴할 때 너무 이르지 않냐고 왜 도망가냐고 말린 거 너무 후회해요.”

“아냐, 그래도 너만 한 탱커 없다. 버텨. 제2의 전성기를 찍어.”

“제1의 전성기도 없었는데 제2의 전성기가 어떻게 와요.”

“야, 찬희야. 동진이 왜 저렇게 사람이 비관적으로 바뀌었냐?”

“여자 친구 못 봐서 그럴걸요.”

“아.”

뒤에서 준과 제현이 킥킥거렸다.

“웃지 마. 너네도 연애해 봐라. 준이는 그렇다 치고 제현아, 너는 왜 여자친구가 없냐?”

“저요?”

제현이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말을 사람으로 만든 것처럼 순수한 얼굴을 하자 동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야, 됐다, 됐어. 진형이 보니까 잘생긴 애들은 얼굴값을 하더라.”

“아, 그 사람이랑 동급으로 쳐지는 건 좀 자존심 상하는데요.”

“저래서 못하는 건가. 너 관심은 있는 거야? 소개해 줘?”

“형, 당장 내일이 8강전인데 무슨 소리예요.”

방긋방긋 웃고 있던 제현이 얼굴에 난처한 색을 띠었다.

“아니, 진짜 너 소개해 달라는 사람 많으니까 필요하면 말하라고.”

“아, 아까부터 사람 앞에 두고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니 준이는 그렇다 치고? 그렇다 치고???”

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끔 보면 준이는 치와와 같았다. 동진 앞으로 달려가서 발을 구르며 땍땍거리는 모습이 아르릉거리는 치와와랑 너무 닮아 입가를 가리고 조금 웃었다.

“저한테는 한 번도 소개해 준다고 한 적 없으면서!!!”

“넌 너무 까다롭잖아.”

“뭐요? 저만큼 쉬운 남자 어디 없거든요?”

“나이는 동갑이나 위로, 세 살 정도 키는 작고 아담해야 하고 눈은 동그랗고 약간 쳐져서 강아지상, 피부는 하얀 편, 패션 감각이 너무 후지거나 너무 힙하지 않을 것. 너는 이걸 충족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을 거라고 보냐?”

너무 터무니없이 양심이 없는 조건이긴 했다.

“이, 있을 수도 있죠!”

“없어!”

혹시 싸우나 싶어서 허겁지겁 달려와 놓고 재미있는지 관전하고 있던 지운이 동진이 소리를 빽 지르자 둘 사이에 파고들었다. 준을 말리고 살살 달래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와 앉혔다.

“워, 워. 너 그러다 동진이한테 혼날라. 그만 노닥거리고 연습하자.”

“언젠가는 만날 거라고요.”

“그래, 꿈은 크게 가져.”

***

내일 경기 컨디션을 위해 연습은 일찍 끝났다. 네 방에서 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제현은 여전히 내 방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있잖아요.”

“응?”

“동형한테는 우리 사이 얘기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오늘 동진이 소개해 주니 뭐니 해서 마음에 걸렸던 것 같았다.

준이는 대놓고 싫어하는 편이라 논외였지만 동진은 애매했다. 딱히 편견을 둘 것 같지는 않지만,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보니 좋아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지.

“어…… 일단 월드 시리즈 끝나고 생각해 보자…….”

“그래요. 급한 건 아니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나야 제대로 된 연애를 해 본 적도 없어서 모르겠지만 보통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던가?

“야, 찬희야. 아직 안 자지?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제현이 너는 또 왜 여기 있어?”

지운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방 카드키는 총 세 개로 나, 제현, 지운 이렇게 들고 있는데 저 둘이 나보다 더 내 방처럼 드나들었다.

“저는 그냥 관엽 식물처럼 생각해 주세요.”

“지랄도 풍년이다. 너희 리그 중엔 괜히 힘 빼지 말아라. 아무리 e스포츠라지만 몸이 힘들면…….”

지운의 말에 등짝을 손바닥으로 짝짝 때리는데 제현이 픽 웃었다.

“진짜 시어머니 같아요.”

“그게 무슨 섭섭한 소리야. 황 서방. 다 내가 너희 잘되라고 이러지. 이게 아니고 황 관엽 식물 너 조용히 해 봐. 내일 HEG에서…….”

지운이 언제 농담 따먹기를 했냐는 듯 진지한 얼굴로 방금까지 감독님과 이야기하고 온 전략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서 이 정도면 괜찮지? 어차피 내일 다들 모이면 한 번 더 말하긴 할 건데 너랑 미리 얘기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좋은 거 같아요.”

한참 얘기하다가 무심코 침대를 보니 얌전히 누워서 대화를 듣고 있던 제현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쟤는 진짜 길바닥에서 재워도 잘 잘 것 같다.”

“성격이 둥글둥글해서 그래요.”

“그런데 쟤 아까 표정 안 좋던데 뭐야?”

“아, 그게…….”

간략하게 전해 들은 지운이 팔짱을 끼고서 고심했다.

“동진이라……. 뭐, 괜찮지 않으려나? 준이는 절대 안 되지만.”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월드 시리즈 끝나고 생각해 보려고요.”

“잘 생각하긴 했는데…… 그건 코치로서 하는 말이고.”

지운이 팔짱을 풀고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헝클었다.

“하지 마요.”

“인간 백지운으로서는 너나 쟤나 경기 때문에 뒤로 미뤄 놓은 것들이 너무 많아 보여서 안타깝고 그래.”

“처음엔 제현이 신경 북북 긁던 사람이…….”

“그거야 네 취향이 얼굴만 반반한 쓰레기 같으니까 쟤도 그런 줄 알고 시험에 들게 해 본 거지.”

가만히 있는 진형이 괜히 또 욕을 얻어먹는 게 웃기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아무튼 동진이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걔는 그런 사소한 걸로 자기 사람 쳐낼 사람은 아니야.”

“응, 알겠어요.”

“잘못되더라도 내가 남잖아? 슈퍼스타 백지운 하나면 됐지.”

지운이 하도 깐족거려서 그렇지 여러모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나는 왜 형을 두고 진형이 형이 좋았을까.”

“나도 그게 미스터리다.”

“역시 나는 얼굴 보나 봐.”

“와, 이게 존심 상하게 하네.”

지운과 계속 킬킬거리며 얼마나 수다를 떨었는지 제현이 자다가 깨서 안 자냐고 타박을 줄 때까지 잡담을 늘어놓았다.

***

- 나이츠 월드 시리즈 8강전 2일 차에 접어들고 있는데요. 프랑스 파리에서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어제 KJ 스노우의 경기는 정말 굉장했죠? 맨데이 선수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할 때 관중석에 울려 퍼지는 탄식이란!!!

- 하하하, 맞습니다! 오늘도 우리 한국팀이 기다리고 있는데요. KKL 새로운 왕조를 써 내려가고 있는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입니다!

- 오늘 경기의 주요 관전 포인트 보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

탱커 Guri

힐러 Darling

딜러 Joker

버퍼 Checkmate

[HEG]

탱커 Tang

힐러 Spark

딜러 DDuru

버퍼 Correct

- 제일 눈에 띄는 점은 일단 명문 버퍼 C 가문 대첩이죠?

- 맞습니다! 원조 C 가문 정통 버퍼, 미국의 카니발 선수와 모든 버퍼의 첫사랑 한국의 체크메이트 그리고 공명의 환생이라 불리는 중국의 코렉트! 나이츠 3대 버퍼죠.

- 이 둘이 맞붙는 경기를 꼭 한 번쯤은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보게 되네요.

- 방어적인 성격이 뚜렷한 HEG와 죽창 앞에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이 모토인 트릭스게이밍의 경기는 그야말로 무엇이든 뚫는 창과 모든 공격을 막는 방패의 싸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 그리고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뚜루 선수가 트릭스게이밍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 하하, 뚜루와 체크메이트는 한 시즌이지만 합을 맞춰 본 사이죠.

- 네, 만년 삼등 시절의 트릭스게이밍이었지만요. 그 점이 경기에 영향을 줄까요?

- 아무래도 친정팀이랑 붙게 되면 전의를 태우는 선수들이 많더라고요? 하하! 사전 인터뷰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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