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이 게임은 내가 집도한다!”
팀의 분위기 메이커라고 할 수 있는 준이 시작하자마자 소란스럽게 외쳤다. 바짝 얼어 있던 동진도 허탈하게 허허 웃는 것을 보면 준은 이미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우리나 저쪽이나 무난한 죽창 조합이라 초반에 얼굴을 맞대면 서로 앞뒤 제쳐 두고 딜 교환하느라 바빴다. 제현과 상대 딜러가 서로 한 대라도 더 치려고 아등바등했다.
“너무 맞붙어 주지 마. 운영 면에서는 우리가 우세니까 무리할 필요 없어. 나 오브젝트 챙기러 동형이랑 합류할 거니까 너무 싸우지 마.”
“넵.”
대답은 잘해 놓고 아니나 다를까 제현이 상대 딜러와 정신없이 싸우느라 피 관리가 안 된 상태에서 상대편에게 둘러싸였다.
“온다고 말 안 해 주셨잖아요.”
“핑 찍어 줬잖아.”
제현이 억울한 듯 과하게 울먹이며 뒤로 빼고 있긴 한데 위치가 깊어서 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아, 조커 선수 이렇게 퍼스트 킬 골드를 넘겨 주나요!
- 그런데…… 생각보다 잘 빠지고 있는데요? 너무, 너무 잘 빠지는데요?!
- 이거 지금 트릭스게이밍은 이미 오브젝트 다 쓸어 먹은 상태라서 레인보우 시티즈 지금 조커를 잡아도 조금은 손해거든요? 지금 턴을 한 개도 아니고 서너 개 소모해서 조커 성장 하나 막아 보겠다는 건데 이걸 이렇게……!
- 아, 결국 잡히고 마는데요. 설마 조커가 이걸 사나 했습니다.
- 어? 어어……!
- 조커가 죽으면서 버퍼에게 묻혀놓은 도트딜이……!
- 아아악! 이걸 잡았어요!!! 조커는 쉽게 가지 않는다!!!
- 이거 너무한데요! 다 버리고 조커 하나 잡겠다는데 이걸 길동무를 데려가나요!
“나이스, 나이스!”
“이대로 쭉쭉 밀면 되겠다. 상대 지금 성장력 뒤처져서 우리 못 이겨. 머릿수 같으면 그냥 싸워도 돼.”
- 폼 좋습니다. 트릭스게이밍! 쭉쭉 밀고 들어가는데요!
- 지금 트릭스 게이밍의 자신감은 체크메이트의 아이템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격력 아이템 둘둘 말고 슈퍼 하드 캐리형 버퍼입니다. 지금 체크메이트 KDA 4/0/2!
- 이게 딜러야, 버퍼야 소리 저절로 나오는데요? 아니 이게 딜이 말이 되나요? 이거 죽창 대결이라고는 했는데 체크메이트 죽창 성능 이게 무슨 일이죠?
- 지금 체크메이트 거의 대장군입니다. 뚜벅뚜벅 걸어서 뻥뻥 쏘면 지금 다 반 피부터 시작하는데 어떻게 싸웁니까!!!
- 지금 20분이 안 됐는데 골드차이가 만 골드를 넘어갑니다!
-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NKL, 어디 KKL의 매운맛을 한 번 맛봐라!
이미 게임은 너무 많이 기울어 있었다. 시간을 보니 최단 시간 경기를 노릴 만도 한 것 같았다.
“슬슬 마지막 한 타 하면 될 것 같은데.”
“형, 지금 적팀 위치 예상돼요?”
“글쎄, 이쯤에 모여 있지 않을까?”
꽤 오랜 시간 위치가 드러나지 않고 있기는 했다. 시야가 없는 맵 한구석에 핑을 찍자 대뜸 제현이 궁극기를 메다꽂았다.
“어어…….”
-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 허공에 흩뿌려진 조커의…… 궁극기?
- 하하학! 아, 게임이 일방적이다 보니까 예측 궁을 날려 본 것 같은데요! 아, 공기가 1데스 적립합니다!
“이쯤이라면서요……!”
“아니, 확실하지도 않은데 그렇게 궁을 날리면 어떻게 해…….”
“형을 믿은 거죠.”
믿을 걸 믿어야지. 한숨을 푹 쉬고 있으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적팀이 하나둘 시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걸 뭉쳐서 하나 끊어 먹을 생각을 안 하고 흩어져서 방어해? 이해가 되지 않아 헛웃음이 다 나왔다.
“나 믿지 마. 도저히 예측이 안 되네. 내가 약팀인 적이 있었어야지.”
“와…….”
내 혼잣말에 세 명이 감탄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동시에 냈다.
“형, 방금 한 말 진짜 멋있고 진짜 재수 없었어요.”
“나, 체크메이트……! 단 한 번도 약팀인 적 없는 한국 서버 랭킹 1위 대표 버퍼……! 강팀에서 태어나 강팀으로 자란…… 강한 버퍼 체크메이트!”
제현이 물꼬를 트자 준이 경기중인 것을 까먹었는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깐족거렸다.
“집중 좀 하자.”
보통 동진이 해야 했던 대사인데 내가 하고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동진이 바쁘게 적팀에게 이니시를 걸면서도 동시에 어깨를 떨며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저 형이 진짜……!
- 아니, 지금 이제 막 20분이 넘었는데 마지막 성문이 두들겨지고 있어요.
- 이거 못 막습니다! 못 막아요! 죽창 대결은 맞는데 한쪽은 죽창이 부러졌어요!!!
- 이보다 깔끔한 승리가 있을까요? 압도적인 파워로 밀어붙이면서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 월드 시리즈 첫 경기에 승리합니다!
- 어제 KJ 스노우는 강력한 우승 후보인 MVP까지 잡아내면서 KKL의 저력을 제대로 보여 주었는데요! 오늘 트릭스게이밍도 남은 사이버 사무라이 전도 승리해서 KKL 전승 행진을 이어 나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컨디션도 한국에 비해 떨어져 경기 시작 전에는 손이 굳을 정도로 긴장했는데 괜히 긴장했나 싶을 정도로 허무하게 첫 경기가 끝났다.
아이템이 쭉쭉 뽑히고 성장 차이가 확연하게 나자 시원하게 딜이 박히기는 했지만, 너무 빨리 끝나서 오히려 얼떨떨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
4일간 진행된 조별 예선 1주 차 마지막 경기를 다 같이 대기실에 모여서 보고 있었다.
어제 2경기를 모두 승리하고 8강 진출권을 따놓은 진형도 옆방에 있다가 잠시 경기를 같이 보러와 소파 위에 다들 엉켜 있었다.
- 이게 무슨 일입니까! 사이버 사무라이가 모두의 예상을 부수고 레인보우 시티즈를 잡으면서 C조 2위로 8강에 진출합니다!!!
- 정말 예상 못 한 일이었죠! 2일 차에 전패했던 팀이 당당하게 2위로 8강을 밟습니다!!!
- C조 2위가 결정되면서 이제 8강 진출 팀이 전부 나오게 됐습니다. 이어서 8강 추첨식이 있겠는데요. 우선 8강 진출팀 보시죠!
[8강 진출팀]
A조
MVP (3승 1패)
KJ 스노우 (2승 2패)
B조 – 1위 결정전 포함
S7 (4승 1패)
HEG (3승 2패)
C조 – 2위 결정전 포함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 (4승 0패)
사이버 사무라이 (2승 3패)
D조
W게이밍 (4승 0패)
버닝 비스트 (2승 2패)
- 이야, 트릭스게이밍! W게이밍과 같이 무패로 8강에 입성합니다!
- 아직 이른 소리인 것은 알지만 혹시…… 전승 우승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 하하! 트릭스게이밍의 최근 전력을 보면 충분히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추첨식 전에 간단하게 대진 추첨에 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네, 우선 1위 팀들만 따로 뽑아서 각 토너먼트에 우선 분배되고 이후 이 팀들을 상대할 2위 진출팀들을 뽑는 방식입니다. 조별 예선에서 만났던 팀의 경우에는 8강에서 만나지 않습니다!
- 그렇다면 트릭스게이밍이 KJ하고 8강에서부터 만날 수 있는 건가요?
- 네, 맞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전부 8강 진출한 것은 좋지만 제발 더 높은 곳에서 마주쳤으면 좋겠는데요.
- 이번 8강 추첨도 스피릿 게임즈 CEO 루크 앤더슨이 등장합니다. 제일 첫 공에서 나온 이름은……!
- S7! 유럽팀이다 보니 역시 환호가 굉장합니다.
- 두 번째 공의 주인은!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
- 아, 개인적으로 세 번째가 아닐까 했는데 예상을 또 빗나가는군요.
- ‘삼’각이니까요? 하하!
- 이어서 MVP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남은 공은 W게이밍이겠네요.
“아, 도대체 MVP는 만나질 못하네.”
“만나도 결승에서나 보겠다.”
대기실 화면으로 추첨식을 보고 있던 제현이 아쉬운 소리를 했다.
- 자 이제 진짜 중요한 상대 팀 추첨이 있겠습니다.
- 재작년에 KJ 스노우가 우승했을 때는 결승전이 KKL이었거든요!!! 어느 팀이 이겨도 한국팀이었던 여기가 월드 시리즈야 KKL이야? 이렇게 외쳤던 게 기억나는데 올해 나월에서도 그 모습을 좀 보면 좋겠는데요.
- 자, 공은 뽑혔습니다.
- HEG!!!
- 아, S7과 HEG는 같은 B조라서 다음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트릭스게이밍과 8강에서 붙겠네요!
- HEG에 또 우리 뚜루 선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친정팀과의 매치업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네요.
- 이어서…… 어후!!!
- KJ 스노우가 뽑힙니다!
- 이야, 이거 HEG가 아니었으면 우리 선수들 8강에서 마주칠 뻔했네요!
- 아무리 잘해도 4강에서 한 팀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8강에서 마주치는 것보단 낫네요!!!
- W게이밍과 버닝비스트가 같은 D조라서 추첨과 상관없이 MVP와 버닝비스트, W게이밍이 사이버 사무라이와의 매치업이 되겠군요.
- 이야, 이번 8강 이거 재밌겠는데요!
- 꿀잼 매치업이 가득한 나이츠 월드 시리즈 8강으로 다음 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HEG라.”
“KJ 스노우 피해 간 건 좋은데 하필 HEG냐.”
감독님과 지운이 동시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우리가 죽창 제현을 필두로 공격적인 조합이라면 그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팀이었다.
우리 팀에 있을 때는 욕 먹기 바빴다지만 성환은 KKL에서도 수비적인 성향의 안정적인 딜러로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는 딜러였다. 팀 성향이나 나와 맞지 않아 삐걱거렸는데도 3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던 것도 거기에 있었다.
“KJ는 그래도 딜러는 공격적인 편인데 HEG는 그냥 방패야.”
“결승전 경기 봤어? 못 뚫으면 지는 거고, 뚫으면 이기는 건데 W게이밍도 못 뚫더라.”
작년 월드 시리즈는 W게이밍의 세상이라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닐 정도로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는 팀이었는데 이번 서머 시즌 결승전에서 무력하게 HEG의 방패에 얻어맞는 모습을 보였다.
HEG는 원래 그렇게 잘하는 팀이 아니었는데 스프링 시즌에 선수들을 싹 물갈이하면서 탄탄해졌다. 성환의 영입도 한몫했는데 그 덕에 우리의 1대 욕받이 무녀는 한국에서는 못하더니 중국에서 잘한다며 국적에 의심을 사며 욕을 먹었다.
“우리가 자주 쓰는 전략이 한 놈만 패서 멘탈 터트리는 건데 저긴 터트릴 사람이 없다.”
“성환이도 멘탈 하나는 좋은 편이긴 하지.”
다들 심각한 얼굴로 한마디씩 얹는데 제현이는 아무래도 다른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다리로 툭툭 치자 그제야 대화에 집중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그냥 잡생각이 많아요. 갑자기 갈 길이 아득해진 기분이에요.”
자신감 빼면 시체인 제현이 이러니 별일이었다. 중국 리그 결승전 경기가 충격적이기는 했다. 성환의 활약도 대단했고, 연봉 차이가 난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기억났다. 친구 사이라서 더 주눅이 들거나 한 것일까.
“내가 성환이랑 합 맞춰 봐서 아는데, 네가 더 잘해.”
“왜 갑자기 당연한 소리를 하세요?”
잘못짚었나 보다.
“아니, 자신 없어 보이길래…….”
“아, 게임은 걱정 안 해요. 저도 비공식이지만 성환이랑 합 맞추던 사람인데 걔 패턴 뻔하거든요. 딜러 싸움 제가 이기면 게임도 이겨요.”
“좀 정형화되어 있긴 하지만 패턴까지는…….”
“내기하실래요? HEG 전 3:0으로 이길 자신 있는데.”
이래야 황제현이지.
“그건 성환이랑 해.”
“이미 했는데요?”
“뭐 걸었는데?”
“100만 원이요.”
“사행성 도박하면 징계 먹어…….”
내 말에 제현이 평소처럼 방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