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제가 힘들 때 참지 말고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형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너만큼 날 응석받이로 변화시킨 사람도 없을 텐데. 여기서 더 응석을 부리라 하면 내가 어디까지 갈 줄 알고…….”
지금도 손짓, 눈짓 한 번에 알아서 물주고 밥 주고 재워 주는데 한술 더 떴다가는 거의 제현의 등골을 빨아먹고 사는 기둥서방이라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네 기둥서방도 아니고.”
“기둥서방도 일단은 서방 아닌가요. 저는 진짜 마음에 드는데. 기둥서방이라도 좋으니까 제 서방님 해 주세요.”
“넌 진짜 이상한 데서 은근하게 미쳐 있어.”
“그러니까 지금 알아봤자 늦어도 너무 늦었다니까요.”
제현이 키들거리며 웃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배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제현을 보다가 이제야 파리의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예쁘다.”
“제가 여기 예쁘다고 했잖아요.”
“말고, 너 예쁘다고.”
제현은 말문이 막힌 채 목덜미부터 천천히 붉어지더니 종래에는 얼굴뿐 아니라 귀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나도 이런 소리를 툭툭 던지게 만드는 것을 보니 파리는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도시였다.
“형은 진짜 선수인 것 같아요.”
“나 선수 맞아. 나이츠 국대인데. 비자 보여 줘?”
“또 그렇게 넘어가려고요? 고단수라니까.”
제현의 귀 끝은 호텔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붉었다.
***
마냥 그렇게 로맨틱하기만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우선 첫째로 우리는 파리에 놀러 온 것이 아니라 일하러 왔기에 그럴 수 없었다. 두 번째로는 대한민국 1번 시드라는 큰 이권을 받고 심지어 꿀 빠는 조라고 소문난 물렁 맛집 조에 뽑혔으니 여기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간 죄다 한국 땅 밟기도 전에 쳐 죽일 놈들이 되기 쉬웠다. 제대로 된 성적표 없이 귀국했다가는 아마 인천 공항부터 숙소까지 3보 1배로 석고대죄해도 모자랄 것이었다.
나는 진한 다크서클을 뽐내며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쥔 채로 한참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낯선 곳에 들려오는 언어도 낯설어 당장 내 방, 내 침대에 누워서도 신경이 곤두섰다. 잠이 늘어 일일 권장 수면량보다 길게 자면서도 온종일 피곤했고 마우스를 놓으면 불안했다.
어제 개막전에서 KJ 스노우는 죽음의 조에서 2승을 챙겼기에 우리는 더욱더 비상이었다. KJ는 심지어 올해 유력 우승팀으로 꼽히는 MVP를 상대로도 승리했다. 2일 차의 첫 번째 경기는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과 미국의 2번 시드 레인보우 시티즈라서 지운이 진형을 찔러서 정보를 은근슬쩍 얻어 오고 있었다.
“NKL 결승전 봤으니까 알 테지만 전체적으로 꼼꼼한 팀은 아니야. 우리가 운영적으로 압도할 수 있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우리는 조별 예선 전승이 목표야. 눈에 불 켜고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단 한 세트라도 내주면 팬심 나락 행이다.”
“진형이 말로는 딜러가 호전적인 편이라서 걸어오는 싸움 피하는 편은 아니라니까 참고하고.”
지운이 코치에 취임하고 감독님께 선물 받은 수첩은 벌써 귀퉁이가 헤지고 너덜거렸다. 최근의 e스포츠는 선수들만 잘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여실히 느껴졌다.
“차라리 죽음의 조가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아, 싫어요. 지금은 우리가 압살할 수 있는데 레인보우 시티즈 대신 W게이밍이 온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우, 소름 끼쳐.”
동진의 한탄에 준이 툴툴거렸다. 동진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닌 게 오히려 KJ 스노우 쪽이 우리보다 부담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리 부담이 없었다고는 하나 죽음의 조에서 무패라니 대단하긴 하다.
툴툴거리는 준을 지운이 붙잡고 너는 물에 빠져도 주둥이는 둥둥 뜰 거라며 놀려 댔다. 나와 동진의 낯빛이 흙색인 것과 달리 준은 지운에게 뭐라고 맞받아치며 헤실헤실 웃었다.
서머 결승이 끝나고 내가 붙잡고 기본적인 것부터 1:1로 갈구기를 며칠이었다. 지운이 합류하고부터는 지운이 거의 전담 마크하고 있어서 그런지 그나마 우리 중에서는 준이 지금 상황에 압박을 제일 덜 받고 있었다. 그 덕분에 상태도 제일 좋았다.
해외 경기 경험이 있는 것은 동진과 나인데 준과 제현의 멘탈 상태가 우리보다 더 좋은 것은 아이러니였다.
“점심 먹고 2시에 경기장으로 출발할 거니까 오늘은 다들 일찍 자.”
***
내 방으로 돌아와 곰곰이 내일 전략에 대해 돌이켜보고 있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으나 제현이겠거니 생각해 가만히 있으니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자 예상과는 다른 가슴팍이 있었다.
“뭐야?”
“야, 사람을 보자마자 뭐야가 뭐야.”
비켜서자 자연스럽게 들어와 부스럭거리며 봉지를 들고 미니 냉장고부터 뒤졌다. 생수 몇 개가 전부인 냉장고에 이온 음료와 차 종류를 채워 넣더니 테이블에 한 입 거리 간식을 놓고 빈 봉지를 만족스럽게 접는 진형이었다.
“밥은 좀 먹었어?”
“응.”
“오늘 가 보니까 경기장이 좀 썰렁하더라. 핫팩은 있지?”
“형.”
“알았어, 알았어. 그냥 너 걱정돼서 잠깐 살피러 온 거야. 내일 경기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너 귀찮게 할 생각 없어.”
커다란 손이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겼다.
“나도 그렇게 여유 있는 편도 아니고. 내일 경기 잘해.”
담백한 응원을 하고서 그대로 뒤돌아 나가는 진형을 붙잡았다. 오늘 MVP는 KJ 스노우에게 패배했고 그 여파 때문인지 LOS와는 고전하다가 겨우 이겼다. 그런 경기를 마치고 피곤하고 지쳐 있을 사람이 이렇게까지 챙겨 주는데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마워.”
“응?”
“고맙다고…….”
진형이 사람 좋게 웃으며 나를 부둥켜안았다.
“넌 무슨 우리 사이에 고맙다는 말을 그렇게 쑥스럽게 하냐.”
“…….”
“갈게.”
말로는 간다고 하면서 여전히 나를 안은 채였다. 한 번 힘주어 달랑 들었다가 내려놓고는 씩 웃으며 방문을 나섰다.
진형에 대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의아한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는 거리도 중요하긴 했다.
***
같이 잘 생각으로 옆구리에 베개를 끼고 찬희 방으로 향하던 참이었다. 문이 열리기에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려고 저러나 했더니 나온 것은 진형이었다. 나오다 말고 뒤돌더니 찬희를 품에 안았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진형이 찬희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다가 슬쩍 고개를 돌리더니 나와 눈을 맞추며 웃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저런 게 분명했다.
저 여유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으니 막연한 불안감이 넘쳐났다. 진형이 찬희를 놓아주고 내 쪽으로 걸어오자 문이 스르륵 닫혔다. 나는 그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걸어오는 진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엽네. 베개도 챙겨 오고.”
“어쩌지. 그 쪽한테 귀여움받을 생각은 없는데.”
“그러든가. 찬희랑 같이 잘 거면 창문 좀 닫아 줄래. 답답해서 열어 놓은 모양이라 굳이 닫고 오진 않았는데 밤에 추워할 것 같아.”
내가 아무리 찬희를 보살피는 것에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진형만큼 세심하게 보살필 수는 없었다. 저쪽은 숨 쉬는 것처럼 편안하게 찬희가 아, 하면 어, 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나는 때려 맞추기 급급하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알려 줘서 고마운데 아마 나 때문에 열어 놓은 걸 거야. 내가 더위를 좀 많이 타서.”
이번엔 진형의 미간이 미묘하게 좁혀졌다.
“내 번호 알잖아. 오늘 경기 보니까 연습할 시간도 부족한 것 같던데 그냥 나한테 메시지 보내면 내가 알아서 챙길게.”
“되게 건방진 소리를 다 하네.”
“아, 그렇게 들렸어? 이상하다. 나 지금 되게 공손하게 말한 것 같은데.”
저 족제비 놈의 케어가 찬희에게 잘 먹히지 않았거나 내가 엇비슷하게라도 챙길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대거리를 했을 텐데 아직은 쓸모가 있었다. 진형이 세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짓더니 나를 지나쳐 갔다.
***
간밤에 찬희와 부둥켜안고 푹 잔 것도 좋았고 오늘 아침과 점심 모두 목표량만큼 찬희를 먹이는 것에 성공한 것도 좋았다. 심지어 대기실에서는 내가 먹이지 않아도 찬희가 알아서 주전부리를 까먹고 있었다. 나는 종종 저 작은 입에 뭐가 들어가기만 해도 그냥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사람처럼 행복했는데 오늘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현아, 표정이 왜 그러냐. 어디 안 좋아?”
한 명씩 상태를 살피던 지운이 찬희가 먹는 것을 보며 흐뭇해하다가 나를 보더니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냥 긴장해서 그래요.”
“결승 때도 안 떨었다는 애가? 구라를 칠 거면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해라.”
주머니에서 찬희가 먹던 것과 같은 과자를 한 움큼 꺼내더니 앞에 쌓아 주었다. 멍한 표정의 찬희는 무의식적으로 과자를 까서 입에 넣고 있었다. 동그란 모양의 오트밀 과자였는데 과자도, 단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 앉은 자리에서 열 개가 넘도록 까먹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를 제대로 파악한 것 같으면 새로운 점이 두 개가 나오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맞았다. 찝찝한 얼굴로 제품명이나 외울 따름이었다.
***
- 네, 나이츠 월드 시리즈가 열리고 있는 이곳은 프랑스 파리! 파리에서 인사드립니다! 막 2일 차 막이 올랐는데 오늘 우리나라 선수들 경기가 기다리고 있죠?
- 맞습니다! 어제 KJ 스노우는 유력 우승 후보인 MVP까지 잡아내면서 전승했는데요. 오늘 트릭스게이밍도 멋진 모습을 보여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하하, 팬분들 사이에서는 막말로 꿀조인데 질 수가 없다! 지면 한국행 비행기 탈 생각 하지 마라!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오히려 이게 또 부담으로 다가올 수도 있거든요.
- 부담감을 떨쳐 내고 우리 KKL의 저력을 보여 주어야겠죠! KKL 서머 시즌 우승팀 아니겠습니까!
사운드 체크를 하고 경기 시작 전 대기 중이었다. 옆을 힐끗 보니 찬희가 핫팩을 이리저리 옮겨 쥐고 있었다. 경기장은 살짝 서늘했는데 긴팔 저지를 입고도 조금 추운 모양이었다.
본인 피셜로는 조금 추운 편이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는 하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처지에서는 혹시 감기라도 걸릴까 노심초사였다.
“추워요?”
“어? 아니.”
약간 정신 나간 사람처럼 과자를 씹어 먹던 사람이 경기 준비를 하고 나니 확연하게 차이가 날 정도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국에 돌아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낯선 공간도 많은 사람도 이목을 끄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지만 저럴 때 보면 마치 프로게이머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첫 상대는 레인보우 시티즈인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 굉장히 호전적인 팀입니다! 오는 싸움 안 막고 가는 사람도 잡아다 싸우는 난투에 강한 타입이죠!
- 아니, 북미의 트릭스게이밍 아닌가요?
- 아, 맞습니다하학! 트릭스게이밍도 어지간해서는 싸움을 참는 팀은 아니죠! 무엇보다 한국의 죽창 하면 바로 삼각이 아니겠습니까!
- 한국과 북미! 북미와 한국! 둘 중 최고의 죽창을 가리자!
- 킬이 쏟아지는 화끈한 경기가 기대되는데요. 트릭스게이밍과 레인보우 시티즈의 경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