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84화 (84/100)

84화.

“먼저 말씀하세요.”

“어, 응. 생각해 보니까 내가 너한테 제대로 사과도 못 했더라고. 같이 합 맞추는 동안 많이 미안했다.”

사과를 받을 줄은 몰랐는지 성환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니요. 형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마지막 날 말이 너무 심해서 그거 사과하려고 한 건데…….”

“너도 오죽했으면 그렇게 말했겠어. 사람들 반응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내가 신경도 못 써 줬고.”

“아니, 제가 부족해서 그런 건데 형한테 그렇게 화풀이하면 안 됐어요. 죄송해요.”

성환은 말을 마치고 목이 타는지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마시더니 꽉 차 있던 한잔을 다 비워 냈다. 나도 물컵을 만지작거리다가 몇 모금 마셨다. 어색함을 견딜 바에야 연을 끊던 사람이라 살면서 이렇게 어색한 순간은 처음이었다. 정신이 다 아찔해져 왔다. 제현이 가지 못하게 붙잡고 늘어졌어야 했다. 내가 그렇게 둘만 놔두지 말라고 간절하게 쳐다봤는데도 가 버리다니. 서로 눈도 못 마주치고 눈알을 굴리다가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한국 오면 밥이라도 한 끼 살게.”

“어, 그러면 감사하죠…….”

“그만 일어날까?”

“네, 네.”

성환도 나만큼이나 어색해서 참을 수 없었는지 엉덩이에 용수철이라도 달린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얹힌 것 같은 느낌을 참으며 방으로 돌아오자 제 방처럼 내 침대에서 뭉개고 있는 제현이 보였다.

“얘기 잘했어요?”

“어색했어.”

“그래도 한 번은 해야 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성환이도 별로 나랑 얘기할 생각 없었던 것 같던데.”

“걔 오늘 아침부터 형 방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데 무슨 소리예요.”

거친 한국 프로계에서 험한 꼴 다 당하면서 거추장스럽고 우울한 버퍼랑 합 맞추느라고 고생을 그렇게 했는데도 꾹꾹 참다가 마지막 날에야 터트린 것을 보면 성환이는 거의 보살이었다.

하지만 팀에 합류하자마자 시종일관 투덜거리기 바쁜 준이가 더 파악이 잘되고 손발 맞추기 편했던 것을 생각하면 우린 정말 안 맞았던 것 같다.

“그래도 좀 속이 시원해 보이는데요?”

“응, 알게 모르게 마음에 걸렸었나 봐. 너는…… 힘들면 말해. 성환이처럼 참지 말고.”

“그럼 바로 말할게요. 요즘 형이 너무 부족해요.”

“그 정도는 쉽게 해결해 줄 수 있지.”

제현의 위에 올라타자 바보같이 웃으며 티셔츠 속으로 손이 들어와 허리며 등을 매만졌다. 기분 좋은 쓰다듬을 받는 고양이처럼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가 폈다.

“……점심엔 고기를 좀 먹여야겠어요.”

“…….”

항상 나에게 형은 분위기라는 걸 모르니, 뭐니, 갖은 핀잔을 다 해 놓고 오늘은 제 손으로 분위기를 와장창 깨는 제현이었다.

***

- 네, 안녕하세요! 봉쥬르! 프랑스 파리에서 인사드립니다.

- 이야, 전통적인 역사의 도시,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도시에서 인사드리니 감회가 새롭네요!

- 맞습니다. 실례지만 혹시 지금이 몇 월인지 아시나요?

- 나이츠 월드 시리즈, 통칭 나월의 조별 예선 조 추첨식이 열리는 지금! 당연히 4월 아닙니까!

- 하하하, 맞습니다! 당신의 10월, 4월로 대체되었다!

- 총 12팀이 조별 예선을 치르게 되고 그중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 팀이 2팀이 있습니다.

[한국]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

KJ 스노우

[중국]

HEG (하트 e스포츠 게이밍)

W게이밍

LOS (레전드 오브 스톰)

[미국]

MVP (메가 빅토리 피닉스)

레인보우 시티즈

[유럽]

버닝 비스트

S7

[와일드카드]

그린 e스포츠 (브라질)

사이버 사무라이 (일본)

팀 세인트 (호주)

- 이번 월드 시리즈 어떻게 보시나요?

- 1번 시드 중에 가장 기세가 좋은 건 역시 킹이 이적한 뒤로 3회 연속으로 우승한 MVP라고 봐야겠죠. 그리고 지난 월드 시리즈 우승팀이었던 중국의 W게이밍이 이번에 HEG에게 패배하면서 2번 시드로 왔거든요. 개인적으로 2번 시드 팀 중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팀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와일드카드 팀들도 흥미로운데요. 이번에 일본팀이 저력을 보여 주면서 올라와 한·중·일이 한자리에 모이는 쾌거를 보였죠?

- 하하, 맞습니다. AOS는 장르 특성상 일본에서 비주류 게임인데도 이번 선발전 경기를 보니 사이버 사무라이팀 실력이 상당하더군요.

- 이번 조 추첨식 정말 기대되는데요. 네, 말씀하시는 순간 스피릿 게임즈 CEO 루크 앤더슨이 등장하면서 각국의 1번 시드의 조를 먼저 정하겠습니다.

- 공을 섞으며 신중하게 고릅니다. A조 1번 시드가 개막전을 장식하기 때문에 중요한데요.

[MVP]

- 네, NKL의 3회 연속 우승팀이자 킹 선수가 몸담은 MVP가 이번 나이츠 월드 시리즈의 개막전에 출전합니다!

무관중으로 중계되고 있는 조 추첨식을 우리는 관중석에서 열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제현이 MVP가 1번 시드라서 조별 예선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을 유독 아쉬워했다.

준이는 무교면서 동진을 따라 기도하는 자세를 하고서는 온갖 신을 다 외치고 있었다. 2번 시드 팀 중 가장 강팀이라고 평가받고 있고 지난해 월드 시리즈 우승팀인 중국의 W게이밍만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다.

“누가 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오올, 자신만만~ 내가 이 구역의 체크메이트다 이거죠.”

“그냥 기도 다시 해.”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알라, 천지신명님,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제우스, 헤라, 에라 모르겠다. 아무튼, 신들이시여……! 제발 저희만 잘되게 해 주시고 우리 삼각이들만 어여삐 여겨 주시고…….”

말투는 참 간절한데 내용이 처참하기 그지없는 기도였다.

[조 추첨 결과]

A조

MVP / KJ 스노우 / LOS

B조

HEG / S7 / 팀 세인트

C조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 / 레인보우 시티즈 / 사이버 사무라이

D조

버닝 비스트 / W게이밍 / 그린 e스포츠

- 호오,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 바로 각이 좀 나오는데요? 이야, KJ 스노우 제대로 죽음의 조에 들어갔어요.

- A조 진짜 숨이 턱턱 막힙니다. 반면에 트릭스게이밍은 조금 여유 있는 조에 들어간 것 같은데요.

- 네, 맞습니다. 레인보우 시티즈나 사이버 사무라이나 아직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적은 없는 팀들이다 보니 KJ 스노우 보다는 8강 진출이 수월할 것 같은데요.

- 뽑기 운에 강한 면모를 보이는 트릭스게이밍!

- 하하, 우리 선수들 힘내서 8강뿐 아니라 결승까지 쭉쭉 올라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기는 어떻게 진행되나요?

- 네, 조별 예선에서는 각 조 3팀이 단판으로 2번씩 경기를 진행하고 승점을 계산해 각 조 3위를 제외한 1, 2위는 8강에 진출합니다. 동점이 발생하는 경우 1위, 2위 결정전을 치르고 이 또한 단판으로 결정됩니다.

- 이야, 이번 월드 시리즈 흥미진진하네요! 다음 주 목요일, 아 한국은 금요일이겠네요!

- 네, 금요일에 월드 시리즈 첫 경기인 A조 MVP와 KJ 스노우의 개막전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시청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

조 추첨식 이후 팀 분위기는 한층 더 화기애애해졌다. 누가 봐도 상대적으로 8강 진출이 손쉬운 조일뿐더러 C조라서 일정도 딱 좋았다.

“역시 제 기도가 통한 거라니까요.”

준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제현이 잘했다며 준의 머리를 마구 헤집어 산발을 만들었다.

나는 이번 월드 시리즈부터 라이브로 패치가 적용될 예정이라 이번 패치를 다시 돌아보고 있었다. 지난 패치를 통해 딜탱과 다크힐러가 날개를 단다고 표현할 정도의 버프를 받고 광역 딜러 너프를 해 놓았다. 버퍼는 철저하게 패치에서 제외되었는데 이번 패치의 추진력을 얻기 위해 잠시 쉬어 갔던 모양이었다.

[나이츠 패치 노트]

- 버퍼 업데이트

지난 업데이트에 버퍼 클래스가 제외되어 많은 플레이어분께서 의아해하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지속된 패치로 더 이상 버퍼는 게임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없는 클래스까지는 아니지만, 핵심적인 역할까지는 아직 조금 부족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번 패치를 통해 저희는 버퍼가 게임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습니다. 물론 밥 먹듯이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혁신적인 파워 플레이를 요구합니다. 더불어 전통적인 버퍼 플레이 또한 지켜질 것입니다.

- 신규 아이템 3종 출시

▶ 티아네스의 팔찌

공격력 +20

방어력 +20

재사용 시간 감소 +20%

지속 효과: 본인을 포함한 아군에게 이로운 효과의 버프 스킬 사용 시 해당 아군 이동 속도 100 증가 (지속 시간 10초)

▶ 타락한 월계관

공격력 +80

재사용 시간 감소 +20%

지속 효과: 스킬 사용 시 본인의 체력을 5% 차감하고 피해량 10% 증가 (일정 체력 미만 시 체력 감소 없이 적용)

사용 효과: 2초간 무적상태가 됩니다. (재사용 시간 150초)

▶ 찬란한 독배

마나 +300

마나 재생 +100%

지속 효과: 적군 처치 및 처치 관여 시 각각 1포인트 적립. 포인트 당 공격력 +10 상승 (최대 10포인트 / 사망 시 포인트 50% 차감)

이번 업데이트는 버퍼에게 축제나 다름없었다. 아마 다음 패치에 좀 너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강력한 아이템이 세 개나 새롭게 떨어졌다. 특히나 타락한 월계관은 공격력 +80이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딜러 급의 공격력 수치가 붙어 나와서 그냥 저 80이라는 숫자만 보고 있어도 배가 불렀다.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업데이트를 자주 보실까.”

“딜러는 또 간접 너프네. 제현아 살 만하냐?”

“뭐, 워낙 딜러 게임이었으니까 이제 좀 밸런스가 맞는 거 같은데요.”

“동형, 쟤나 영화는 버퍼 출신이라 말 안 통해요. 진짜 딜러 출신 진형이 형이나 웅이 형한테 물어보면 반응 다를걸요?”

“그건 그래. 제현이야 지원하는 것도 좋아하니까.”

내 기분이 좋으니 제현도 덩달아 기분이 좋은지 내 목덜미에 머리를 얹으며 낮게 웃었다.

“밥 먹기 전에 산책하러 안 갈래요?”

“별론데.”

“진짜 바로 나가자마자 강가인데 걷기 좋아요.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사람도 그렇게 많지도 않고.”

“하, 알았어.”

도착한 지도 며칠이 지났는데 조 추첨식 때 경기장에 간 것을 제외하면 호텔에서 나간 적이 없었던 데다가 제현이랑 느긋하게 이야기할 시간도 없었다. 마지못해 수락하고 나서자 제현이 알아서 겉옷을 챙겨서 걸쳐 주었다.

서울과는 확연하게 다른 파리의 풍경은 수많은 관광객을 부르는 곳이었지만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제현의 곁에 딱 붙어서 핸드폰으로 스도쿠나 켰다. 동진이라면 걸어 다니면서 핸드폰 보지 말라고 잔소리했겠지만 만약에 내가 자빠지더라도 잡아 줄 제현이 있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스도쿠에 집중했다. 걷다가 날 중간에 세워 두고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다시 걷고 반복했다.

“너 답답하지.”

“아뇨?”

“나 신경 쓰지 말고 너는 너대로 다녀도 돼. 일일이 내 상태 신경 쓰다간 네가 먼저 미쳐 버릴 거야.”

오죽하면 지운이 제현을 잡아 놓고 조언하며 내 방에서 쫓아낸 게 여러 차례였다. 지금의 나는 곰팡이가 슬어 버린 귤과 같았다. 혼자 곪아 터지면 상관이 없는데 멀쩡한 귤이 옆에 붙어 있으면 그 멀쩡한 귤도 상하게 하는 못난 귤.

“저는 형이 그렇게 매사에 죄인처럼 구는 거 싫어요.”

내 성격이 이런 걸 네가 싫다고 해도 어쩌겠니. 속으로 한탄하는데 제현이 내 팔을 끌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