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나이츠 월드 시리즈 공식 지정 숙소라서 일부 객실을 제외하고는 나이츠 월드 시리즈 참가자들을 위해 비어 있다고 했다. 선수들의 숙소는 연습실 용으로 큰 사이즈의 객실이 하나, 코치진과 스태프 회의용 객실이 하나 있었고 다른 층에 개인 객실이 각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오, 이번 월드 시리즈 대우 대박이네.”
지운이 찬희 방에 들어서자 이리저리 둘러보며 연신 감탄했다. 1인실이라지만 그렇게 좁지만도 않아서 뉴욕 때보다 시설이 훨씬 좋다고 난리였다. 차멀미로 반쯤 수면 상태인 찬희를 침대에 눕혀 놓는 동안 지운은 캐리어를 한쪽에 두고 커튼을 쳐 창문을 가렸다.
“찬희 형, 뭘 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놔둬. 어차피 먹어도 토할 텐데 그냥 한숨 푹 재우고 일어나면 묽은 수프 같은 거 구해서 먹이면 돼.”
“미안…….”
본인이 원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고 제일 고생하고 있는 장본인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한다는 말이 사과라니 너무 안쓰러웠다.
“다른 거 걱정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기왕이면 한국이나 중국에서 열리면 좋았을 텐데 프랑스는 너무 멀었다. 그래도 미국보다는 나은가.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에 문을 열자 지금 가장 보기 싫은 사람의 뺀질뺀질한 얼굴이 보였다.
“홍제현.”
“황제현입니다만.”
저 족제비 같은 놈은 분명 제대로 알면서도 일부러 저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찬희 상태도 좀 볼 겸 줄 것도 있고.”
어깨로 날 밀치고 들어와 잠든 찬희의 이마를 한 번 쓸었다.
“열은 아직 안 나고…… 기내에서도 아무것도 안 먹었지?”
“당신 없어도 알아서 챙깁니다.”
“그거 저번에 찬희가 여보 당신이라 그래서 좀 트라우마인데 그렇게 안 부르면 안 돼?”
씹……. 속으로 욕을 삼켰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더니 가져온 가방에서 주섬주섬 물건들을 꺼냈다. 지운이 진형을 아니꼬운 눈으로 보다가 꺼내는 물건들을 보더니 다가가 옆에 앉았다.
“아, 이거 나도 깜빡한 건데.”
“응, 기본적인 두통약 같은 건 있을 것 같아서 없을 거 같은 거 위주로 챙겨 왔어. 위경련 오기 전에 챙겨 먹이고, 이건 약한 수면 유도제인데 한 번도 안 먹여 본 거라 경기 때는 먹이지 마. 차라리 안 잔 상태로 경기 뛰는 게 나을 거야.”
“엉, 우리 팀 닥터한테 물어보고 먹일게. 먹는 약이 한두 개여야 말이지.”
자기들끼리 옛날 생각난다며 키득거렸다. 근처에 쪼그려 앉아서 늘어놓는 물건들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제현아, 너도 피곤할 텐데 네 방에 짐 대강 풀고 자. 배고프면 뭐 좀 사다 줄게.”
“별로 안 피곤하고, 배도 안 고파요. 저 인간 보내고 저도 나갈게요.”
“하긴 나라도 쟤만 두고는 못 가지…….”
진형이 오묘한 눈으로 나와 지운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형도 쟤랑 찬희 사이 아나 보네?”
“그럼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를까 봐? 나는 찬희가 이만할 때부터 가디언 에인절이었는데도?”
“아니, 잘도 허락했다 싶어서.”
“누구 씨랑은 다르게 사람이 건실한 것 같더라고.”
진형은 지운의 말이 탐탁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토를 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무튼, 동형이 듬직하긴 해도 세심하진 못해서 걱정했는데 형이 있으니 마음이 좀 놓이네.”
“글쎄, 나보다 더 극성인 보호자가 저기 계시잖아.”
진형이 슬쩍 나를 보다가 픽 웃었다.
“어린 애가 뭘 알아.”
이 나이에 고혈압을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 자식은 게임보다 사람 속 긁는 데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았다. 애써 화를 억누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예, 많이 알려 주세요. 제대로 배워야죠. 앞으로 제가 다 챙겨야 하는데.”
“야, 존댓말 하지 마. 난 네가 그냥 버릇없이 반말 찍찍 갈기는 게 더 편해.”
“예, 예. 그러시겠죠.”
“못 보는 사이 여유로워진 건 보기 좋네.”
칭찬인지 욕인지 쉽게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더니 미련 없이 방을 나갈 채비를 했다. 나는 찬희와 같이 살면서도 떨어지려면 몇 번을 맴돌아야 하기에 도대체 저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 건지 신기해서 쳐다보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개인실도 연습실도 우리 팀이랑 같은 층이라 자주 마주칠 것 같은데 너무 으르렁거리지 말자고.”
“허.”
지운도 내 어깨를 두드려 주고 진형을 따라나섰다. 텅 빈 방 안에 찬희의 숨소리만 들렸다.
낭만의 도시 프랑스에서 보낼 시간은 앞으로 한 달. 그 한 달이 아무래도 녹록지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쉽게 가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다. 원래 인생이라는 게 쉽기만 하면 재미가 없다. 어려움이나 족제비를 닮은 걸림돌도 좀 있어 줘야 재밌다. 정말 간소하게 꾸린 찬희의 캐리어를 대강 정리하며 머릿속으로 내일 일정을 정리했다.
***
며칠간은 나도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아 아침 운동을 빼먹었다. 오늘은 몸이 찌뿌둥해 일어나자마자 운동복을 챙겨 입었다. 호텔 바로 옆이 센 강이라 강을 따라 달리고 오니 그렇게 개운할 수 없었다. 간단하게 씻고 찬희 방으로 향했는데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문 앞에서 서성이는 뒷모습이 익숙했다.
“나성환?”
“어, 제현아.”
“뭐야, 중국 팀들도 다 왔어?”
“응.”
머쓱한 얼굴로 눈썹을 긁적였다. 성환이 뭔가 뻘쭘할 때 하는 습관이었다.
“찬희 형 아직 잘 텐데. 뭐 볼일 있어?”
“어, 아니. 인사라도 드릴까 했지.”
“찬희 형이랑 더는 게임 못 하겠다고 하루가 멀다고 징징거리던 네가?”
“야……!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아, 됐어.”
빠르게 주절거리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 성환이 낯설었다.
“너 찬희 형한테 뭐 잘못했냐?”
출국 전에 성환의 이야기를 꺼내자 보인 찬희의 반응도 워낙 이상해서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었다. 둘이 대판 싸우기라도 했나. 적어도 깔끔하게 마무리 짓진 않았던 것 같았다. 찝찝한데…….
“어, 좀…… 생각해 보니까 찬희 형 막 잠에서 깼을 땐 기분 안 좋은데 괜히 얼굴 비추면 안 될 것 같다. 식당에서 보자.”
뭐라 붙잡을 새도 없이 엘리베이터 쪽으로 도망쳐 버렸다. 잠에서 깬 찬희가 기분이 안 좋다고? 365일 저혈압이라 몸 상태는 별로일 수 있으나 잠에 취한 찬희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고 관자놀이를 긁었다.
한참 서성거리다가 자연스럽게 찬희 방 예비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파리에 도착하고 부쩍 잠이 많아진 찬희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며칠 사이 얼마나 살이 빠진 건지 볼이 핼쑥해졌다. 내가 저 살 좀 붙이려고 한국에서 얼마나 노력했는데 해외 출장 한 번에 도로 아미타불이었다. 그래도 어제는 고기도 좀 먹었고 1인분에 근접하게 먹었다는 점이 위안이었다.
한참 이리저리 구경하는데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거슬렸는지 깜빡거리다 눈을 떴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어쩜 저렇게 눈이 맑을 수 있을까. 새삼스럽게 놀라며 침대 옆에 무릎 꿇고 앉아 머리를 기대자 찬희가 꾸물꾸물 다가와 이마를 맞부딪혔다. 맞닿은 이마가 서늘한 게 어제 잠깐 올랐던 열은 잘 내려간 것 같고 기분도 훨씬 좋아 보였다.
“오늘은 좀 기분이 어떠세요?”
“응…….”
“몸 상태는?”
“응…….”
뭘 물어도 응응거리며 아무렇게나 대답하는 이 시간이 너무 좋았다. 오늘 아침만큼은 제대로 챙겨 먹일 생각이었다. 가만히 앉아서 하는 게임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게임도 체력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기초 체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찬희는 게임을 좀 시키면 컨디션이 오르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었다. 지운의 말로는 열이 38도 40도인데도 게임만 시키면 그렇게 똑 부러지게 오더를 해 댔다고 했다. 이쯤 되면 찬희에게 게임이란 단순히 게임이 아니라 마약이 아닌가 싶었다.
“저희 오늘 저녁에 조 추첨 하는 날인데.”
“아, 맞다.”
내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저혈압이라도 왔는지 그대로 다시 넘어갔다.
“뭐가 그렇게 급해요.”
“아니, 지운이 형, 아니, 코치님이랑 어제 얘기한다는 게 그냥 자 버렸어.”
“얘기 나눌 상태도 아니셨으면서.”
“그건 그래.”
또 사람 속도 모르고 슬쩍 웃었다. 순두부같이 하얗고 말랑한 볼을 가볍게 물었다가 놔주었다.
식사는 아침은 호텔 조식이었고 점심과 저녁은 팀 단위로 도시락이 객실로 제공되었다. 오늘 아침은 찬희에게 샐러드 조금이랑 수프와 빵, 과일을 죄다 먹일 각오를 다지며 식당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어, 안녕…….”
“…….”
식당에서 보자더니 기다렸는지 입구에서부터 성환과 마주쳤다. 둘이 인사를 나누는데 세상에 이렇게 어색한 인사는 처음이었다. 내 숨이 턱턱 막혀 뭐라도 화제를 올려야겠다는 사명감까지 들 정도였다.
“안 그래도 성환이가 아까 형한테 인사하려고 왔다가 주무셔서 그냥 돌아갔거든요.”
“아, 그랬어? 깨우지…….”
“아니에요…….”
“…….”
미치겠네. 이 인간들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재능도 의지도 없어 보였다. 양쪽을 번갈아 가면서 보는데 고개도 각각 왼쪽, 오른쪽으로 반대편을 보고 있었다.
“둘이 그렇게 심하게 싸웠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또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식당에 찬희를 앉혀 두고 성환이를 끌고 접시를 얹어 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나 답답해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도대체 찬희 형이랑 무슨 일이 있는 건지 딱 말해.”
“아, 아니. 별일은 아닌, 아니 별일인가.”
“나 속 터져 죽을 것 같아. 찬희 형은 형대로 무슨 죄인처럼 굴고, 너는 무슨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어쩔 줄을 모르고.”
“야, 똥 마려운 강아지라니.”
“싸기 직전의 강아지.”
성환이 자기 이마를 강하게 몇 번 내려치더니 빵을 수북하게 접시에 담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팀 나오면서 찬희 형한테 말을 좀 심하게 했어. 한국에서 하도 욕받이 무녀로 욕먹다 보니까 거의 화풀이나 다름없었고, 지금 생각하면 미안해서…….”
듣다 보니 괜히 괘씸해 빵 하나를 손에 쥐고 성환의 입에 쑤셔 넣었다.
“어쨌든 둘이 풀어야 한단 소리 같은데 나는 밥만 먹고 빠져줄 테니까 둘이 얘기해. 황금 같은 시간 빼 주는 거니까 너 나한테 빚진 거다.”
성환이 빵을 우물거리며 하여간 계산적이라며 투덜거렸다. 식사하는 동안은 매우 조용했고 접시에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우물거리는 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찬희는 아무래도 성환이 신경 쓰이는지 샐러드도 수프도 목표량의 반절도 못 먹고 애꿎은 빵만 잘게 쪼개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서 샌드위치를 두 개째 먹고 있는 성환이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맛있냐? 그게 넘어가냐? 넘어가?
“그만 먹어.”
“에?”
“나는 일어나 볼 테니까 아무래도 둘이 아직 마무리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제대로 대화로 마무리 지어.”
어색한지 구명보트라도 보듯 나를 간절하게 보는 찬희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고 드러난 목덜미를 한 번 쓰다듬다가 겨우 일어났다.
도청 장치 사고 싶으면 안 되는 거겠지. 찬희의 하루, 1분 1초,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다는 음습한 범죄의 유혹에 또 빠졌지만 참아 냈다.
***
한입 가득 욱여넣은 샌드위치를 한참을 씹던 성환이 겨우 샌드위치를 넘기고 눈알을 굴렸다.
“형…….”
“그…….”
동시에 말이 나와 둘 다 황급히 겨우 연 입을 다시 다물었다. 성환이 머리를 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