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적이라면 진형이겠거니 싶었다. 이번 NKL 결승전은 나도 챙겨 봤는데 확실히 한국에 있을 때보다 폼이 올라서 내가 알던 진형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간이 잡히는 팀 보이스를 볼 때 본인이 주도적으로 오더를 내리는 것 같았다.
진형의 영입 전 MVP는 개개인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령탑의 부재로 운영이 부족하다는 평이 많았다. 진형의 합류 이후에 초반에는 삐끗삐끗하는 모습도 보였는데 점점 견고한 팀으로 성장했다. 요즘 들어서는 NKL을 MVP가 씹어 먹고 있다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닐 정도로 원사이드한 경기가 많았다. 이번 결승전도 3:0으로 빠르게 끝난 것을 보면 더욱 그랬다.
“그래도 피지컬은 제현이가 조금 더 낫지…….”
“무슨 소리예요. 모든 면에서 제가 더 나은데.”
“판단이라든가 노련함은 단기간에 오르는 게 아니니까…….”
제현의 표정이 살벌해져 진형이 조금 더 낫다는 소리는 속으로 삼켰다.
“뭐…… 결국 나이츠는 팀 게임이니까 역시 우리가 우위가 아닐까.”
“저 지금 랭킹전 2위거든요. 형이랑 명성 포인트 차이도 그리 많이 안 나요. 자꾸 그러면 형이 그렇게 좋아하는 1위 자리 제가 가져갑니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든가.”
픽 코웃음을 치자 제현이 내 볼을 꾹꾹 눌러 댔다.
***
프랑스 파리,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에서 개최되는 나이츠 월드 시리즈를 위해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월드 시리즈 기간에만 서브 코치로 취임하게 된 지운을 포함해 서브 선수로 트라이앵글에 합류한 영화도 포함됐다. 다들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도 처음 가 본다며 대회가 아니라 놀러 가는 사람들처럼 신이 나 있었다. 인천 국제 공항에서 파리 샤를 드골 공항까지는 12시간가량 걸렸다. 긴 비행시간, 낯선 환경, 많은 사람…… 나에게는 그저 최악의 조건들만 수두룩했다.
“우욱…….”
“찬희야, 괜찮겠어? 너 전에 뉴욕 갔을 땐 그래도 잘 버티지 않았나?”
속이 울렁거려 여러 차례 게워 냈는데도 헛구역질을 계속하는 내 등을 두드리며 동진이 식은땀을 다 흘렸다.
몇 년 전 뉴욕에서 열렸던 월드 시리즈 때의 기억은 정말 흐릿했다. 첫 해외 경험이라 비행기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말 그대로 영혼이 출타한 상태였다. 뉴욕에 있는 내내 진형과 지운이 거의 아바타 조종하듯이 나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자연스럽게 실력도 컨디션과 함께 수직으로 하강해 4강 진출에 실패했던 원인으로 제일 먼저 내가 꼽히기도 했는데 동진이 무던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의외였다.
“야, 무슨 소리야. 찬희 그때 진짜 까딱 잘못하면 타국에서 송장 치르겠구나 하고 나랑 진형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아, 진짜요?”
“거,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거 건방진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좀 살 만한가 본데.”
“우웁…….”
“아니었네.”
동진의 등 두들기는 손길이 거칠어 얻어터지는 사람처럼 사정없이 흔들리며 헛구역질하고 있으니 제현이 손사래를 치며 막고 나서 천천히 쓸어 주자 조금 진정되었다.
이럴 땐 주변 환경에 신경 쓰면 안 됐다. 억지로라도 딴생각해야지 그나마 버틸 만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도착하고 1주일 후부터 시작되는 조별 예선에는 지난 월드 시리즈 우승국인 중국이 3팀, 차례로 한국과 미국, 유럽이 각 2팀, 와일드카드라고 해서 일본, 남미, 동남아, 호주 등의 나라들이 월드 시리즈 진출권을 놓고 예선을 치러서 3팀, 총 12팀이 참가하게 된다.
A~D조로 3팀씩 나뉘는데 각 조에 1 시드 팀이 들어가게 된다. 한국은 우리 팀 트릭스게이밍 트라이앵글, 북미는 진형이 있는 메가 빅토리 피닉스 MVP, 중국은 지난 월드 시리즈 우승팀인 하트 e스포츠 게이밍 HEG, 유럽은 버닝 비스트가 1 시드를 받았다. 각 조 추첨은 개막식 전날 이루어졌다. 핸드폰으로 진출 팀들을 둘러보고 있으니 제현이 말을 붙였다.
“이번 월드 시리즈에 형이랑 합 맞춘 딜러들 다 모이는 거 알아요?”
“어…….”
심지어 셋 다 각국의 서머 시즌 우승팀이라 1번 시드를 받은 것도 놀라웠다. 아무리 빨리 만나도 8강에서나 마주칠 예정이었다. 아무래도 서로의 스타일을 겪어 본 적 있으니 반응을 예측 당하기 쉬워서 다른 팀들보다 운영이 까다로웠다. 진형이든 성환이든 안 만나는 게 제일 베스트였다.
“성환이가 형 잘 지내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어, 어…….”
“반응이 왜 그래요?”
“아냐, 내가 성환이한테 미안한 게 많아서 그래.”
진형을 보내고 처음 맞는 윈터 시즌은 너무 힘겨워서 성환과 맞춰 가려고 노력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 내기 바빠서 새로 온 성환에게 배려해 주지는 못할망정 사사건건 예민하고 날카롭게 대했으니 걔도 맘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었다.
“걔는 자기가 자기 무덤 팠을 뿐인데요. 트라이앵글이랑 성향 안 맞을 거라고 제가 분명히 말렸어요. 그런데도 억지로 가 놓고 우승도 못 시키고 한 시즌 만에 도망친 놈한테 형이 왜 미안해해요?”
“넌 친구한테 왜 그렇게 차갑게 굴어. 잘 지낸대?”
“네, 아마 형이랑 합 맞춘 딜러 중에 연봉만큼은 걔가 제일 높지 않을까…….”
중국 리그는 연봉이나 상여금이 급이 다르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말끝을 흐리는 제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월드 시리즈 끝나고 나면 네가 제일 높을 거야. 내가 장담할게.”
“저 우승시켜 주신다는 거죠?”
“응. 이번엔 내가 너 제일 높은 곳에 보내 줄게.”
똥폼을 잡으며 말을 했지만 대체로 축 늘어져서 제현에게 매달려 이동했고 심지어 출국 기사 사진도 당장 요단강 건너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병자처럼 찍혔다.
몸이 너무 긴장해 물 한 모금도 넘기지 않고 12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억겁의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을 때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프랑스는 한국과 공기 자체가 달라 패닉에 빠져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만 스무 번도 넘게 중얼거렸다.
‘Welcome Trix Gaming Triangle’
미리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트릭스게이밍 쪽 사람이 들고 있는 웰컴 보드가 보였다. 그 옆에 한글로 ‘어서 와, 서찬희’라고 써진 웰컴 보드를 보고 내 눈이 정확하게 보고 있는 건가 의심이 들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보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찬희!”
“쟤는 NKL 3회 연속 우승하더니 진짜 시간 남아도나 보다.”
지운의 한숨 섞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진형이 코트를 휘날리며 달려와 웰컴 보드를 던지고 나를 안아 들고 빙빙 돌았다.
“파리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도 나름대로 빨리 입국한 건데, 형네는 얼마나 일찍 온 거야?”
“우리야 뭐…… 내가 좀 빨리 가자고 조르기도 했어.”
오랜만에 본 진형은 지난번에 한국에서 본 것보다 얼굴이 더 반질반질해져 있었다. 머리를 좀 기른 탓인지 내가 알던 진형이 아닌 것 같았다.
“뭐야, 달랑 반소매에 저지만 입고 왔어? 여기 한국보다 추워.”
“겉옷 더 있어. 꺼내기 귀찮아서 안 입은 거야.”
서울과 기온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는데 제현이 팀 패딩까지 챙긴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막느라 고생이었다. 타이밍 맞춰 제현이 자기 저지를 가방에서 꺼내 내 위로 덮었다.
“내려놓지?”
“야, 오랜만이다. 홍제현?”
“황제현인데. 그런 기억력으로 한국대는 어떻게 들어간 거야? 학교에 잔디밭이라도 깔았어?”
“아, 미안. 나 중요하지 않은 건 잘 기억 못 해서.”
또, 또 이런다. 진형의 볼을 가볍게 치자 나를 내려 주었다.
“어, 진형아. 마중하러 온다고 듣기는 했다.”
“감독님! 아, 이제 제 친정 식구 다 모였네. 역시 친정 식구들 사이에 있으니까 한결 편안한데요.”
“하하, MVP 팀 사람들이 들으면 속상할 소리 하네. 잘 지냈지?”
“감독님 보고 싶은 거만 빼면 잘 지냈죠. 같은 호텔에서 지내는 걸로 아는데 차에 제가 끼어들 자리도 좀 있으려나요? 택시 잡기 어려워서요.”
“야, 그래도 한 식구였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감독님의 통쾌한 답변에 제현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다가가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려는데 캐리어에 걸터앉은 채로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비행기 멀미?”
진형이 다가와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
“아니네. 그냥 지쳤구나? 일단 한숨 자야겠다.”
흐릿한 시야에 꽉 차는 진형의 눈웃음이 낯익었다. 보통 마음에 드는 여자한테 은근하게 뿌리지 않았나? 그리고 내 손에 향수병을 쥐여 주었다.
“이번에는 깨 먹지 마.”
“나 향수 안 쓰는 거 알면서 이걸 또 선물해?”
“응. 더 쓸데없는 환영 선물을 줄까 생각하기도 했지. 아무리 그래도 꽃다발은 좀 오버하는 거 같아서 안 사 왔어.”
“그건 잘했네. 앞으로도 오버하지 말고 살아.”
“대신 풍선 같은 거라도 좀 사 올 걸 그랬나 봐. 환영하는 느낌이 영 안 사네.”
진형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
“제현아, 표정 좀 풀자. 너무 살벌하다. 몇 명 없긴 해도 기자들 있는 거 기억해라.”
지운이 다가와 어깨를 주물렀다. 캐리어에 앉아 진형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상태가 한결 좋아진 찬희를 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었다. 도대체 고작 몇 년이라는 세월이 저 둘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권진형한테 무슨 매력이 있어요?”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왜, 불안하냐?”
“네.”
0.1초 만에 대답하자 지운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와, 그 얼굴을 하고도 불안할 수 있구나? 하긴 진형이가 작정하면 다른 레벨의 여우기는 해.”
“지금 위로해 주러 오신 거예요? 놀리러 오신 거예요?”
지운이 내 등을 툭툭 치며 킬킬 웃었다.
“둘 다?”
“진짜 도움이 안 되시네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야, 나는 찬희가 너한테 응석 부리는 거 보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궁금하더라. 어떻게 했냐?”
“영업 비밀인데요.”
“치사하네. 근데 너 찬희랑 어디 온 거 처음이지? 고생길 열린 것을 축하한다.”
“왜요?”
“앞으로 컨디션 계속 들쭉날쭉할 거고, 너무 신경 써 주면 신경 써 주는 대로 자기가 팀에 피해 준다고 생각해서 무리할 거고, 갈수록 말수는 적어지는데 때려 맞추기가 여간 까다로워야지. 무엇보다 일정 다 끝나고도 귀국 날까지 호텔에서 나오지 않으니까 같이 관광이나 그런 거 다니는 건 꿈도 못 꾸고.”
지운이 시어머니처럼 줄줄 읊는 내용을 머릿속에 착착 정리했다. 그러니까 서울 버전 찬희에서 조금 더 업그레이드된 심화 버전의 찬희라는 소리였다.
“그 정도야 뭐…….”
“너 진짜 괜찮냐?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너는 방 안에 가둬 두면 3일 안에 미칠 상인데…….”
“혼자 가둬 두면 3일까지도 안 걸리죠.”
지운에게 대충 대답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형과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꼴이 더는 견딜 수 없으니 캐리어째로 들고서 도망가든가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