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일할 때도 게임하고, 쉴 때도 게임을 하면 저는 도대체 언제 형을 독점해요.”
“음, 월드 시리즈 끝나고?”
“아직 8월 말인데 11월이라…….”
확실히 스프링과 서머 사이의 텀은 무척 짧았고 부상 재활까지 겸하느라 쉴 수도 없었다. 며칠 후면 9월이니 월드 시리즈 개막식까지는 앞으로 한 달. 프런트에서 알려 준 바로는 내일 아침부터 광고와 인터뷰 촬영이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이번 월드 시리즈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니 내 적응을 위해 1~2주 일찍 출국할 테고 그 말인즉 한국에서의 준비는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일단 무작정 뱉어 놓고 일정과 생각을 착착 정리했다. 테트리스 블록처럼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니 역시 월드 시리즈가 끝나기 전까지는 마음 놓고 쉴 날이 오늘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동진은 여자친구와 데이트하러 갔고 준이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내일 새벽에 돌아온다고 들었다. 나는 항상 비시즌에도 숙소와 연습실을 오가며 살아서 별생각이 없었지만 아마 제현도 어딘가 가고 싶지 않았을까. 어쩐지 제현이 입술을 삐죽거릴 만도 했다.
“대신 월드 시리즈 우승하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소원이요?”
실망으로 가득 차 있던 제현의 눈에 반짝 빛이 돌았다.
“어떤 거든 다? 뭐든지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말끝을 흐리는 내 대답에 눈썹을 꿈틀했다. 안 그래도 미안하던 차에 월드 시리즈 우승이라는 만만찮은 조건까지 달아 놓고 두루뭉술한 약속을 하기에는 양심이 너무 아팠다.
“뭐, 뭐든, 예…… 들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저랑 약속하신 겁니다.”
제현이 팔짱을 풀더니 마음에 드는 사냥감을 고른 포식자처럼 유유히 기지개를 켜고 다시 나를 안아 들었다. 이제는 내려 달라는 말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제현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나 지금 코알라가 된 것 같아.”
“아기 코알라 씨, 탑승감은 좀 만족스러우십니까?”
“네, 만족스럽…… 아기는 무슨.”
“영화한테는 맨날 아기 햄스터니 뭐니 하면서 왜 본인은 아기 코알라를 거부해요?”
“영화는 귀엽잖아.”
제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제가 더 귀여운데요.”
“그래, 그래. 너 잘났고 귀엽다.”
제현의 질투 버튼은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눌렸다.
“어.”
“뭐야, 찬희를 왜 그렇게 들고 다녀? 또 어디 다쳤어?”
코알라 상태로 있는데 데이트를 마치고 돌아와 연습실로 들어선 동진과 딱 마주쳤다. 순발력이 없어서 좀비처럼 ‘어, 어……’ 거리고 있으니 제현이 재빠르게 웃으며 내 바지를 걷어 올렸다.
“이거 봐요. 어제 술 먹고 해 먹으셨어요.”
넘어져서 살짝 까지고 멍이 들었을 뿐 상처가 크지 않은데 커다란 밴드가 붙어 있으니 동진이 입을 쩍 벌리고 상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니, 발목 분질러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쳐? 너 진짜 몸을 그렇게 함부로 써먹어서 늙어서 몸이 남아나겠냐?”
“잔소리꾼…….”
“서찬희, 짬 좀 차더니 형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지? 저걸 그냥…… 바스러질까 봐 준이처럼 쥐어박을 수도 없고. 어휴, 제현아. 쟤 다 나을 때까지 땅에 발 못 딛게 들고 다녀라.”
“그건 좀…….”
“오늘 그러긴 했는데, 내일은 외부 일정이라서요.”
동진이 콧방귀를 팽 뀌면서 내 무릎을 찰싹 때렸다.
“아……!”
“어디 한번 쪽팔려 봐야 아, 몸을 좀 소중히 여겨야겠다고 하지.”
동진이 호탕하게 웃으며 우리를 지나쳐 갔다. 제현이 올라간 바지를 내려 주며 흐뭇한 웃음을 짓는데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오만 사람들에게 안겨 다니는 것은 발목에 깁스하고 다닐 때로 족했다. 심지어 경기 중계에도 업혀서 나가서 약골 이미지가 얼마나 강화되었는데 각종 촬영에도 안겨 다니라니 끔찍했다.
“너 내일 진짜 들고 다닐 건 아니지?”
“아, 제가 동진이 형한테는 좀 약한 거 아시잖아요. 어쩔 수 없죠.”
이를 악물자 이가 갈리는 소리가 빠드득 울렸다.
“어차피 제가 안 들면 동형이 들 텐데 제가 안는 편이 낫지 않아요?”
제현의 기분이 더없이 좋아진 것은 희소식이었지만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졌다.
***
서머 시즌부터 KKL의 스폰서인 삼현 제과의 대표 아이스크림 삼색바의 광고 촬영이 있었다. 우리 팀 애칭이 삼각이라 같은 ‘삼’자 돌림인 것이 높은 분의 마음에 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왜 우승하고서도 3이랑은 헤어질 수 없는 걸까?”
“아무래도 팀명을 바꾸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지 않을까요?”
아침에는 스튜디오 실내 촬영이라 수월했는데 오후부터는 야외 촬영이라 후덥지근한 날씨에 다들 더위 먹은 개들처럼 헥헥거리며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있었다.
아침부터 나를 정말 땅에 발을 디딜 새도 없이 안고 다녔던 터라 지칠 만도 한데 더운 것을 빼고는 괜찮아 보이는 제현이었다. 제현의 체력은 비글, 그것도 산에 풀어놓고 키워야 하는 비글 급인 것 같았다.
“형은 이거하고 다른 거 개인 촬영 가시죠? 강남?”
“응, 너는 삼현에서 단독 광고 하나 더 있다고 했던 거 같은데.”
“네, 신제품인데 이름이 황제빵이래요.”
“아, 어울린다.”
어렸을 때 별명이 황제반점에 요즘에는 황제 조커라고 추앙받고 있는데 광고 찍는 빵 이름도 황제빵이라니 조금 웃겼다.
“놀리지 마세요. 저번에 먹어 봤는데 짠 빵 종류고 꽤 매콤하더라고요. 형이 좋아하실 것 같아요. 나이츠 캐릭터 스티커도 들어 있대요.”
“네 스티커는 안 나와?”
“절 얼마나 좋아하시는 거예요. 하나 만들어 드려요?”
“참나.”
날 뭐로 보는 건지. 겨우 하나로 만족할 줄 아나. 포●몬 빵도 스티커 종류가 100종이 넘어가는데. 속으로 실컷 꿍얼거렸다.
덥다고 아이스크림을 너무 먹었다가는 배탈로 고생할 게 뻔해 몇 입 먹다가 가만히 들고 있었다. 제 것은 이미 다 먹은 제현이 고개를 기울여 녹아서 뚝뚝 떨어지고 있는 내 아이스크림을 핥기 시작했다. 별거 아닌 행동인데도 쓸데없이 선정적이었다.
얘가 지금 노리고 이러나 싶어 빤히 보자 천진하게 웃었다. 아니, 그냥 타고난 건가? 아이스크림을 아예 입에 물려 주고 녹은 아이스크림이 묻어 끈적한 손가락을 핥았다. 아무래도 화장실에 들러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만들어 줘. 황제현 스티커.”
일어나며 나사라도 빠진 얼굴로 날 보고 있는 제현에게 못 박아 두었다.
“하하…… 아니, 농담으로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라고요?”
“응, 만들어 준다며.”
제현이 내가 정말 만들어 달라고 할지는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내가 회사 사장이라면 꼭 만들어 넣었을 텐데 장사할 줄 잘 모르시나.
늦여름의 햇빛이 제현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머리나 화장을 공들여 받아놓으니 영락없는 아이돌이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생겼냐.”
“보통 사람이 들으면 못생겼다고 하는 줄 알 것 같은데요.”
“너는 보통 사람이랑 다르다 이거지.”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제 얼굴 하나만큼은 형 취향 스트라이크존이라고 자신하거든요.”
“얼굴만은 아니야.”
제현이 별안간 가슴을 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너무 쉽게 저를 공략해 버리는 거 아닌가요? 역시 미연시 마스터…….”
“메가데레 형은 공략이 쉬워. 내가 아무리 쓰레기여도 날 좋아해 주니까 무슨 선택지를 골라도 호감도가 쑥쑥 오르거든.”
“절 쉬운 남자로 보는 사람도 형이 처음이에요.”
“첫사랑 타이틀 땄으면 더 쉽지.”
“하, 어쩔 수 없네. 책임지고 결혼해 주세요.”
대화 주제가 산으로 간다 싶었는데 아주 프러포즈까지 가 버리는 제현이었다.
“딜러랑 버퍼면 결혼도 이미 한 거지 뭐. 그런데 나는 재혼만 두 번째고 너는 배우자가 아픈 사이에 잠깐 두 집 살림하긴 했지만.”
“와,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천하제일 쓰레기 같아요.”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제현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제현을 만나고 웃음이 너무 헤퍼져서 큰일이었다.
“내 세 번째 결혼은 괜찮고?”
“저희 3이랑 인연이 깊잖아요. 세 번째면 봐줘야지 어떡해요.”
그만 노닥거리고 촬영 들어가자는 소리에 제현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크게 대답하더니 내 팔을 끌어 일으켜 세웠다.
***
광고 촬영이며 프로그램 촬영, 각종 인터뷰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정이 꽉꽉 들어차 어지간한 연예인들보다 바쁜 며칠을 보냈다.
우승을 한 것은 좋았지만 4연속 우승했던 KJ 스노우를 꺾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니 뭐니 하며 주목도도 높아서 곳곳에 다 불려 다녔다.
차라리 게임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게임하던 시절이 훨씬 편안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혓바늘이 돋고 편두통이 도진 상태로 어떻게든 일정을 끝내고 나니 몸이 젖은 행주같이 느껴졌다.
벌써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노곤한 몸을 제현에게 기대어 자고 일어나니 숙소에 도착해 있었다. 잠이 모자라 그냥 이대로 자는 척하면 제현이 옮겨 주겠거니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나를 흔들어 깨웠다.
“형, 도착했어요. 일어나요.”
“음…… 알았어.”
연기가 부족했나 싶었다. 결국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숙소로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커다란 펑 소리에 놀라 종이 인형처럼 나부끼며 넘어갔다.
“형!!!”
얼빠진 표정으로 넘어져 있으니 제현이 급하게 나를 감쌌다.
“헐…… 괜찮아요? 죄송해요.”
“야, 내가 그거 하지 말랬잖아.”
미리 숙소로 들어간 준이 펑 소리의 원인인 폭죽을 쥐고서 당황하고 있었다. 고작 저 조그만 폭죽 하나에 넘어진 게 부끄러워 얼굴이 조금 달아오를 때쯤 어디선가 케이크를 들고 온 동진이 노래를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제현이 웃으며 자기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방금 자정이 넘어 9월 3일 내 생일이었다. 생일 축하 노래를 숙소 바닥에 엎어진 채 듣고 있으니 현실감각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사랑하는 찬희의 생일 축하합니다! 뭐 해, 초 불어!”
스물두 개의 초를 세 번에 나눠서 불어 껐다. 제현의 생일에는 숫자 모양 초 두 개로 퉁쳤으면서 작은 초를 스물두 개나 꽂은 것은 내 작디작은 폐활량을 농락하기 위함이 분명했다.
수많은 초를 다 끄기가 무섭게 크림을 묻힌 손이 여기저기서 날아왔다. 막을 여력은 물론 도망칠 기력도 없어서 묻히면 묻히는 대로 그냥 가만히 있으니 금방 온 얼굴이 크림 범벅이 되었다. 입가의 크림을 핥자 너무 달아서 입맛을 다셨다.
“하하하, 눈사람 같아요.”
“자, 자. 얘들아, 내일도 촬영 있는 거 알지? 적당히 놀고 자러 가.”
“네.”
제현이 준 티슈로 얼굴을 대충 훔치고 둘러보니 동진이나 준도 나 못지않게 크림 범벅이었다. 하여간 생일 케이크를 사면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바르는 게 더 많았다.
제현이 웃으며 얼굴에 묻은 크림을 손으로 닦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멍한 느낌으로 한참을 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오늘 하루 중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나 졸려.”
“어휴, 생일 주인공이 저렇게 재미없어서야.”
“오늘 일정 바빴잖아요. 어쩔 수 없죠. 아쉽지만 이만 해산합시다.”
“우우, 내일도 일정 바빠서 축하도 제대로 못 하는데.”
내 말에 차례로 동진, 제현, 준이 반응했다. 나만큼이나 비쩍 마른 준은 오늘따라 체력이 남아도는 모양이었다. 내가 눈을 반쯤 감고 버티고 있으니 동진이 투덜거리는 준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 사이 케이크 잔해물을 대충 다 치운 제현이 다가와 나를 안아 들었다.
“아까 안 깨웠으면 계속 자는 척하려고 그랬죠?”
“들켰네.”
“그 정도는 다 알죠. 저도 깨우기 싫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제현의 볼에 아직 닦이지 않은 크림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틀어 볼을 핥자 삽시간에 제현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