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혼자서 적팀 4명을 전부 잡으면 차례로 제압-더블킬-트리플킬-전멸 메시지가 출력되며 [전설적인 존재] 나레이션이 나오고 KKL에서는 이 전설적인 존재를 띄운 선수에게 주는 레전더리 상금도 있었다.
비단 상금이 걸려 있는 리그뿐만 아니라 보통의 랭킹전에서도 트리플까지 띄운 사람이 있다면 몰아주는 게 예의였다. 심지어 마지막 남은 적팀이 얌전히 죽어 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 중요한 막킬을 내가 날름 먹어 버려 등줄기에 식은땀이 다 흘렀다.
“대박이다. 이걸 먹네.”
“아, 개웃겨.”
동진과 준은 내 킬 로그가 뜨자마자 동시에 폭소를 터트렸다. 너무 놀라 저절로 눈이 광속으로 깜빡였다. 잠시 굳어 있다가 몰려오는 민망함에 입술을 짓씹으며 옆을 슬쩍 보자 화가 날 만도 한데 제현은 실실 웃고 있었다.
“맛있게 드셨어요?”
“미안하다고…….”
“괜찮아요. 저는 형이 먹는 거만 봐도 배부르더라고요.”
“…….”
“아, 찬희 형 제현이한테 밥이라도 사 줘야겠네.”
“야, 맛있는 거로 사 줘라. 우리 제현이 결승전 레전더리를 다 뺏기네.”
“그만 뭐라 해요…….”
평소라면 그만 놀리라고 말렸을 동진까지 합세해서 놀려 먹기 바쁘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거의 우는 것 같은 심정으로 바쁘게 손을 움직여 겨우 게임을 끝냈다.
- 정말 역대급 경기가 아닐 수 없네요. 주요 장면 다시 보실까요!
- 크으으……! 구리 선수의 눈물겨운 저 버티기! 나는 탱커다. 나는 버텨 낸다……!
- 그리고 마지막에 조커의 화려한 트리플 킬이 있었죠. 체크 메이트의 저지로 전멸을 내지는 못했지만요.
- 하하하! 체크 메이트 선수가 게임 중에 당황하는 선수가 아닌데 저렇게 화들짝 놀라는 걸 보니 신선한데요?
- 와우, 이번 세트 MVP는 구리 선수입니다! 아, 경기 내내 잘 버텨 주었죠. 저는 이 선수만큼 정석적인 탱커 플레이를 잘해 주는 선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KDA 1/0/13이라는 숫자로 말해 주는 든든함!
- 네, 이로써 세트 스코어 2:2로 동점을 만드는 트릭스 게이밍! 이제 마지막 단 한 세트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다음 경기의 승자가 KKL 서머 시즌 트로피의 주인이 됩니다!
아까 손에 땀이 얼마나 났는지 마우스가 땀으로 축축하길래 물티슈를 가져와 마우스를 닦으려는데 화장실에 다녀온 제현이 저 멀리서부터 하얗게 질려서 달려오더니 내 팔을 잡아챘다.
“허, 허억…… 형, 형 제발 멈, 춰요…….”
“왜, 왜?”
“……허, 허어 사인, 사인 지워져요…….”
“아, 미안.”
아무 생각 없이 벅벅 문지를 준비가 완료된 손을 항복이라도 하듯이 위로 번쩍 들었다. 내게 너무 익숙한 마우스라서 마치 내 것처럼 편안하게 쓰고 있었는데 일단은 제현의 애장품이니 너무 내 것처럼 막 다뤄서는 안 됐다.
한결 안심한 얼굴로 마우스를 품에 안다가 내려놓고 어디선가 마른 천을 가져와서 조심스럽고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어쩐지 흰 장갑만 꼈다면 박물관에서 전시품이나 예술품을 관리해 주는 직원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저렇게 애지중지하는 걸 내게 턱턱 넘겨준 것이 너무 귀여웠다.
“반납 안 해도 된다며?”
“아니, 그래도…… 물티슈로 벅벅 닦으실 건 없잖아요. 이거 형이 KKCL 우승하실 때 썼던 마우스란 말이에요. 좋은 기운까지 닦이면 어떡해요.”
“그럼 그 좋은 기운, 네가 써. 네 거랑 바꾸자.”
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차피 같은 모델이니 제현의 실력이 튈 일도 없었고 내 신경이 거슬릴 일도 없었다. 나보다는 제현에게 더 소중한 물건이니 그러고 싶었다.
“형은 제 마우스 쓰고요?”
“싫으면 말고.”
“아뇨, 아뇨. 좋아요.”
5세트까지 오느라 다들 체력이나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마우스를 받아 드는 제현의 눈이 마치 1세트를 하기 전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자, 자. 우리 이제 딱 한 걸음 남았다. 제현아, 컨디션 어떠냐. 잘할 수 있겠어?”
“저야 늘 최고죠.”
약간 피곤한지 껌을 씹으며 심드렁하게 있는 준의 어깨를 감독님이 마구 주물렀다.
“제현이랑 동진이는 체력 면에서 걱정이 없는데 말이야. 준이랑 찬희는 걱정스럽다니까. 다들 컨디션 괜찮지?”
“아, 아악! 아파요.”
준의 비명을 배경 음악 삼아 심호흡을 크게 하고 목을 꺾자 우두둑거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났다.
“찬희야, 목 부러진 거 아니지? 어떻게 헤드폰으로 다 들리냐.”
“과장하지 마세요.”
딱딱하게 말하는데 제현이 정말 걱정스러운 얼굴로 팔을 뻗어 목을 주물렀다.
“하지 마…….”
“찬희 저거 다른 사람이었으면 칼같이 뚝딱 쳐냈을 거면서 제현이한테 무른 거 봐. 역시 막내 대접이 좋긴 좋다.”
“저도 제현이랑 동갑인데 왜 저는 야생에서 키우시죠? 억울해.”
“달링 선배님, 올해 데뷔한 막둥이 조커 인사 올립니다.”
제현이 꽃받침까지 하면서 아양을 떨자 준이 오만상을 하며 ‘녹음되고 있어서 욕을 할 수도 없고…….’하며 한탄했다.
- 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KKL 서머 시즌 대망의 결승전! 이제 최종 세트가 될 5세트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 이거 너무 싱겁게 3:0으로 끝나는 거 아닌가 했는데요. 기가 막히게 부활한 트릭스 게이밍이 3, 4세트를 연이어 승리하면서 2:2!
- 밴픽 들어갑니다! 지금 KJ의 심정이 말이 아닐 것 같은데요.
- 맞습니다. 나이츠에서 이 기세라는 것도 무시할 수가 없거든요! 하지만 이겨 내야죠! KKL 4회 연속 우승이라는 역사를 써낸 강팀이 아니겠습니까!
- 신중하게 고르는데요. 지난 세트에 3딜 조합을 했다가 이도 저도 아니게 그냥 싹 쓸려 버린 탓인지 KJ도 순탱을 픽합니다.
- 좀 과한 도전이긴 했죠. 무난한 정통 조합으로 가면 우리가 이긴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3, 4세트의 트릭스 게이밍보다도 정석적이고 안정적인 조합이 완성되었네요.
- 트릭스 게이밍은 고유의 전통 조합이죠. 죽창 앞에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양날의 검과 같은 딜러라서 자주 쓰이진 않지만, 조커 선수가 참 잘 쓰죠?
제현이 신났는지 부산스럽게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현.”
“네?”
“나 높은 곳에 데려가 주겠다던 약속 지켜.”
제현이 짧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제가 약속 안 지키는 거 본 적 없으시죠.”
“응.”
“오늘도,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예요.”
자신감과 콧대 하나는 끝내 주던 내 딜러가 아니던가. 큰 무대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준이 힘차게 자기 양 뺨을 두어 번 세차게 내려쳤다.
“빡힐 아니고 빡빡빡힐 할 테니까 다들 안전벨트 꽉 붙들어 매세요.”
다들 몸은 조금 지쳐 있었지만, 집중력은 최고조였다. 젓가락으로 지나가는 파리를 잡으라 그래도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정석적인 조합을 꾸린 KJ는 단단해서 초반에 타격을 주거나 앞서가기 힘들었다. 거대한 벽과 같은 KJ 스노우는 제현과 같이 데뷔한 신인 탱커가 유일한 약점이라고 볼 수 있었다.
기세가 오르긴 했다지만 최근 성적이 좋았던 경기는 모두 공격형 탱커였고 우직한 정석 탱커 미러전이라면 동진이 한 수 위였다.
상대 탱커와 한참 붙어서 때리고 맞으며 자기들만의 땀내 나는 싸움을 하던 동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찬희야, 힐러가 안 보이는데 혹시 내 쪽으로 와?”
“아뇨, 집에 갔을 거니까 싸워도 돼요. 만약에 가더라도 제현이랑 저랑 물었다 놓친 상태라 피 상황도 안 좋고 궁도 쿨.”
“주님, 한 놈 보냅니다.”
[Guri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동진의 말과 함께 메시지가 떴다.
- 구리!!! 15분 만에 드디어 킬이 나왔습니다!!! 솔로 킬이 다른 곳도 아니고 탱커 쪽에서 나옵니다???
- 다들 이게 마지막 경기다 보니까 사리는 면이 없잖아 있는데 맨데이 선수가 데미지랑 거리 계산을 좀 실수한 것 같은데요.
- 구리 선수가 노련하게 킬 각을 잘 봤다고도 할 수 있죠!
- 하지만 그 순간 판타 선수!!! 달링 선수 위치가 조금 애매한 것을 정확하게 캐치하고 바로 궁극기를 박아 넣습니다!
“어? 저 물렸어요. 아, 이거 죽겠는데.”
“그냥 깔끔하게 죽어. 궁극기 아껴.”
“아…… 알았어요.”
준의 조그마한 체력으로는 판타의 폭딜을 받아 낼 수 없었다. 핑으로 위험 지역을 다시 알려 주었다.
“이쯤에 있어도 여기까진 맞으니까 계산 확실하게 해.”
“넵, 죄송해요.”
연습 경기하는 것도 아니고 결승전에서 아직도 이런 기초적인 것을 가르쳐야 하는지 답답해 한숨을 쉬었다. 최근 기량이 좋아 따로 불러내지 않았는데 휴식 기간에 잡아 놓고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서로 킬도 쉽사리 나지 않고 서로 대치만 길어지는 지지부진한 전투가 이어졌다. 경기 시간은 어느새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거 길게 끌리면 진짜 한타 한 번지면 게임 끝나는데.”
“지금 이니시 거는 쪽이 손해라 경기 질질 끌리는 거잖아. 어떡할래. 뚫을래, 버틸래?”
동진의 질문에 다들 내 오더를 기다리는 것이 느껴졌다. 곧 리젠되는 오브젝트를 가운데 두고 8명이 얼굴을 맞대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사실 제현의 사거리가 상대보다 짧아서 먼저 들어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버티자니 지금보다 변수가 더 많아질 예정이었다. 더 질질 끌면서 노잼 경기를 지속하느니 뚫어 버려야 했다.
마침 제현이 방금 집에 다녀와 상대 딜러보다 템 상황이 미세하지만, 더 좋았다. 사거리가 짧은 것은 피지컬 차이로 어떻게든 커버하리라 믿고 오더를 내렸다.
“뚫자.”
“답답하던 차에 잘됐다. 오브젝트 나오면 바로 어그로 들어간다?”
“제현아, 버프 다 달아 줄 테니까 돌아서 와. 양각으로 좁히자.”
- 조커 선수 슬금슬금 빙 돌고 있죠……? 지금 온갖 버프를 이미 달고 와서 엄청나게 셉니다. 탱커 제외하고는 조커에게 맞으면 다 빈사 상태가 될 겁니다.
- 아이고!! 구리의 궁극기 장렬하게 빗나가면서 1인 궁이 나오고 마는데요!!!
- 하지만 뒤에서 조커가!!! 조커가!!! 이건 뭐 저승사자죠?! 이게 무슨 데미지입니까!!!
- 지금 조커 따끈따끈하게 템 다 뽑고 와서 엄청나게 세요!!! 싹 쓸리면서!!!
[Joker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Joker 님의 더블킬]
[Joker 님의 트리플킬]
[Joker 님이 전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Joker 님이 적을 전멸시켰습니다!]
[전설적인 존재 Joker 님]
- 전!!! 멸!!! 트릭스 게이밍 깔끔하게 한타에서 대승하면서 조커는 4세트 때 아쉽게 놓쳤던 전멸을 띄웁니다!!! 조커!!!
- 오브젝트 버리고 바로 성문으로 달리죠?? 이거 어디까지 밀 수 있나요!!!
- 아니, 이거 게임 끝날 수도 있겠는데요?
- 30분대 게임에 킬 스코어가 5:1인데 게임이 끝난다고요?
“지금 끝내야 해.”
오브젝트도 버리고 상대 진영으로 뛰며 승부수를 던졌다. 상대가 전부 부활하고 몇 초만 더 견딘다면 성문을 허물 수 있을 것이었다.
“상대 부활 5초 전. 다들 최대한 성문 두들기고 몸 대가면서 제현이 지켜야 해요.”
성문의 내구도가 60% 정도 남았을 때 상대가 전부 부활해 뛰쳐나왔다. 준이 제일 먼저 물렸다.
[Fanta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아, 근데 나 힐 다 넣고 죽었어. 할 거 다 했다.”
50%, 40%, 30%…….
[Fanta 님의 더블 킬]
20%, 10%……
[Fanta 님의 트리플 킬]
5%, 4%, 3%, 2%……
나와 동진이 차례로 딜러의 손에 썰리고 적 네 명이 동시에 제현에게 모든 스킬을 퍼부었고 제현은 최소한의 무빙으로 적당히 맞아 가며 성문을 두들겼다.
1%.
제현의 HP 게이지와 성문의 게이지가 거의 비슷하던 순간 두 글자가 모니터에 떴다.
[승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