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76화 (76/100)

76화.

“제현아.”

“어, 네. 알겠어요.”

생존력이 낮다 보니 줄기차게 집중 공격을 당하는 중이라서 잠깐 뭐 하다 보면 두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매번 맵 리딩을 하는 찬희가 경고해 주었는데 이제는 내 이름만 불러도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운이 좋으면 하나를 잡고 빠지고 운이 나빠도 하나를 잡고 죽어서 템이 쭉쭉 나오고 있었다. 저쪽은 탱커와 딜러가 나누어 성장하느라 내 성장력을 따라오고 있지 못한 데다가 내 성장을 막겠다고 투자해 대서 성장력이 훨씬 뒤처진 상태였다. 딜러가 버퍼를 끼고서 내 쪽으로 오고 있었지만, 한껏 여유로운 것도 그 덕이었다.

“싸울 거야?”

“간 좀 보다가 빠질게요. 지원 안 오셔도 돼요.”

“곧 오브젝트 챙겨야 하니까 죽지 마. 한 명 잡고 오면 좋고.”

“2:1을 이기고 돌아오라는 건 좀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웃음기 가득하게 농담을 던지자 찬희도 작게 웃었다. 게임 시작 전만 해도 핫팩을 만지작거리며 굳어 있더니 불안한 극 초반이 지나고 나니 조금은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내 케어 극진하게 받은 딜러면 밥값은 해야지.”

“그러면 한 명은 반드시 잡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인데요.”

“대신 무리하다가 죽으면 숙소에 발 디딜 생각하지 마.”

밥값은 제대로 하되 실수하면 내쫓길 형편에 처했는데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이 맛에 게임하지.

- 아니, 조커 선수 웃고 있죠? 지금 2:0으로 지고 있는 팀 맞나요?

- 지금 상황을 보면 웃음이 나올 만도 합니다. 지금 조커 선수 레벨이 다른 선수들과 2레벨이 넘게 차이가 나요!

- 한번은 끊어 줘야 하는 KJ 스노우는 지금 안달이 나 있습니다.

- 여러 번 시도했지만 능숙하게 넘겼던 트릭스 게이밍인데요. 지원을 오려던 체크 메이트는 다시 빠지는데요. 판타와 도키가 위아래로 조커 선수를 감싸며 포위망을 좁히고 있는데 혹시 지금 위치 파악이 안 된 건가요?

- 이거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커 선수가 지금 ‘어, 내가 알아서 할게!’ 콜이 나온 것 같아요.

- 2:1을요?

- 그만큼 자신이 넘친다는 거죠. 와, 와 봐! 다 들어와! 너와 나의 레벨 차이를 한번 맛봐라!

- 네, 말씀하시는 순간 도키 선수의 궁극기!!! 장렬하게 빗나가면서!!!

- 기막힌 무빙이었죠?! 지금 시야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튀어나와서 궁극기를 코앞에!! 아주 면전에 메다꽂았는데 그걸 피합니다?

- 황제 조커……! 엄청난 순발력으로 주요 스킬을 모조리 다 피하며 오히려 도키 선수를 잡고 유유히 본진으로 빠집니다.

- 어? 홀리몰리 선수가 죽어 있어요?

-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어요!! 지금 저희도 정신을 못 차리고 트릭스 게이밍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속전속결의 트릭스 게이밍다운 모습을 결승전 3세트에서야 보네요!!!

- 리플레이 영상 다시 보시죠! 딜러와 버퍼가 빠진 사이 혼자 동떨어져 있던 힐러를 달링과 체크 메이트의 합작으로 아주 깔끔하게 잡아냅니다!!

- 아, 3:0 안 되지. 우리가 그렇게 곱게 보내 줄 줄 알았냐. 딱 대라, KJ 스노우!

확실히 데미지가 쑥쑥 박히니 중반쯤 가서는 칼로 연두부를 썰듯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나이츠 타격감 없다고 했나. 평타에도 살살 녹는 적들을 두들겨 패고 있자면 여느 격투 게임보다도 타격감이 좋았다.

- MVP는…… 역시 조커 선수네요!

- 이번 세트 조커는 조커가 아니었어요! 무슨 거의 황제로 군림하셨죠?

- 압도적인 차이로 찍어 눌렀죠!!! 오랜만에 딜러다운 딜러 모습을 본 것 같은데요. 아, 정말 속이 다 시원하네요!

플레이오프 경기의 MVP 포인트로 1위 자리를 KJ의 탱커에게 뺏겼었는데 이번 세트 MVP 선정으로 다시 1위로 올라왔다.

MVP 상금을 타면 찬희를 데리고 여행이나 가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여행이라면 질색하던 것이 떠올랐다. 아무리 고민해 봐도 결국 얌전히 저금하는 결말로 도착했다.

‘그래, 저금하고 돈 모아서 차나 한 대 뽑자.’

아마 차를 뽑아도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찬희가 제일 좋아하는 죽집이나 줄기차게 다니게 될 것 같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형 생각이요.”

“끼 부리지 말고 집중해.”

너무 자주 애교를 부렸더니 이제 어지간해서는 통하지도 않았다. 입에 비해 몸은 아직도 매번 잘 통하는 편이긴 했다. 몸은 백발백중인데 말은 열 번에 한 번 먹히려나. 오늘 숙소 들어가면 스트립쇼라도 펼쳐야지, 안 되겠다.

“황제현, 또 어디까지 갔어.”

“죄송.”

잠깐 긴장을 풀고 멍하니 있다 보면 사고가 온갖 곳으로 뻗어 별별 생각을 다 하고 있어서 자주 찬희에게 혼이 났다.

오늘은 안 혼나고 넘어가려나 했더니 아주 딱 걸렸다. 목줄 잡힌 개처럼 옷깃을 잡혀 열띤 전략을 설명 중인 감독님 곁으로 끌려갔다.

***

- 세트 스코어 2:1로 KJ 스노우가 한발 앞서가고 있는데요. 이번 4세트 어떻게 보시나요?

- 앞선 두 경기에서 KJ는 맨데이 선수의 뛰어난 피지컬을 믿고 딜탱으로 투 딜 전략을 거의 완벽하게 펼쳤는데 3세트에서 오히려 이 전략이 독소로 작용했습니다. 아무래도 두 명이 나누어 먹다 보면 성장이 느릴 수밖에 없거든요.

- 이제 KJ 스노우는 선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투 딜 전략을 한 번 더 보여 줄지. 아니면 새로운 전략을 보여 줄지!

“엥?”

놀란 준이 자기가 보고 있는 화면이 맞는지 모니터에 코를 박을 정도로 가까이 보다가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 아, KJ 스노우 이건 좀 실수 아닌가요? 서머 시즌 통틀어서 단 한 세트를 제외하면 달링 선수 고정 저격 밴이었던 루시리안을 열어 줬는데요!

- 조커 선수 저격 밴을 한다고 놓친 걸까요?

- 결승전에서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한 건 아닌 것 같고 너희 이거 잘한다며? 한번 해 봐! 하는 디펜딩 챔피언의 패기라고 생각됩니다.

- 네, 맞습니다. 3세트에서 패배한 이유가 투 딜 체계는 아무래도 성장 속도가 조금 느릴 수밖에 없는데 이 허점을 노린 트릭스 게이밍이 전통적인 조합으로 찢어 버린 거 아니겠습니까? 야, 우리 이거 계속하고 싶은데 너네도 이거 해. 살살 꼬시는 거예요!

“감독님, 저 루시리안 하고 싶어요. 아, 저도 MVP 받을래요.”

“김준, 땡깡 부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

“넹…….”

감독님이 갑작스러운 다크힐러의 오픈에 잠시 고심하는 사이 동진이 준을 진정시켰다.

“이거, 우리가 지금 투 딜 전략 가 봤자 질질 끌려다닐 것 같거든? 저쪽은 이미 숙련도 빵빵하게 쌓은 딜탱이 있잖아. 준아, 너를 못 믿는 건 아니야.”

“넵.”

“루시리안을 열어 주긴 했지만, 한 번 더 정석 조합으로 가야겠다. 제현이야 워낙에 기사 폭이 넓어서 저쪽 밴 카드는 허공에 흩뿌린 거나 마찬가지야. 이번 세트도 우리가 이길 수 있어. 동진아, 순탱 가자.”

시험적인 밴픽도 마다하지 않고 유행을 선도하는 것으로 노잼 KKL을 유잼으로 만들어 주는 팀이라는 타이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어디 트렌디함이 밥 먹여 주었나. 우리는 우승에 목말라 있었다. 우승을 위해서는 앞으로 단 한판도 내주어서는 안 됐다.

- 아니, 이걸 열어 줬는데 안 해? 안 해??

- 네, 안 합니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 KJ 스노우의 마지막 픽인데요. 마침 힐러가 남아 있습니다. 지금 딜탱을 이미 뽑았기 때문에 굳이 루시리안을 할 필요는 없는데 그렇다고 버프를 먹어서 성능 끝판왕의 다크힐러를 안 할 수도 없고!

- 폭탄을 던졌는데 다시 돌아왔어요!!! 과연 KJ 스노우의 대답은?

- 3, 2, 1……! 루시리안이 등장합니다!!! 사상 최초의 3딜 메타!

- 이거 초반부터 장난 아니겠는데요. 몰아치겠다는 거죠!

“초반에 무조건 사려야겠다. 저기 데미지 초반에 너무 좋다.”

특히나 오늘 폼이 가장 불안불안한 동진이 문제였다. 분명히 1, 2세트처럼 마주칠 때마다 격하게 싸움을 걸어올 텐데 쥐꼬리만 한 공격력을 가진 순탱의 동진은 온종일 때리면 때리는 대로 두들겨 맞아야 했다.

“동형, 거기 딜러랑 탱커 같이 가요.”

“하, 나 체 관리 안 된 상태라 그냥 쭉 빠질게. 레벨 차이 말도 안 되네.”

- 아, 구리 선수 또 뒤로 쭉 빼는데요. 지금 경험치 손실을 얼마나 보는 겁니까! 제가 또 탱커 출신 아니겠습니까? 지금 탱커 유저들은 다 눈물 한 방울씩은 흘리셨을 거예요. 저렇게 상대에게 종일 얻어맞으면서도 우직하게, 꾸역꾸역 경험치 챙기는 탱커 포지션에 한 번쯤은 서 보셨을 거거든요!

- 하하, 지금 거의 구리 선수와 동기화되셨는데요? 이 순간 구리 선수 라인에 복귀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맨데이 선수에게 또 얻어맞는데요!!!

- 한 대, 두 대! 이게 무슨 데미지죠? 구리 선수 또 반피가 됐어요! 아……!!!

- 회사에서 깨지고 상사한테 욕먹으면서도 버티는 우리네 가장과도 같은 구리 선수의 플레이! 저는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네요.

“죽겠다…….”

동진의 눈물겨운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다른 사람들은 레벨이 두 자릿수인데 아직도 혼자서 한 자릿수였다.

“동형, 아이템 하나 더 언제 나와요?”

“300골드만 더 먹으면 될 것 같아.”

“지금 레벨 차이 때문에 너무 아프게 들어와서 한타 전에 아이템이라도 빨리 나와야 하는데. 제현아, 가서 탱커 한번 잘라 줄래? 킬 골드는 동형한테 주고.”

“배달의 제현, 주문 접수 완료되었습니다.”

준이 제현의 농담이 맘에 들었는지 킬킬거리며 웃었다.

“저기요, 황제현 씨. 저도 주문했는데 왜 안 와요?”

“아, 달링 고객님의 경우에는 저희 업체에서 차단되셔서 주문 접수 어려워요.”

“얘들아, 농담 따먹기 할 시간 있으면 지원이나 좀 빨리 와 줄래?”

“넵.”

- 조커와 달링의 도움으로 구리 선수의 첫 득점!!! 1/0/0의 눈물겨운 KDA!

- 긴급 수혈이 들어왔습니다. 자식들이 효도하면서 넣어 준 용돈으로 아이템을 장만하는 우리네 가장!

- 그래도 이제 어느 정도 템이 갖춰져서 맞아도 그렇게 아프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 네,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KJ 스노우의 조합이 예사 조합이 아니고 3딜 조합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이거 셋이 뭉쳐서 스킬 다 쏟아부으면 지금 체방 둘둘 두르고 있는 구리 선수도 아이스크림처럼 녹을 겁니다!

- 오브젝트 타이밍에 맞춰서 한타가 벌어질 모양인데요. 전부 모여서 일단 얼굴 확인은 했습니다. 야, 이거 보는 제 심장이 다 쫄깃쫄깃합니다.

- 간을 슬쩍 보는데요. 판타 선수 회피기로 파고들어 궁극기를 꽂아 넣습니다!!! 연이어 홀리몰리의……!

- 구리!!! 구리!!! 궁극기를 쓰려고 파고든 순간을 노려 완벽하게 광역 도발에 성공합니다!!! 환상적인 4인궁!!! 그 짧은 순간 잘 큰 조커가 하나둘 차례로 마무리합니다. 더블킬! 트리플 킬! 이거 전멸 뜨나요!!!

[Joker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Joker 님의 더블 킬]

[Joker 님의 트리플 킬]

[Joker 님이 전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Checkmate 님이 마지막 적을 처치했습니다!]

“엥?”

“아, 미안.”

상대가 제현의 스킬을 회피하며 내 쪽으로 달려들다가 내 장판을 밟고 죽으면서 중요한 막킬을 내가 먹으며 제현의 연속 킬을 끊어 버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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