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탱커 Guri
힐러 Darling
딜러 Joker
버퍼 Checkmate
[KJ 스노우]
탱커 Manday
힐러 Holymoly
딜러 Fanta
버퍼 Doki
핫팩을 이리저리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익숙한 마우스가 잡히자 막 데뷔했을 때가 생각났다.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아주 까마득한 옛날같이 느껴졌고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이 너무나 편안해 심신이 차분해졌다.
“아, 아. 얘들아, 마이크 체크 한 번씩 해 줘. 오늘 끝나고 먹고 싶은 거 있는 사람?”
“여기는 달링, 잘 들린다, 오버. 우승하면 초밥 사 달라, 오버.”
“김준의 발언에 이의 있습니다. 찬희 형은 해산물을 거의 안 먹습니다. 소고기로 타협 요청합니다.”
“…….”
아까는 다들 진중한 표정으로 얼어 있더니 자리에서 마이크 체크를 하려니 다들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며 평소와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나 찬희 목소리가 안 들리는데?”
“말을 안 했는데 들리면 이상하죠.”
“뭐야, 서찬희, 빨리 마이크 체크.”
“오늘 지면 같이 죽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언젠가 보고 가슴 깊게 남은 치어풀 문구를 읊자 세 명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이열, 방배동 주먹왕 오늘 살벌하네. 얘들아, 오늘 죽을 각오 하고 해야겠다.”
“우승 인터뷰에 꼭 말해야지. 저는 오늘 살기 위해서 이겼습니다……!”
“자, 자. 찬희 그만 놀려 먹고. 상대는 KJ야. 다전제에서 잘 안 지는 팀인 거 알지? 방심하면 바로 나락 가는 거야. 우리는 더 철두철미하게 가야 해.”
감독님의 말씀에 단숨에 다들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우리는 밴 카드 판타 집중 저격으로 간다. 전략도 딜러 억제에 힘쓸 거야. 저쪽도 알고 있을 테니까 딜탱 위주로 나올 거야. 준결승을 3:1로 이겼는데 이긴 경기는 전부 딜탱 전략이 나왔으니까 다들 데미지 계산 평소보다 더 집중하고 잘들 해. 그리고 기왕 우리가 선픽인 김에 동진이 딜탱을 먼저 선점하자.”
“불안한데.”
“아냐, 나 연습 열심히 했어.”
- 밴픽이 끝났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 우선 조합 자체는 트릭스 게이밍이 전반적으로 대세 픽을 많이 가져왔습니다. 다만, 안정성으로 볼 때는 KJ가 훨씬 좋네요. 아무래도 트릭스 게이밍이 밴 카드를 판타 선수 저격으로 몰다 보니까 KJ가 딜러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본인들이 좋아하는 기사를 잘 데려왔어요. 이 게임 아무래도 초반이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요.
- 맞습니다. KJ 스노우의 경우 경기 시간이 늘어날수록 승률도 엄청나게 오르거든요! 속전속결의 트릭스 게이밍이라고 불리는 만큼 초반에 기선 제압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 구리 선수의 딜탱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 최근 패치로 딜탱이 버프가 많이 되었어요. 랭킹전에서의 승률도 순탱에 비해 극명하게 높습니다. 하지만 같은 딜탱이라면 준결승전에서 딜탱으로 화려한 모습을 자주 보여 주었던 KJ가 더 우세할 것이라고 예상됩니다.
- 자, 대망의 결승전 시작합니다!
“아, 나 죽는다.”
“동형, 거기서 한 번만 더 죽으면 복구 천년만년 걸려요.”
극 후반 집중력이 다른 팀들보다 뛰어난 KJ를 상대로 천년만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조합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초반부터 동진이 상대 탱커와 자꾸 동선이 겹쳤다. 원래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아무래도 방어적인 성향을 억지로 버리려고 하니 동선 실수가 자꾸 일어났다.
상대 탱커는 이미 준결승전에서 딜탱을 겪어 보고 MVP도 땄던 선수여서 동진과 마주칠 때마다 킬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오히려 양 팀 딜러보다 데미지가 더 잘 나올 것 같았다.
“저거 어떻게 막지. 제 힐 들어갈 새도 없이 녹던데.”
“한번은 끊어야 해. 저대로 키우면 답도 없어. 모여.”
- 자, 트릭스 게이밍. 강수를 두는데요. 은밀하게 대기하고 있습니다. 맨데이 선수 아직 눈치 못 챘는데요.
- 체크 메이트 선수의 명품 맵 시야 컨트롤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 아, 방금 판타 선수가 위험 핑을 찍었는데요!!!
- 알고 하는 것은 아니고 지금 상대 다 안 보인다. 어디 뭉쳐서 대기하고 있는 거 같은데 100% 너일 듯? 이런 뜻인 것 같습니다.
- 아!!! 대기한 보람도 없이 맨데이 선수가 뒤로 쭉 빠집니다.
- 조금만 더 왔으면 큰일이 날뻔했는데요! 위기를 모면하는 KJ 스노우! 역시 노련합니다.
“이거 튼 거 같으니까 흩어지자.”
깊게 한숨을 쉬었다. 아까운 시간만 허공에 내다 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런 자잘한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다 정신 차리면 전선이 성문 바로 앞까지 밀려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상대라는 게 중요했다.
“어차피 한 번은 와야 할 텐데 다음 턴에 다시 잠복해 볼까요?”
“그러자.”
제현의 말대로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기회가 돌아왔다.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탱커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 나는 한 우물만 파!!! 다시 한번 기습을 시도하는 트릭스 게이밍!
- 지금 맨데이 선수를 꺾어 놓지 않으면 후반에는 손 쓸 수 없거든요.
- 아, 말씀하시는 순간 궁극기를 맞은 달링 아웃!! 연이어 구리도 아웃!!! 더블 킬!!! 비상사태!!!
- 대장군 맨데이! 폭주 기관차처럼 다음 상대를 찾는데요!! 다음은 누구냐!!
- 체크 메이트 살아 돌아갈 수 있나요? 도망쳐 보지만 잡히고 맙니다. 딜탱의 정수를 보여 주는 맨데이의 환상적인 트리플 킬!!!
- 피 상태가 좋지 않아서 조커 선수에게 제압당하긴 했지만 셋이나 잡고 죽었어요!!! 죽었는데 웃고 있죠? 템 쭉쭉 뽑히죠?
- 이거 부활하는 순간 맨데이는 전장의 신입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이거 트릭스 게이밍 정말 큰일 났습니다. 이거 어떻게 막습니까!!
“이거 안 되겠는데.”
“아, 딜러랑 다르게 튼튼한 데다가 딜도 잘 나와서 넷이서 달려드는데도 잡기 쉽지 않네요.”
“애초에 골드 수급을 너무 잘했다 보니 코어 템이 잘 갖춰져 있어서.”
“미안하다…….”
마주칠 때마다 죽어서 킬 골드를 짭짤하게 안겨 주며 무럭무럭 키웠던 동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었고 제압 골드를 챙긴 제현이 힘을 낸다고 냈으나 상대 딜러와 탱커가 성장 차이로 짓누르며 성문이 함락되었다.
[패배]
2세트도 비슷하게 전향이 흘러가다가 1세트보다도 압도적인 킬 스코어 차이로 패배했다. 세트 스코어 2:0. 5판 3선승인 결승전에서 우리는 정말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 트릭스 게이밍, 이게 어떻게 올라온 결승전 무대인데 이대로 무너지나요? 2라운드 단독 1등을 유지하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거죠?
- 보여 줘야죠! 지금 집에서 KKL 서머 결승전을 보고 계실 시청자분들은 이제 치킨 막 도착해서 드실 시간인데 3:0으로 끝나면 아쉬워서 어떡합니까!
- KJ 스노우 입장에서는 3:0으로 빠르게 끝내 버리고 5회 연속 우승 신화를 써 내려가고 싶겠습니다만, 트릭스 게이밍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패패승승승 노려봐야죠! 5꽉 꿀잼 경기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맞습니다!!!
불안하고 초조했지만 동시에 머리는 점점 차갑게 식으며 팽팽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이거 동형 그냥 순탱하는 게 어때요.”
“도저히 맞상대가 안 되니까 그러는 게 나을 것 같다. 대신 밴 카드를 탱커에 좀 써야 할 것 같은데.”
감독님이 흥분으로 가득했던 지난 세트들과는 다르게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딜러를 억제하는 것보다 2세트 연속 MVP를 타며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탱커를 억제하는 것이 맞았다.
전략대로만 흘러간다면 2라운드 때의 트렌디함은 버리고 지난 시즌 1라운드 전승을 휩쓸었던 전통의 죽창 딜러 조합이 될 것이었다. 제현이 살면 우리도 살고 제현이 죽으면 우리도 죽는 올포원 딜러 원맨팀이었다.
그간 다른 팀원들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자잘한 희생을 도맡아 하고 자기 먹을 것도 나눠 주어야 했던 이 시대의 자선가 딜러로 꽤 오래 있었던지라 게임의 승패가 제현에게 달리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혹여 부담이라도 되었을까 싶어 제현의 눈치를 살폈다.
“제현아, 할 수 있겠어?”
“저요?”
제현이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저는 날 때부터 준비되어 있죠. 제가 형 처음 봤을 때 두고 보라고 했죠. 잘 보세요.”
제현이 연속으로 패배한 사람답지 않게 자신만만한 웃음을 실실 흘렸다.
“내가 형 제일 높은 곳으로 보내 줄게요. 절 믿으세요.”
확신에 가득 찬 제현의 말에 홀린 듯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쟤는 무일푼 상태에서 옥 장판을 팔아도 다이아몬드 회원이 되었을 것 같고 사이비 교주를 했어도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사람들을 끌고 다녔으리라. 천성이 선하고 착한 사람이라 어찌나 다행인지 몰랐다.
“너 앞으로도 죄짓고 살진 말아라.”
“갑자기요?”
“그쪽으로도 대성할 것 같아서 그래.”
“형 얼굴에 먹칠할 짓은 안 해요.”
내 어깨에 머리를 올리더니 머리를 비비적거리다 떨어졌다. 기껏 세팅해 둔 머리가 흐트러졌다. 손으로 빗어서 수습해 주는데 헤어스프레이 때문인지 까슬까슬했다.
“아, 머리 생각 못 했네. 이상해요?”
“나와는 다르게 너는 한낱 머리카락에 영향을 받는 얼굴이 아니잖아.”
“무슨 소리예요?”
“너는 내가 머리 까면 안 좋아하니까.”
“예?”
생판 처음 듣는다는 소리를 했다. 오늘만 해도 헤어, 메이크업을 받는데 옆에 딱 붙어서서 구경하더니 넘기려던 걸 한사코 내리게 했으면서 발뺌하는 모습이 괘씸했다.
“형, 그거 오해예요.”
제현이 벌떡 일어나자 뒤에 서 계시던 심판분이 곧 게임 시작할 거라며 앉게 했다.
“……서 그런 건데.”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내 헤드폰을 벗겼다. 손을 동그랗게 말아 입에 대고 귓가에 속삭였다.
“형 머리 올리면 너무 멋있어서 제가 게임에 집중을 못 해요.”
***
부끄러워하려나? 웃으며 찬희를 살펴보는데 진짜 개똥 같은 헛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황제현, 농담할 여유 있으면 집중하자.”
“진심인데요.”
내 말을 못 들은 셈 치겠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더니 내가 벗긴 헤드폰을 썼다. 찬희가 자기 잘난 것을 아는 것은 오직 게임 한정이었다. 도통 다른 칭찬은 보호막에 튕겨 나가는 것처럼 먹히지를 않았다. 누가 저 사람을 저렇게 구깃구깃하게 만들어 놨는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찬희의 주변 사람들은 다들 세게 쥐면 부서질까 바람이 불면 날아갈까 곱게 다루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런 환경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버릇을 완전히 버려 놨을 텐데 찬희는 자신에게 특히 더 차가웠다.
누군가 자신의 게임 실력에 의문을 가질 때에만 발휘되는 자기 보호 본능이라니 자기애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얼굴이 토마토가 되든 말든 도망치지 못하게 잡아다 앉혀 놓고 알았다고 외칠 때까지 예쁘다, 예쁘다 해 줘야 하나.
“제현아, 딜러 막픽 해도 되지?”
“네.”
어차피 죽창 딜러는 KKL에서 나를 빼면 잘 쓰지도 않아서 밴도 픽도 되지 않았다. 다룰 수 있는 캐릭터 폭이 남들보다 조금 더 넓다는 것은 꽤 좋은 강점이었다.
“얘들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신중하되 질질 끌리지 않게 조심하자.”
감독님의 말씀이 무겁게 떨어졌다. 동진과 준은 패배감에 잡아먹혔는지 말수가 줄어들었지만 나는 점점 텐션이 올랐다.
드디어 온전히 나에게 칼자루가 쥐어졌는데 두려울 게 없었다. 이 게임은 망해도 내 탓, 흥해도 내 덕이었다. 딜러로서 이보다 즐거운 판이 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