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74화 (74/100)

74화.

“넌 진짜 사람 부끄럽게 만드는 말을 천연덕스럽게 하는 재능이 있는 것 같아.”

“더 부끄럽게 해 드려요?”

“아니.”

장난을 걸어 오는 제현을 가볍게 밀어내고 손에 들린 마우스를 만지작거렸다.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손에 쥐니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좋아요?”

“응,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뜯겼었거든. 나 원래 이런 건 고장 나도 잘 못 버리는데.”

“한 번 정붙이면 잘 못 떼시니까요.”

“응.”

만족스러움에 입꼬리가 저절로 말려 올라갔다.

“근데 너 형이랑 진짜 안 닮았다.”

“제가 아빠 판박이, 형이 엄마 판박이라서 그래요. 저희 누나는 저랑 똑같이 생겼어요. 이거 봐요.”

작은 액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가족사진이었는데 다들 팔다리가 길쭉길쭉해 모델 설정 사진 같았다. 어머님의 미모도 상당했다. 어떻게 이런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것같이 완벽한 외모의 가족이 실존할 수 있지.

제현은 고등학생 때 찍었는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제현의 양옆에 형과 누나가 있었는데 정말 누나는 쌍둥이로 보일 정도로 제현과 똑 닮아 있었다.

“너 긴 머리도 잘 어울리겠다.”

“길러 볼까요?”

농담으로 던진 건데 상상해 보니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가끔 미용실 가는 것을 까먹고 머리 자를 타이밍을 놓쳐 덥수룩한 거지꼴이 되곤 했는데 제현은 항상 깔끔했다. 원체 부지런해서 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궁금하긴 하네. 여름엔 더우니까 겨울에 길러보든가.”

“좋아요.”

제현과 거실로 나오자 제영이 예전 우리 유니폼을 들고 있었다. 등판에 ‘King’이라고 적힌 것을 보니 진형의 유니폼이었다.

“어쩌죠. 집에는 이것밖에 없는데 여기에 받아도 될까요?”

“안 돼.”

대답을 제현이 가로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내 옷 벗어 줄 테니까 여기에 받아.”

제현이 입은 옷은 경기 유니폼은 아니었지만 거의 팀원들의 실내복을 담당하고 있는 팀 로고가 들어간 티셔츠였다.

“난 너보다 킹이 좋은 걸 어떡해.”

“진심이야? 이렇게 귀여운 막둥이를 두고? 그거 이리 내. 차에 새똥 묻었던데 그거나 닦게.”

제현이 손을 뻗자 제영이 서둘러 유니폼을 뒤로 숨겼다. 픽, 비웃은 제현이 상의를 탈의한 채 벗은 옷을 식탁에 평평하게 펴고 어디선가 펜을 가져와 쥐여 주었다.

두 사람의 눈이 나에게 집중되자 별거 없는 사인인데도 괜히 떨렸다.

“그, 부담스러운데…….”

“아, 죄송해요. 중계방송으로만 보다가 실물로 보니까 너무 신기해서요. 화면보다 더 마르셨네.”

반짝거리는 것 같은 눈빛에 손이 덜덜 떨려 사인도 뭔가 선이 우그러져 있었다. 한껏 긴장하며 펜 뚜껑을 닫는데 제영이 환하게 웃으며 유니폼을 받아 들었다.

한참 유니폼을 감상하다가 다시 나를 구경하는 제영을 보며 제현도 처음 숙소에 왔을 때 3박 4일 동안 나를 신기한 동물 보듯이 봤던 것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얼굴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성격은 비슷한가 보다.

“거기도 빡세다고 하지 않았어? 게임 볼 여유가 있나 봐?”

“아, 나 작은 가게로 옮겼거든. 이제 그렇게까지 빡세지도 않아서 퇴근하고 나이츠하고 그래.”

“그러다 형까지 프로게이머 한다 그러면 아버지 쓰러지신다.”

“아무리 그래도 나이츠보단 요리가 재밌지. 너는 뭐 다시 요리할 생각 없어?”

제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요리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럼 뭐 계속 프로게이머 하셔야지. 맞다. 다음에 시간 나시면 밥 한 끼 대접해 드려도 될까요? 저 게임은 몰라도 요리는 좀 치거든요.”

“번호표부터 뽑아. 같은 서울에 있는 누나도 찬희 형 밥해 주고 싶다고 난리인데 아직 못 했어.”

아버님도 그렇고 이 집안사람들은 사람 밥 먹이는 걸 좋아하시는 모양이었다.

“아, 인기 많으시잖아? 난 결승전 보고 밤 비행기로 바로 출국이라 이번엔 무리려나. 아니면 지금 시간 돼? 집에 있는 재료로라도…….”

“우리 뭐 잠깐 가지러 온 거라 바로 가야 해.”

“알았어. 아쉽네. 바쁜 사람 더 안 붙잡을게. 찬희 선수 내일 경기장에서 뵈어요.”

“네.”

제현이 방에서 검은색 티셔츠를 꺼내 와 입으며 집을 나섰다. 유니폼이 하얀색이라서 어두운색 옷을 입은 것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검은색도 잘 어울리네.”

“저 안 어울리는 색은 없어요.”

그야 그렇겠지. 옷에 아무리 똥색을 발라 놔 봐야 네 얼굴이 이기지 한낱 옷이 이기겠니. 그런 당연한 생각을 하다가 밖으로만 안 내뱉을 뿐 내가 제현보다 더한 주접을 매일 쏟아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약간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근거가 명확하기라도 하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어, 아니야……. 근데 너는 부모님이 프로게이머 하는 거 반대는 안 하셨어?”

“별로 원하던 길은 아니셨을 텐데 저희 삼 남매가 원래 고집이 세서 그러려니 하시나 봐요. 그런데 형은 만약에 아들 있으면 프로게이머 시키실 거예요?”

“무슨 아들이야.”

“그냥 있다고 쳐 봐요.”

“안 시키지.”

창밖으로 아파트 화단의 나무가 잎을 무성하게 틔운 것을 구경하며 무심하게 말했다. 경기력에 따라 지옥 불에 태우다가 냉동실에 얼리는 일을 반복하는 프로게이머의 세계는 철천지원수라도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았다.

“나랑 1:1해서 이기면 시키고.”

“그 조건이면 이 나라에 데뷔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될 것 같은데. 저는 만약에 아들 있으면…….”

“배우.”

“예?”

“배우 시켜. 아이돌도 좋고.”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말했다. 아마 나에게 제현이 같은 아들이 있었다면 태어나자마자 연예 기획사를 돌며 극성 부모처럼 굴었을 것 같았다.

신호대기 중에 뚱한 얼굴로 나를 보던 제현이 백미러로 자기 얼굴을 살피더니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를 손으로 빗었다.

“형은 제 얼굴만 좋아해요?”

“차라리 싫어하는 부분을 말하게 해. 그게 빠르니까.”

또 시작이네 싶어 한숨과 함께 한 답변이 마음에 들었는지 핸들에 턱을 올리며 킥킥 웃었다. 마우스 고장으로 한껏 불안하던 기분이 안심하고 나니 잠깐 기분전환 삼아 드라이브라도 나온 것처럼 좋아졌다.

나른한 기분에 기대어 졸고 있으니 제현이 내가 추울까 봐 걱정이라도 하는지 에어컨을 줄이는 소리가 들렸다.

***

- 한국 나이츠 리그 KKL 서머 결승전에 오신 여러분들 환영합니다!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던 서머 시즌이 아니었나 싶은데요. 오늘 결승전을 빛낼 두 팀을 소개하겠습니다.

“입장 들어갑니다. 준비해 주세요.”

처음 밟아 보는 결승전 무대다 보니 입장 전부터 손에 땀이 다 찼다. 리허설 때 몇 번이나 확인한 동선이지만 머리가 새하얘졌다.

KKL 정규 리그를 진행하는 나이츠 경기장보다 두 배 이상 컸고 관객도 훨씬 많아서 입장하다 공황발작이라도 터지면 어쩌나 숨을 몰아쉬는데 제현이 슬쩍 내 팔을 잡았다.

“저만 보세요. 저 바로 옆에 있으니까.”

잡힌 팔에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에 굳은 몸이 살짝 풀어졌다.

- 창단 이래 최저 성적도 3위 최고 성적도 3위! 꾸준히 상위 팀에 있었지만, 결승전을 이제야 밟습니다! 2라운드 단독 1위의 자리를 놓치지 않으며 역대급 경기력으로 우승 트로피에 최초로 도전하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5, 4, 3, 2, 1.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입장해 주세요.”

열 맞춰 입장해 미리 지정해 둔 자리에 섰다.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 결승전에서 기다리는 동안 치열한 플레이오프 경기 끝에 5회 연속 결승전에 성공하며 5회 연속 우승이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에 도전합니다! KKL의 굳건한 기둥 같은 팀이죠. 한 번 강팀은 영원한 강팀, 디펜딩 챔피언 KJ 스노우!!!!

굳어 있는 우리와는 달리 한결 밝은 얼굴로 KJ 스노우 선수들이 입장해 맞은 편에 섰다.

월드 시리즈 진출 티켓이 걸린 경기다 보니 뒤에서 화려하게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조명이 요란하게 빛내다 꺼졌다. 무대 중앙에 자리 잡은 금색의 월계관이 둘려져 있는 은색 우승 트로피에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저거 한번은 들어 보고 은퇴하려고 여태껏 버텨 온 것 같았다.

퇴장 사인에 열 맞춰 빠르게 경기장을 빠져나오는데 대형 스크린에 결승전 오프닝 영상이 나왔다. 제현은 퇴장하는 길에 나를 보호하는 경호원처럼 바짝 붙으면서도 화면을 연신 쳐다보았다.

“이번 오프닝 꼭 저장해야겠어요. 너무 멋있다.”

이번 결승전 오프닝 콘셉트는 청량이었다. 여태까지는 웅장하고 시커먼 분위기로 많이들 찍었는데 밝은 느낌이라 새로웠다.

푹푹 찌는 날씨에 밖에서 쨍쨍한 햇빛을 맞으며 찍느라 촬영 막바지에는 다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들 같았는데 편집된 영상에서는 상큼한 느낌이었다.

중간에 제현이 우산을 쓰면서 클로즈업되는 장면에서는 넋을 놓고 보고 있었다. 계속 돌려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래서 팬들이 그렇게 제발 우승 안 해도 좋으니 결승전 문턱만 좀 넘어 달라고 울었나 보다.

“자, 본경기 들어가기 전에 같이 구호 한 번 외치자.”

감독님이 코치님과 우리를 동그랗게 서게 했다.

“자, 손 모으고. 다들 이번 시즌 정말 고생 많았고 조금만 더 고생하자. 이번엔 진짜 다르다는 말 더 이상 하지 말자. 우리 할 수 있잖아.”

다들 긴장해 땀으로 흥건한 손을 바지에 문질러 슥슥 닦고서 하나로 모았다.

“최강 삼각, 트라이앵글! 파이팅!”

“빠이테엥!!!”

다들 괴성 같은 기합 소리를 한 번씩 지르며 긴장감을 떨쳐 냈다.

- 자, 이제 이번 서머 시즌 결승전 주요 관전 포인트를 알아볼까요!

- 네! 사상 최초로 우승을 노리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5회 연속 우승에 도전하는 KJ 스노우입니다. 천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지난 전적은 KJ가 앞서고 있지만 최근 전적은 트릭스 게이밍이 우세합니다!

- 특히 트릭스 게이밍의 조커 선수 영입 이후로는 더 이상 천적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죠!

- 맞습니다. 조커 선수는 올해 데뷔한 신인 선수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경기력을 선보이며 KKL 대표 스타 플레이어로 자리 잡은 대단한 선수입니다.

- 아, 그리고 트릭스 게이밍하면 역시 이 선수죠. 도대체 이 선수의 커리어에 왜 우승이 없는지 의아한 팬분들이 많은 걸로 압니다. 모든 버퍼의 첫사랑! 체크 메이트 선수입니다!

- 국내외를 막론하고 세계 최고의 버퍼를 데리고 우승을 못 해? 아, 잠깐만 이번에는 진짜 다르다!! 이번에는 우승해 볼게!!!

- 그리고 디펜딩 챔피언! 지난 시즌에 4회 연속 우승에 성공한 KJ 스노우입니다.

- 트릭스 게이밍에 체크 메이트가 있다면 KJ 스노우에는 판타가 있다!!! 캐리력 하나만큼은 세계 최고의 딜러라고 평가받는 판타 선수입니다.

- 두 팀 모두 경기력이 아주 탄탄한 팀이지만 성향은 매우 다른 느낌인데요.

- 네, 맞습니다. 트릭스 게이밍은 최신 메타인 투 딜 메타의 유행을 선도하며 조금 더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반면에 왕조를 세우고 있는 KJ 스노우의 경우 안정, 또 안정! 전통적인 딜러 중앙 집권 체제로 실수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고 별일이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면 게임이 기울고 있는 빈틈없는 운영으로 유명하죠!

- 과연 트릭스 게이밍은 2라운드에서 보여준 것과 같이 KJ 스노우의 견고한 성문을 부수고 이번 서머 시즌 결승전에서 승리해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을지! 아니면 KJ의 5연속 KKL 우승 신화가 기록될지!!

- 아, 정말 제 심장이 다 떨리는데 빨리 경기 보고 싶습니다.

- 이번 결승 역대급 경기 기대하면서 준비됐나요!!! 갑시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KJ 스노우의 서머 시즌 결승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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