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제현이 눈을 연신 깜빡이며 내 반응을 살폈다.
“조금만 원한다면야. 조금만 좋아해 줘야지.”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중간에 끼어 있던 영화가 양쪽을 번갈아 보았다.
“진짜 형들 보면 무슨 연애라도 하는 사람들 같다니까요.”
“연애라니 우린 부부인데.”
뜨끔하고 있는 찰나에 제현이 한술 더 뜨는 대답을 하더니 내 어깨에 머리를 비벼 댔다. 그 말을 듣던 영화가 천진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찬희 형, 오늘 저랑 외도하실래요? 이따 연습 경기 끝나고 저랑 랭킹전 어때요. 제 랭킹이 더 낮아서 제현이 형이랑 하는 것보다 매칭 잘될 텐데.”
“너는 내가 있는데도 그런 말을 잘도 한다?”
“솔직히 저 포함해서 체크 메이트랑 게임 좀 해 보고 싶은 딜러가 얼마나 많은데 맨날 형이랑 2인 랭킹전만 돌리잖아요. 체크 메이트를 독점하려 하다니. 욕심이 너무 많아요.”
“억울하면 랭킹부터 올리고 다시 와.”
“저 그래도 많이 올렸거든요. 더 열심히 했다간 저랑 주전 경쟁하시게 될 텐데 괜찮으세요?”
“나는 괜찮지. 근데 그냥 스퀘어 메인 딜러에 있는 게 너한테 더 좋을 것 같은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고, 게임은 해 봐야 알죠?”
제현이 흉흉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도 영화는 말 한마디를 지지 않고 웃으며 뱉었다. 원래 툭 치면 울 것 같고 마냥 순둥한 말랑 햄스터 같은 애였는데 딜러 자리가 얘를 이렇게 강인하게 만든 건지 원래 이런 성격이었는데 못 봤던 건지 궁금했다.
“영화야, 기 세다는 말 들은 적 없어?”
“에이, 제가요? 형, 저 버퍼 출신이에요.”
다시 약간 두부 같은 이미지로 돌아오자 내가 알던 영화 같았다. 제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영화와 내 사이로 파고들었다. 한참 작은 영화가 속절없이 밀렸다.
“아, 정말 알았어요. 그만 탐낼게요. 진짜 뭘 먹고 저렇게 컸는지.”
“네 키 먹고.”
“저 아직 성장기인데요.”
“응, 파이팅. 나는 중학교 때 이미 180이 넘었지만.”
제현의 말에 영화는 여전히 방싯방싯 웃고 있는데 앞서 걷고 있던 준이 크리티컬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가슴을 쥐고 쓰러졌다.
“야, 그런 소리 나 없을 때 좀 하면 안 돼?”
“아, 미안. 들릴 줄 몰랐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평범한 평균 키다 보니 제현을 보다 보면 그래도 역시 큰 게 좋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키에 대해 별생각은 없었다.
“기왕이면 큰 게 좋긴 하지.”
“찬희 형마저 날 버렸다. 자기도 큰 편은 아니면서…….”
“그래도 찬희 형이 너보단 10cm는 더 크지.”
“맞아요. 준이 형이 저랑 비슷하고, 제가 162니까 형은 한 172?”
영화가 손으로 얼추 차이를 재더니 되물었다.
“비슷해. 175.”
“와, 생각보다 크시네요.”
“옆에 제현이가 있어서 작아 보이는 거지, 평범해.”
“저랑 합 맞추시면 작아 보이는 일은 없으실 텐데.”
“박영화, 틈새 영업 그만.”
“넵.”
“너 은근히 손 많이 가는 타입이구나.”
제현이 영화의 뒷덜미를 잡아채더니 질질 끌고 앞서 걸었다.
***
트릭스 게이밍 스퀘어의 경우 아쉽게 3:2로 결승전에서 패배해 KKCL 준우승을 기록했다.
시즌이 끝났는데도 우리의 결승전을 위해 연습 경기를 자주 해 주는 스퀘어 팀원들이었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첫 결승전 무대에 다들 긴장감은 서려 있었지만 컨디션은 어느 때보다 좋았다. 경기장이 일산에 있어서 근처 호텔에서 자고 바로 경기장으로 가기로 했다.
이동하기 전에 장비를 체크하는데 어쩐지 내 인생답지 않게 요즘 모든 일이 순탄하다 했다. 하필 이럴 때 마우스가 고장이라니.
에임이 중간에 잠깐씩이지만 이리저리 튀어 도저히 게임을 할 수 없었다. 예비용으로 받아 둔 마우스를 급하게 가져와 뜯었는데 재수가 없으려니 이건 또 초기 불량인지 먹통이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차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감독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 찬희야. 어디 안 좋아?
“저 말고 마우스가요.”
- 아이고, 어쩔 수 없네. 예비용으로 있는…….
“그거도 고장인 것 같아요.”
- …….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감독님이 눈앞에 있다면 얼굴이 나만큼이나 창백해져 있었을 것 같았다.
나는 내 장비들이 아니면 게임에 집중력이 흐트러져 동진이 우스갯소리로 장비 발을 탄다고 놀려 먹는 사람이었다. 이미 단종된 모델의 마우스를 바스러지기 직전까지 부품교체와 수리를 통해 좀비 상태로 쓰고 있었다. 그것을 안쓰럽게 본 트릭스 게이밍이 나만을 위해 수제로 제작해 준 마우스에 정붙이며 잘 사용하고 있었는데 하필 결승전 바로 전날 고장이 다 났다.
- ……트릭스 게이밍 쪽에 전화해 보고 연락해 줄게.
“네, 감사합니다.”
나라 잃은 사람처럼 의자에 힘없이 앉아 탈곡된 영혼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곧바로 감독님께 전화가 왔다. 빠르게 온 것을 보면 희소식이리라…….
- 찬희야, 그거 제작하는데 2주는 걸린다는데? 그, 비슷한 건 안 통했었지……?
“…….”
이번엔 내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너무 안일하고 낙천적인 생각을 했던 것일까.
어쩐지 요즘 운수가 좋다 했다. 산산조각이 나다 못해 흩어진 영혼들을 이제는 그러려니 떠나보내고 있었다. 이게 다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는데 장인 정신도 없이 도구를 가리는 능력 부족 인간의 말로가 아니겠는가.
“왜 그러고 있어요?”
나를 연습실에 주차해 놓고 운동하고 돌아온 제현이었다. 상큼한 얼굴을 봐도 가라앉은 기분은 좀처럼 떠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우스 고장 났어.”
“그거 아니면 못 쓴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자 제현이 미간을 좁히며 생각에 빠졌다.
“형, 전에 이 모델 쓰셨다고 하셨죠?”
“응. 나 그거 주려고?”
“저건 제거죠. 저는 저거 아니면 컨트롤 제정신 아닌데요.”
“그렇지…….”
나야 컨트롤에는 문제가 거의 없고 심리적인 문제로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신경이 예민해지는 정도였지만 제현이는 그 정도가 아니라 그냥 티어가 두 단계쯤 강등당한 것처럼 실력이 너프되는 편이라 나보다 더 심했다.
“저도 저번에 한 번 망가져서 이게 예비용이에요. 본가에 새 제품 많이 있는데 같이 다녀올까요.”
“응.”
0.1초 만에 대답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달려가 제현의 가슴에 얼굴을 박치기했다.
“오늘따라 표현이 격하시네요. 귀엽게.”
제현의 본가는 수원에 있어서 회사 차를 빌려 가기로 했다. 차에 타자마자 제현이 자기 볼을 두 번 톡톡 두들겼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보고 있자 제현이 다시 볼을 톡톡 두드렸다.
“택시 요금 주셔야죠.”
“깜찍하게 구네.”
“제가 아무리 용써 봐야 기뻐서 몸통 박치기하는 형만 할까요.”
면허를 딴 적은 없었지만 운전하는 게 고생이라는 건 상식이었다. 서울에서 수원까지 왕복으로 뽀뽀 두 번이면 남는 장사였다. 기꺼이 안전벨트를 풀고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려는 순간 제현이 고개를 돌렸다. 직전에 멈추어서 닿을락 말락 한 위치에 제현의 입술이 느껴졌다.
“반응 속도 좋으신데요.”
웃으며 내 얼굴을 훑듯이 보는 제현의 시선이 야했다. 가까스로 닿지 않는 거리를 유지한 채 고개를 틀자 당장 맞부딪히는 게 오히려 덜 선정적일 것처럼 느껴졌다.
제현의 손이 내 얼굴을 잡아채 돌리더니 내 볼에 도장이라도 찍듯 길게 입 맞추고 잠깐 떨어졌다가 짧게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개수작이 안 통한 건 아쉽지만, 요금은 받아 낼 거예요. 제가 방금 완벽한 예시를 보여 드렸으니 후불로 꼭 좀 부탁드립니다.”
몸을 내 쪽으로 푹 숙여 안전벨트를 매주면서 영업사원처럼 멘트를 쳤다.
“그런데 집에 이렇게 갑자기 막 가도 돼?”
“음, 별로 상관없겠지만, 전화는 해 볼게요.”
차에 시동을 걸며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네, 아버지. 잠깐 집에 들리려는데 집에 누구 있나요?”
- 아무도 없지. 내일이 결승전인데 집에 오는 거냐?
“급하게 필요한 게 있어서요.”
- 그래.
“내일 오시죠?”
- 가야지.
“그럼 내일 뵈어요.”
둘이 인상도 비슷하더니 목소리도 많이 닮아서 누가 들어도 가족 같았다.
“너는 아버님이랑 많이 닮은 거 같아.”
“그런 소리 많이 들어요. 누나랑 셋이 있으면 아버지 혼자 낳은 거 아니냐는 소리도 자주 듣고. 멀미하기 전에 좀 주무세요. 도착하면 깨워 드릴게요.”
“한 시간 정도 거리에 무슨 멀미야.”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지만 10분도 채 되지 않아 속이 울렁거려 강제로 취침했다.
제현의 집에는 처음 오는 거라 들어설 때 긴장했는데 문을 열자 들어선 집의 풍경은 누가 봐도 온화한 분위기의 가정집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저밖에 없는데 무슨 실례예요. 어디 보자, 제 방에 있을 텐데. 어?”
거실 한쪽에 기다란 인영이 보였다.
“형이 왜 여기 있어?”
“너 내일 결승전이라며. 보러 왔지.”
키는 제현이만 했는데 하얗고 곱상한 인상의 남자가 다가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제현이 형, 황제영입니다. 저도 제현이처럼 체크 메이트 팬이에요.”
해사한 웃음에 압도되어 고개만 꾸벅이며 손을 맞잡자 여려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빠르고 힘차게 악수하고 놓아주었다. 손이 다 얼얼했다.
“근데 우리 챙길 거만 챙기고 갈 거야.”
“아쉽네. 그래도 사인해 줄 시간은 있죠? 야, 제현아 나 사인받게 티셔츠 하나만.”
“안 돼.”
“아, 많잖아. 하나만 줘.”
“안 된다고.”
그러고 보니 다음에 본가에 가서 티셔츠를 가져오면 사인해 준다고 했는데 바빠서 둘 다 깜빡하고 있었다.
‘그런데 많다고……?’
제현의 방에 들어서자 무채색의 깔끔하고 정돈된 방 한구석에 노란 기운이 풀풀 풍기는 진열장이 있었다.
“와…….”
시즌과 연도별로 구분된 트라이앵글 팀 굿즈가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데뷔 때부터 나온 공식 굿즈는 다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너 진짜 내 팬이구나……. 이건 나도 이제 없는 건데.”
연차가 차니 초기 유니폼들은 어디서 잃어버리거나 버려서 더 이상 없었는데 새 옷으로 보관된 것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제현이가 짠돌이라서 돈 잘 안 쓰거든요. 체크 메이트 굿즈에는 펑펑 쓰더라고요. 이거 보이세요? 이 체스판 굿즈숍에서 300개 한정으로 팔았던 건데 취소물량 구하겠다고 3일 동안 컴퓨터 붙잡고 잠을 안 잤다니까요.”
“아, 형 부끄러우니까 나가.”
“너 오랜만에 보는 형한테 너무 박한 거 아니냐.”
“내일도 볼 거잖아.”
“알았어. 사인받을 거 찾아올 테니까 가시면 안 돼요.”
꾸벅 인사를 하고 제현이 마우스를 찾는 동안 진열장 구경 삼매경에 돌입했다. 체크 메이트 1000킬 달성 기념으로 판매되었던 한정판 체스판도 있었다. 화이트와 골드로 이루어져 예쁘기는 했지만, 가격 바가지가 심하다고 욕을 꽤 많이 먹은 건데 이걸 다 갖고 있네. 웃으며 돌아보다 구석에 너무 익숙한 것이 보였다.
“어…….”
내 사인이 들어가 있는 마우스였다.
“혹시 모르니까 세 개 정도 챙겼어요. 이제 가요.”
“이거.”
지운이 선물해 줬던 마우스였는데 이 모델을 처음 사용했던 게 이 마우스였다. 무척 애지중지하던 건데 어쩌다 이벤트 경품으로 넘겨져 어쩔 수 없이 빼앗긴 비운의 마우스였다.
“아 그거 제가 탄 건 아니고 친구한테서 강탈해 온 거예요. 반가우시죠?”
“나 이거.”
“예?”
“이걸로 하고 싶어.”
내 간절한 눈빛을 보던 제현이 서랍을 뒤적여 진열장 열쇠를 찾더니 꺼내서 내게 안겨 주었다.
“곱게 쓰고 바로 반납할게.”
“원래 형 거잖아요. 반납 안 하셔도 돼요.”
“어떻게 그래.”
경매장에 내놓는다면 꽤 짭짤하게 팔릴 것이었다.
“제가 형 건데 제 것도 형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