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더 원하는 게 있긴 한데 지금 형 상태로는 무리 같아서요.”
“그래. 그건 나중에 들어줄 테니까 달아 둬. 뭐 해, 입술 이리 내.”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된다고 허락이라도 받은 어린아이처럼 기쁜 얼굴을 감추지 못하던 제현이 얼굴을 붉히며 다가와 입술을 겹쳤다.
자연스럽게 열린 입 안으로 부드럽게 혀가 들어왔고 사탕을 빨 듯 쪽쪽거리며 빨았다. 제현이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다가 내 위로 올라탔다.
“무거워.”
“그럼 형이 제 위로 오세요.”
나를 끌어안고 뒹굴자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제현의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은근슬쩍 제현의 가슴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심신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었다.
“기분 좀 나아졌어요?”
“응.”
네 가슴 하나면 내가 뭔들 안 풀리겠니. 감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
“그래서 정액이 아니었다고?”
“그냥 비슷하게 만든 거래요. 범인은 자기는 그런 거 넣은 적 없고 꽃가루 넣었다면서 헛소리하고 있다던데요. 벌금형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는 건 좀 짜증 나요.”
“어떻게 그러냐. 미친…….”
“뭐, 어쩌겠어요. 회사에서 알아서 해 준다고 했으니 최선을 다해 달라고 하고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요.”
동진이 답답한지 오만상을 하며 주먹을 위협적으로 허공에 흔들었다. 그래도 트릭스 게이밍 측에서 신속하게 후속 처리에 들어갔고 스피릿 게임즈와 E-스포츠 협회에도 호소해 해당 사건에 대한 위로와 선수 보호를 위한 노력에 더 힘쓰겠다는 말도 받아 냈다.
옆 동네 FPS 리그에서는 경기력을 망치기 위해 조공 음료에 설사약을 넣은 사건도 있었다는 일이 화제가 되자 앞으로 팬들에게서 선물 및 조공을 받지 않겠다고 공언한 팀들도 나왔다. 제현은 뉴스 인터뷰에 불려 나갔고 9시 뉴스에 KKL이 나오며 아주 리그가 난리였다.
모두가 제현을 걱정했는데 제현은 자기가 국내 유일 공중파 데뷔 딜러라며 농을 던졌다. 나라면 평생 트라우마처럼 인간 불신에 시달릴 일을 참 가볍게도 털어 내는 모습에 그저 대단한 정신력이라고밖에는 말을 못 하겠고 조금은 존경스러웠다.
“한국에서 프로 하기 빡빡하네. 이러니 성환이도 중국 가고, 진형이 형도 미국으로 튀었구먼. 야, 제현아. 너 성환이랑 동창이랬잖아. 걔 잘 지낸대?”
“간 지 얼마나 됐다고 요즘 중국어 유창하게 하던데.”
“근데 걔는 요즘도 한국에서 심심하면 욕먹더라. 너는 그렇게 욕 안 먹는데 이상하다.”
“내가 먹을 것까지 걔가 욕받이 한 거지 뭐. 나는 2대 욕받이잖아. 원래 1대가 가장 주목받기도 하고 우리 성적도 성환이 있을 때보다 좋은 편이고.”
“내가 보기엔 성적보단 얼굴빨이다. 부모님께 감사해라.”
“아, 감사하지. 매일 하지.”
확실히 제현은 빠르게 팬덤이 늘었고 성적도 좋아서 가끔 판단이 너무 과격해서 던진다는 평을 받기는 해도 대체로 유했다. 얼굴 때문인가, 하기에는 진형도 제현만큼 욕을 안 먹지는 않았다.
역시 사주팔자라는 게 있는 걸까. 제현은 인생이 순탄하고 레드카펫이 저절로 깔리는 사주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궁금해져 사주 사이트를 열고 슬쩍 물었다.
“너 생일이 4월 30일 이랬지?”
“네. 황소자리, RH+ O형, 187cm, 위로 형 하나, 누나 하나, 2남 1녀 중 막내고요 MBTI는 ENTJ예요. 뭐 다른 궁금하신 점이라도?”
“너 혹시 대사 준비하고 다녀?”
내 질문 하나에 자신의 개인 정보를 줄줄 읊는 제현에게 놀라 사주를 검색해 보려던 생각도 사라졌다.
“형이 한 번쯤은 물어봐 줄 거라고 믿고 있었죠.”
애교스러운 말투로 말하며 내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원래도 치대는 녀석이었는데 요새 아양이 더 늘었다. 틈만 나면 나와 붙어 있으려고 작정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 준이도 처음에는 왜 저러는지 이해 못 하겠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다가 요즘에는 그러려니 했다.
“야, 너 그러다 찬희 형 부러져.”
“괜찮아. 힘주고 있어. 형, 저 무거워요?”
“아니.”
거의 스쿼트를 하듯이 엉덩이를 대고만 있는 거라서 무게감이 거의 안 느껴졌다. 마음 같아서는 나를 번쩍번쩍 드는 제현처럼 안아 들고 비행기라도 태워 주고 싶지만,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일방적으로 깔리는 거야 항시 가능했지만.
“그냥 편하게 앉아.”
“진짜 부러져요. 형 발목이 제 손목만 한 거 아세요?”
“그건 과장이 좀 심하지.”
제현이 바닥에 주저앉아서 내 바짓단을 접어 올리고 다리를 잡아들더니 보란 듯이 자기 손목을 옆에 대주었다. 너무 근소한 차이여서 네 말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다. 깁스하고 나서 다리가 전체적으로 근육이 다 빠져 더 가늘어진 탓도 있었다.
“야, 제현아. 너무 놀리지 마. 그러다 찬희한테 맞으면 큰일 난다.”
“맞아 보셨어요?”
제현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동진을 쳐다봤다.
“나는 안 맞아봤는데 지운이 형이 어렸을 때 찬희한테 한 대 맞고 뻗었다더라. 쟤가 저래 보여도 중학교 때 방배동에서 주먹으로 날렸다고 그랬어.”
“그 형이 과장하는 거라니까요.”
중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가 제대로 와서 지운을 피해 다닌 적이 있었다. 하도 귀찮게 하기에 뿌리친다는 게 주먹이 잘못 들어가 얼굴을 쳐버린 적이 있었는데 지운의 입술이 찢어져서 피까지 봤었다. 그 뒤로 계속 방배동 주먹왕이니 뭐니 하면서 놀렸다.
“와, 부럽다. 저도 찬희 형 진심 펀치 맞아 보고 싶어요.”
“넌, 넌 진짜 제정신이 아니야.”
발로 제현의 어깨를 밀자 내 발목을 가볍게 잡고서 킥킥거리며 웃었다.
“주먹질해 달라니까 발길질해 주시네요. 이것도 좋죠.”
발목을 쓰다듬다가 종아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재활 운동 후에 받는 마사지와 꽤 비슷했다. 장난스러운 웃음은 어디로 갔는지 순식간에 진지해져서 내 다리에 온 집중을 다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놀라웠다.
“난 너처럼 노예근성 있는 딜러 처음 봐.”
선입견일지는 몰라도 대체로 딜러들은 천성이 나대기를 좋아하고 시끄럽고 일부는 성질이 고약했다. 나만 해도 딜러를 할 때면 내면의 짐승이 깨어난 것처럼 욕을 속사포로 뱉으며 짜증에 신경질로 둘둘 말린 인간쓰레기가 되는데 제현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초반에야 나와 부딪히면 서로 고집부린다고 목소리가 커졌지만, 지금은 내 말을 곧잘 들었다.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칭찬해 주는 것처럼 머리를 마구 헤집으며 쓰다듬는데 옆에서 준이 헛웃음을 흘렸다.
“노예근성이요? 황제현이? 이건 영화 말도 들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얘처럼 온순한 딜러가 어디 있다고.”
내 대답에 준과 동진이 칼군무처럼 동시에 의자에서 빙그르르 돌아 나와 제현을 보더니 의자를 밀어 다가왔다.
“찬희야. 충격받지 말고 들어. 제현이 은근히 성격 더러워.”
“예?”
“형한테만 저러는 거지 영화한테는 얄짤없어요. 게임 하면서 얼마나 눈치 주고 구박 주는지.”
“맞아, 맞아. 너 있고 없고에 따라 사람이 다른 편이라고.”
동진과 준의 말에 제현이 혀를 내밀며 ‘저는 모르는 일인데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굴렸다.
“너도 버퍼였으면서. 버퍼 심정 다 알면서 영화를 구박해?”
“형은 제 편이에요, 영화 편이에요?”
“나는 버퍼 편이지.”
“저 버퍼로 포지션 변경하러 갑니다. 감독님!!!”
“주전 경쟁 자신 있나 봐?”
“취소하겠습니다. 최강 삼각 트릭스 게이밍의 제3대 딜러로서 버퍼 및 모든 팀원과 함께 소통하고 서로 배려하며 최고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그런 딜러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선거 유세를 하는 사람처럼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하더니 일어나 왕족 퍼레이드라도 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며 연습실을 행진하는 제현이었다.
동진과 준이 박수와 함성을 보내며 제현의 해외 팬 애칭인 ‘King slayer!’를 연신 외쳐 주었다.
“장난 그만하고 연습하죠.”
“딜러는 킹잡이, 버퍼는 흥잡이…….”
더 놀고 싶은지 준이 웅얼거렸다.
“어차피 저녁에 스퀘어랑 연습 경기 있는데 좀 놀게 내버려 둬.”
“지금 동형이 제일 문제거든요? 딜탱 연습 진짜 안 하실 거예요?”
“하, 할게…….”
동진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져서 의자를 힘없이 질질 끌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성향이 완전 수비적인 탱커와 잘 맞아서 굳이 연습할 필요가 없다는 평이 대부분이었으나 지난 업데이트 이후로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는 딜탱이 버프를 많이 받았다. 거의 모든 탱커 포지션의 프로 선수들이 딜탱에 매달려 있었다.
동진은 뭘 시켜도 묵묵하게 하는 사람인데 딜탱만큼은 탐탁지 않은지 차일피일 연습을 미뤘다.
“혼자 하는 게 싫은 거면 제가 좀 도와드려요?”
“아니!!! 지금 할게!!!”
진심으로 도와주려고 꺼낸 말인데 무슨 협박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게임 클라이언트를 틀었다.
“1:1 하자는 것도 아닌데 너무하네.”
“저도 형을 정말 사랑하지만, 형이랑 1:1하면 약간 PTSD가 와요. 딱 괴로운 만큼 도움이 되니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없고.”
제현이 하는 말이 왜 저렇게 익숙하게 들리나 했더니 내가 밤마다 자주 생각하던 생각과 아주 유사했다.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사고방식도 닮아가는 걸까.
“너, 나 너무 좋아하지 마라.”
“갑자기요?”
“둘 중의 한 명은 정상이어야지. 날 닮아 가면 어떡해.”
그렇게 온화하기 그지없는 제현이 동진에게 ‘은근히 성격이 더럽다’라고 평가받은 이유가 내가 물들여서인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제가 형 닮는 게 싫으시면 형이 절 닮아 보시든가요.”
“음…….”
제현을 아무리 좋아해도 제현처럼 사는 것은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노력…… 해, 볼게…….”
“큽…… 표정 봐. 누가 도살장에라도 끌고 간대요?”
“새벽 운동에는 끌려갈 것 같아서.”
“안 그래요. 재활 운동도 가기 싫어서 버둥거리다 가는 사람한테 무슨 새벽 운동이에요. 저도 선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에요.”
“알아주니 다행이네. 저녁까지 2인 랭킹전이나 할까.”
“그래요.”
***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에 스퀘어 팀들과 만나 오랜만에 영화와 마주쳤다.
“찬희 형!”
“어, 오랜만.”
“형, 저희도 이번에 결승전 나가요.”
“응, 들었어. 잘했네.”
조그만 녀석이 옆에 붙어서 재잘거리니 없는 남동생이 생긴 것 같았다.
“딜러는 좀 어때.”
“역시 성향이랑 잘 맞아서 그런지 훨씬 재밌어요. 제현이 형이 시간이 날 때 가르쳐 주셔서 이번에 잘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제현이가?”
제현이를 보자 방긋 웃었다.
“제현이 형 버퍼도 진짜 잘하시더라고요. 제가 버퍼로 합 맞췄을 때 답답해하실 만도 했어요.”
“제현이가 너 괴롭혔어?”
“아니요? 그냥 좀 엄하셨죠?”
영화는 너무 착해서 말의 신빙성이 떨어졌지만, 저 정도의 반응이면 나처럼 개지랄을 떨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뭘 그렇게 궁금해하세요.”
“나도 성질 더러운 황제현 구경하고 싶은데.”
“절대 안 돼요. 제 못난 부분, 형만큼은 평생 모르게 할 거예요.”
내장 장기들마저도 완벽할 것 같은 놈이 저러니 꼭 한 번은 구경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 아닌가. 내가 제현보다 어렸다면 동생들 대하듯 좀 막 대하는 분위기라도 있었을 텐데 제현은 늘 손윗사람에게는 깍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좀 더 늦게 태어났어야 했던 것 같아.”
“간만에 둘이 생각이 좀 맞네요. 그거 제가 늘 생각하는 건데. 좋아하면 닮는다더니 역시 절 조금은 좋아하시나 봐요?”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