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속전속결의 트릭스 게이밍!!! 26분 37초, 단시간에 경기를 마무리 지으며 세트 스코어 2:0으로 승리합니다!
- 남은 경기를 모두 져도 1위 확정이라서 최초로 결승전 진출에 성공합니다!!!
- 결승전 문턱에서 아쉽게 쓰러졌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더 이상 없다!
[승리]
팀의 첫 결승 진출 확정이다 보니 무슨 우승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환호하며 얼싸안고 동진은 제현을 업고서 뛰어다녔다. 준은 괴성을 지르며 기뻐하다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눈물을 죽죽 뽑아냈다. 동진이 놀라서 업고 있던 제현이를 내려놓고 준이를 번쩍 안고 달래기 바빴다.
“조커 선수 MVP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경기 시간이 워낙 짧았던 데다가 제현이 극 초반부터 킬을 쓸어 담으며 활약해서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딜러 너프 빨리 더해야 해. 딜러 하나 잘 키우면 게임이 끝나. 이게 어떻게 게임이야.”
“준아, 우리가 이긴 건 알고 있는 거지?”
아까까지도 콧물을 훌쩍거리며 눈물을 닦던 준이 동진에게 안긴 채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불평했다.
“아쉽다. 단독 인터뷰 싫어요.”
“난 인터뷰 안 해서 좋아.”
어깨를 으쓱하며 제현을 인터뷰 스테이지에 보내고 옆에서 구경할 준비를 했다. 문은영 아나운서와 밝게 인사를 나눴다. 제현이 MVP를 하도 자주 받다 보니 서로 친해진 것 같았다. 팔다리가 길쭉한 선남선녀가 붙어 있으니 다들 지나가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와, 진짜 얼굴 합 죽인다.”
“잘 어울리긴 하네. 제현이가 좀 어리긴 해도.”
“형, 요즘 연상연하가 유행이라잖아요. 진짜 둘이 사귀면 대박이겠다.”
“7살 차이면 그래도 꽤 많이 나지.”
“에이 요즘 7살 차이면 괜찮죠. 저는 문은영 아나운서면 10살 넘게 차이가 나도 좋아요.”
“문은영 아나운서 키 170 넘던데.”
“…….”
나이 차이는 극복할 수 있지만, 키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나 보다. 쾌활하게 쉬지 않고 말하던 준이 입을 다물었다.
둘 다 건강미를 사람으로 만든 것 같이 생겨서 잘 어울리는 건 사실이었지만 제현의 연애 대상은 여자가 아니니 불안해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잘생긴 남자 아나운서였다면 걱정을 좀 했을까.
“네, KKL 서머 시즌 정말 뜨겁게 2라운드를 달리고 있는데요. 안녕하세요, 문은영입니다! 오늘의 단독 MVP 조커 선수 모셔 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먼저, 결승 진출 확정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정말 빠르게 경기가 끝나서 역시 속전속결의 트릭스 게이밍이라고 극찬받기도 했는데요. 조커 선수의 엄청난 집중력이 돋보이는 경기들이었습니다. 1세트에서 유스 선수를 집요하게 쫓는 모습에 제가 다 숨이 막혔어요! 유독 한 사람을 집중해서 공략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현이 질문에 당황한 듯 마이크를 고쳐잡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제가 좀 그런 성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원래 좀 집요하신가요?”
“하하, 네. 아무도 못 말리는 편이에요.”
“하지만 체크 메이트 선수의 퇴각 핑이나 위험 핑이 찍히면 즉각적인 반응을 하시는 걸로도 유명하신데요.”
“아무도 못 말린다는 말은 취소해야겠네요.”
“체크 메이트 선수의 딜러 조련법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이 많아요. 채찍과 당근 중에 무엇을 더 많이 주는 편인가요?”
“음, 채찍도 저에겐 당근이라서 답변이 어렵네요.”
“하하, 그냥 다 좋으신 건가요?”
“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카메라 앞에서 무슨 주접을 떨고 있는 건지 내 얼굴이 다 달아올랐다. 먼저 차로 가 있으려고 하는데 동진에게 붙잡혔다.
“어디 가. 오늘 경기장 앞에서 팬 미팅하잖아.”
“아, 맞다.”
팬 미팅이라고 해 봤자 정식 팬 미팅은 아니었고 결승 진출 확정 축하 겸 짧은 인사 겸 사인회 자리였다. 인터뷰를 마친 제현이 뿌듯한 표정으로 스테이지를 내려와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너는 카메라 앞에서 그렇게 주접떨면 안 부끄러워?”
“제가 주접을 떨었어요? 형, 주접이 뭔지 제대로 알려 드려요?”
“내가 실언했다.”
하여간 무슨 말을 못 해요. 어깨에서 제현의 얼굴을 떨구고 스태프들의 안내를 받아 팬 미팅 장소로 이동했다.
“제현아, 오늘 진짜 멋있었어.”
“와, 감사해요.”
지난 시즌에도 몇 번 했던 팬 미팅이지만 쟤는 정말 아이돌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로 팬서비스가 완벽했다.
팬이 가져온 토끼 머리띠를 쓰고서 사인하는 제현을 보다가 마찬가지로 제현을 보고 있는 준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에 ‘형 마음 다 알아요’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 주고 앞을 보자 앞머리가 얼굴을 거의 가리고 있는 남자가 서서 쇼핑백을 건넸다.
“형, 저 이거 선물이에요.”
“감사합니다.”
쇼핑백을 건네 받아 들자 손이 덥석 붙잡혔다. 축축하고 어딘가 끈적한 기분에 몸이 굳었다.
“꼬, 꼭 혼자 열어 보세요.”
“네.”
손을 겨우 떼어 내고 사인하고 건네면서 다시 붙잡혔다. 어쩐지 순식간에 모든 게 불편해져 속이 좋지 않았다. 내 안색이 실시간으로 어두워지자 감독님이 급하게 마무리를 요청했다.
“형, 괜찮아요?”
“그냥 사람 많은 거 불편해서 그래.”
“잠깐만요.”
제현이 내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 중에 하나를 골라내더니 안에 들어 있는 상자를 빼내더니 살펴봤다.
“왜 그래?”
“아니, 좀 수상해서요.”
“수상할 게 뭐가 있어.”
제현이 상자를 흔들다가 여는 순간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제현의 얼굴에 희뿌연 액체가 튀었다. 아직 뒤에 남아 있던 팬들이 경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진심이 담긴 욕이 제현의 입에서 쏟아졌다. 급하게 소매로 닦아 주려는 나를 밀어내고 제현이 티셔츠를 벗더니 얼굴을 닦아 냈다.
“이 미친 새끼가 정액을…….”
상체 탈의한 상태로 이걸 건넨 사람을 찾아 족치려는지 두리번거리는 제현을 일단 붙잡았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에 감독님과 코치님도 달려왔다. 급하게 감독님이 마이를 벗어 제현의 벗은 몸을 가려주었다.
“앞머리 더벅머리 한 놈이에요.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 하얀 운동화요.”
제현이 감독님에게 상자를 건넸다. 안에는 상자를 열면 여는 쪽으로 액체가 분사되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분명히 정액을 맞은 것은 제현이었는데 내 속이 좋지 않아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비틀거리다 결국은 뒤로 넘어갔다.
[나이츠 KKL 게시판] 쳌메 정액 테러 사건
(사진)
오늘 팬 미팅에서 어떤 미친놈이 쳌메한테 정액 폭탄 테러했는데 조커가 대신 맞은 듯 ㅁㅊ
댓글 71개
ㅇㅇ : 어떤 정신 나간 새끼냐;
ㅅㅅ : 쳌메 팬들 중에 미친놈들 많다고는 들었는데 심하네
ㅈㅈ : 잡힘?
└ㅁㅁ : 오늘 벌어진 일이라 모름ㄷㄷ
ㅋㅋ : 뻘한 소리인데 조커 몸 존나 좋다
└ㅎㅎ : 222
ㅍㅍ : 아니 근데 왜 이걸 쳌메 정액 테러 사건이라고 부르는 거야? 쳌메가 정액 테러한 것 같잖아;
└ㅅㅅ : 그러니까; 애초에 선물 받은 건 쳌메지만 정액 얼굴에 맞은 건 조커잖아
└└ㅈㅈ : 그럼 조커 얼싸 사건?
└└└ ㅍㅍ : 말을 말자 ㅅㅂ 이 나라 미래 존나 어둡다 어두워
“이게 무슨 일이래. 우리 샴페인 따고 있어야 할 때인데 이게 무슨 난리야.”
“찬희야, 괜찮아?”
“제현이는요?”
“아까 경찰 와서 감독님이랑 같이 갔어. 물 마실래?”
그대로 차에 실려 와서 한참을 누워 있었는데도 아직도 어지러웠다. 동진이 건네준 물을 마시며 사람 하나쯤은 찢어 죽일 것같이 흉흉한 눈빛을 하고 있던 제현이 떠올랐다.
“경기장에 남은 팬들도 많아서 일이 좀 커졌어. 기사도 여러 개 나갔고. 범인은 잡았는데 그냥 장난이었다고 정액도 아니라고 박박 우기고 있다고 하더라.”
“게임 커뮤니티 실시간 인기 검색어 쳌메 정액이에요. 미친 거 아냐?”
“가지가지 한다.”
“근데 그거 진짜 정액이에요?”
“나도 모르지. 미친놈.”
점도나 형태를 봐서는 누가 봐도 정액이었다. 기사 사진들은 나와 제현의 프로필 사진으로 대체되어 있었지만, 커뮤니티에는 팬들이 찍은 상체 탈의한 상태의 제현이나 기절해서 동진에게 업혀 있는 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골이 아파 더는 못 보겠기에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자 아직도 성난 기운이 감도는 제현이 차로 들어왔다.
“어, 제현아. 좀 괜찮아?”
“네.”
씻고 왔는지 앞머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부터 찬찬히 살피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맨몸에 감독님 정장 마이만 걸친 채였다.
“어떻게 됐어?”
“모르겠어요.”
“때려도 합법 아니야?”
“합법이라고 해도 사람 때리면 징계 먹을걸.”
“동형, 진짜 이럴 때까지 바른말 하지 마세요. 누가 진짜 친다 그랬어요? 그 정도로 화가 난다는 거지.”
준과 동진이 투닥거리는 사이 제현이 내 손을 주물렀다. 제현의 온기가 얼음장 같은 손에 전해지자 좀 피가 도는 것 같았다.
***
제현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부터 대판 하더니 머리를 말릴 새도 없이 감독님에게 불려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동안 나는 지쳐서 침대에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이놈의 몸뚱이는 정신 상태보다도 연약했다.
제현이 아직도 축축한 머리를 새 수건으로 문대며 내 앞에 와 앉았다.
“좀 괜찮아요?”
“내 걱정할 때 아니지 않아?”
“저야 뭐 잠깐 불쾌하고 말 일인데. 형이 걱정이죠.”
“화 많이 났었잖아. 좀 괜찮아?”
“그거야 형이 당했을 생각 하니까 열 뻗쳐서 그랬죠. 다시 생각해도 좆같네.”
“어떻게 알았어?”
“옆에서 보다가 아무래도 찜찜해서 확인한 건데 하길 잘한 것 같아요.”
제현의 본능적인 감이란 마치 지진이 오기 전에 미리 알아차리는 동물 같았다.
“그냥 경고해 주면 되지 그걸 왜 직접 열어서 그 고생을 해.”
“형이 당했으면 아마 저도 화병 나서 같이 앓아누웠을걸요. 아니다, 그냥 쓰레기 하나 시원하게 치우고 징계든 콩밥이든 기쁜 마음으로 먹었을 것 같아요.”
오늘 이후로 모든 편지나 선물은 프런트 팀에서 확인 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했다.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인생이었다. 이런 나 때문에 제현이 치욕을 겪었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 머리를 쥐어뜯는 손을 제현이 저지했다.
“하, 진짜 속상해.”
“혹시 형 탓이라고 생각하는 거면 그러지 마세요.”
“내 탓이 맞잖아.”
“뭐 별일이라고 탓을 하세요. 저는 칼이라도 대신 맞아 드릴 수 있는데.”
“싫어. 칼 맞지 마.”
“알았어요. 그럴게요.”
칼을 맞고 안 맞는 것에 선택지라도 있는 것처럼 상큼하게 대답하는 제현의 모습을 보니 나라면 3박 4일도 앓아누웠을 일이 정말 제현에게는 잠깐 불쾌하고 말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면 나한테 기대도 돼. 이런 꼴이라서 믿음직하지 않다는 건 알아.”
침대에 누운 채 말하려니 내가 말하면서도 의지가 하나도 되지 않았다.
“그럼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해 봐.”
“키스해 주세요.”
제현이 순정만화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같이 화사하게 웃었다. 아까는 성난 짐승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 갭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얘는 어쩌자고 화난 모습까지 그렇게 섹시해서.
“겨우 그거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