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70화 (70/100)

70화.

“잠깐만. 아, 죽겠네.”

잡아주려는 손길도 매몰차게 쳐내고 쓰러지기 전에 의자에 앉았다. 이렇게까지 말이 많은 사람도 흥분하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지금 벌집이라도 건드린 것 같았다.

걱정스럽게 바라보자 눈을 감고 심호흡을 잠깐 하더니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았다.

“헛소리 그만하고 아까 원인 제공 그거 뭐야. 말해.”

“…….”

“그래, 오늘 내가 실려 나가는 꼴이 보고 싶은 거면 계속 입 다물고 있어.”

이젠 협박까지 통달해 버린 찬희였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정자세로 앉았다.

“형이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그 사람 불렀어요.”

“뭐? 내가?”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게임 중에?”

“아니요. 그, 하다가…….”

“내가 언제 뭘 하다가?”

세상 당혹스러운 얼굴로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니 죄책감이 물밀듯 쓸려왔다.

“제가요. 제가 자는 형한테 하다가…….”

입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시선을 피하다 그날의 열기가 담긴 눈으로 슬쩍 내려다보자 서서히 찬희의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벌떡 일어나더니 벽 끝에 붙어 섰다.

“너, 너는…… 자는 사람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게까지 거리를 둘 건 없잖아요. 저 상처받아요.”

비극의 주인공으로 빙의해 눈물을 닦는 발연기를 선보였다.

“도대체 언제?”

“그 향수 깨진 날이요.”

“뭘, 뭘 했는데?”

“이건 진짜 말 안 할래요.”

최대한 새침하게 말하고 몰래 옆눈으로 슬쩍 보니 신경이 꽤 쓰이는지 얼굴이 토마토같이 붉어져서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런 찬희를 보고 있자니 장난스러운 마음이 사라졌다.

“내, 내가……. 내가 형을?”

찬희는 아직 저 의문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거야 향수 때문이겠지. 다음날 편의점에서 사 온 양초를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방 안 가득 세워 놓고 음산하게 서 있는 나를 보던 찬희의 눈빛이 기억났다.

내가 욕심이 많은 편이라는 건 알았지만 찬희 한정으로는 까딱 잘못하면 선을 넘어도 과하게 넘는 사람이 될 것만 같다. 손안에 쥐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죄송해요. 제가 유치하게 굴었어요.”

“…….”

“저는 한 끗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떨어질 질투에 미친 놈이에요. 같잖은 자존심 세운다고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도 아직도 질투가 나요.”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찬희가 한숨을 푹 쉬더니 다가와 옆자리에 다시 앉았다.

“난 네가 질투하면 어리둥절한 기분이야.”

“왜요.”

“받아 본 적 없으니까. 해 본 적은 있어도 너처럼 하지는 않았고.”

“맞아요. 제가 비정상이에요.”

테이블에 머리를 가볍게 쿵쿵 박는데 찬희 손이 내 머리와 테이블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손에 머리를 대고 찬희를 보자 엷게 웃고 있었다.

“조금은 우쭐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형.”

“그렇다고 네 신경 일부러 건드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네 눈치 보는 거 성가셔.”

겨우 두 살 차이인데 어쩌면 저렇게 어른일까. 스무 살과 스물두 살에는 2년보다 긴 시간이 있는 것 같았다. 평생 따라잡지 못할 것 같아.

“저는 형이 왜 그렇게 좋을까요?”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무표정이 깨지며 작게 킥킥 웃는 모습을 그저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네가 왜 나를 좋아하는지 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궁금하더라. 얼굴이 잘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격이 좋길 하냐. 남들보다 잘난 건 게임 실력 하나인데.”

찬희도 테이블에 얼굴을 기대며 나를 마주 보았다.

“너 혹시 내가 게임 잘해서 좋아해? 폼 떨어지면 내다 버릴 거야?”

웃으며 말하고 있어서 농담인 것을 알아도 저 입에서 직접 나오니 심장이 철렁거렸다.

“제가 형을 어떻게 버려요. 형 은퇴하면 저도 은퇴할 거예요.”

동반 은퇴식을 치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았다. 찬희는 나이츠 버퍼의 메시아 같은 존재이니 성대하고 화려하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장식품처럼 찬희의 바로 옆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지. 상상만으로도 만족스러워 배부른 사람처럼 웃었다. 가볍게 이마를 맞부딪혔다. 찬희는 또 알 수 없이 의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

한차례 소동이 지나고서 숙소 분위기는 꽤 밝아졌다. 며칠간은 자중하듯 얌전하던 준도 시답잖은 장난을 툭툭 던졌다.

킬킬거리며 놀다가 새로운 패치 업데이트가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와 읽기 시작했다. 리그에는 플레이오프쯤에나 적용될 패치였지만 플레이오프 진출은 거의 확정이나 다름이 없으니 준비를 해 놓는 편이 좋았다.

딜러에게 집중된 주도권을 뺏기 위해 칼을 갈아 온 스피릿 게임즈가 이번에는 제대로 칼을 빼 들어 딜러들에게는 나쁜 소식들이 많아 각종 커뮤니티에 난리가 났다.

[나이츠 게시판] 이거 게임하라는 거임?

딜러 캐릭터 싹 다 전반적으로 너프시켰네;; PBE 서버에서 확인해 봤는데 딜 안 박힘ㅋㅋㅋㅋ 망겜 다 됐다

댓글 794개

ㅋㅋ : 그만큼 해쳐 드셨으면 이제 내려오세요 딜러놈들아

ㅇㅇ : 솔직히 나이츠 딜러 게임인 거 너무 심했잖아ㅋㅋ 딜러들 진짜 곱게 커서 징징대는 게 특이라니까 프로계에서도 트릭스 게이밍 제외하면 딜러 원맨팀만 수두룩함

ㅅㅅ : 나는 해 보니까 딜러 개쳐망해도 복구할 수 있어서 좋던데 뭔 망겜 이러고 있네

ㅈㅈ : 이번 패치는 딜탱이랑 다크힐러 밀어준 거 보니까 다음 패치는 100% 버퍼 버프일 듯?

└ㅍㅍ : 버퍼 그만 밀어;

└└ㄱㄱ : 언제 밀어 줬다고 그만 밀래

세상이 멸망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딜러 장례식이라고 영정사진까지 들고 오는 딜러 유저가 많았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큰 변화는 아니었다.

캐리력은 좀 줄겠지만 그렇다고 게임 메이커의 자리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도 아닌데 저 난리를 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덧붙이자면 버퍼와 힐러의 피지컬이 뛰어난 편인 우리 팀에게는 이번 패치가 대체로 희소식이었다. 옆을 보니 찬희도 공식 홈페이지 패치 업데이트 내용을 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요?”

“딜러도 너프고 버퍼도 간접 너프라고 봐야겠는데. 결승전 걱정돼서.”

“결승전 직행 티켓 이미 받으셨나 봐요?”

“왜. 오늘 못 이겨?”

다음 경기 상대인 엘리엇 엘리트 팀은 지난 시즌에는 준수한 실력을 보였으나 새로운 메타에 적응하지 못하고 하위권으로 추락한 팀이어서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다음 경기만 이기면 몇 개 남지 않은 남은 경기를 모두 져도 결승전 직행이니 다들 여유로웠다. 찬희는 여유를 즐기기보다는 미리 준비해 놔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나도 그런 편이지만 나의 상위 호환 버전이 찬희라고 해야 할까.

“일단 내일 엘리엇 전부터 이기고 생각해요. 벌써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응…….”

대답은 얌전히 해 놓고 골똘히 화면을 보는 찬희였다.

***

- 네, 서머 시즌 2라운드도 어느새 막바지로 향하고 있습니다. 슬슬 플레이오프 진출 당락이 결정되고 있는데요.

- 오늘 경기하는 트릭스 게이밍은 이번 경기에 승리하게 된다면 1등 확정으로 남은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결승전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 2라운드 내내 단독 1위 자리를 견고하게 지키며 지금까지의 모습과는 다른 이정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지난 스프링 시즌부터 정말 쉽게 예측하기 어려운 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반면 엘리엇 엘리트 팀은 사실상 플레이오프 진출은 힘들어졌는데요. 그래도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힘을 내 봐야겠습니다.

- 아, 이번 시즌 조금 아쉬운 부분이 많았는데요. 이번 시즌 딜러 ‘Youth’ 유스 선수의 부진이 팀에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 1, 2라운드 전부 한 끗 차이로 아쉽게 진 경기가 많았던 만큼 이번 경기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 네, 그렇죠. 트릭스 게이밍에게 결승전 직행 티켓을 쉽게 줄 수 없다는 각오로 고춧가루 팍팍 뿌려 줘야죠!

- 창단 이래 최초의 결승전 직행 진출이 쉬운 줄 아느냐!

- 하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엘리엇 엘리트의 첫 번째 경기 시작합니다!

“이번 판 빨리 끝내고 결승 가즈아!”

준이 힘차게 파이팅을 넣었다.

“딜러 요즘 멘탈 안 좋은 걸로 유명하니까 흔들어 볼까요.”

“황제현, 너 요즘 준이화 다 됐다. 딜러면서 딜러 괴롭히면 좋냐.”

“그거 욕이죠?”

“나처럼 됐다는 게 어떻게 욕이야? 너 이번 판 힐 없어.”

“미안. 근데 이번 판 찬희 형 힐 버프 있어서 필요 없을 듯?”

요즘 폼이 오를 대로 오른 녀석이라 피 관리를 잘하고 있어서 저 말이 맞기도 했다. 잔뜩 약이 오른 준이 공격적으로 적진으로 진입했다. 마주친 적 힐러에게 거의 화풀이하듯 스킬을 쏟아부었다.

“이번 퍼스트 킬 골드 내가 먹는다.”

“아기 딜러 제현이가 울고 있어요. 제현이 주세요.”

“너 진짜 진상이다.”

내 옆에 붙어 있던 제현이 황급히 준이 쪽으로 향했다. 준이가 거의 다 잡은 힐러를 깔끔하게 킬하고 골드를 넉넉하게 챙겨 온 제현이 낮게 웃었다.

“진짜 먹냐. 어휴 저 꼴값 왕자님.”

딜러가 워낙 게임 메이커 역할을 하다 보니 다른 팀원들이 어화둥둥 해 줘야 하는 분위기가 있어 왕자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제현은 아주 받아먹는 성격은 아니라서 왕자님 소리를 자주 듣지는 않았지만, 얼굴만큼은 그 별칭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 유스 선수의 데스가 이게 무슨 일입니까! 조커 선수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 아주 제대로 보여 주네요! 너 잘 걸렸다! 이리 와! 너는 뭐야!

- 괜히 도우러 왔다가 트리플 킬을 건네주고 게임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 아, 조커 선수에게 제대로 물린 유스 선수를 무정하게 버렸어야 했는데 판단이 아쉽네요.

- 트릭스 게이밍! 아주 무난하게 승리를 챙겨 가며 지난 시즌 3위에 그쳤던 설움을 서머 시즌에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 맞습니다! 사실 지난 시즌에도 체크 메이트 선수의 부상만 없었더라도 KKL 역사가 달라졌으리라는 소리가 많았거든요!

- 세트 스코어 1:0! 앞으로 한 경기만 이기면 트릭스 게이밍은 결승전으로 가게 됩니다!

“와, 이번 판 MVP 또 조커야? 너 MVP 랭킹 몇 위야?”

“1위.”

감탄하는 준이에게 제현이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따봉 포즈를 해 주자 부러움이 철철 넘치는 표정으로 보았다.

“찬희 형이 지금 3위야.”

“뭐야. MVP 랭킹 1, 3위가 다 우리 팀이었는데 왜 몰랐지.”

“당연하니까.”

요즘 축축 처진 모습만 보다가 아주 자신감이 가득 차서 자신만만한 제현이 보기 좋았다. 지난 시즌 1라운드 때만 해도 MVP 랭킹에 우르르 있었는데 2라운드 연패하면서 순위권에서 싹 사라졌었다.

그래도 제현이 3위인가로 마무리하며 너도 트라이앵글 3의 저주에서 무사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이번 시즌만큼은 지긋지긋한 3과의 악연을 끊어 주리라 다시금 다짐했다.

“다음 판 형이 MVP 되면 2위인데 하실 생각 없어요?”

“그게 내가 하고 싶다고 되는 거야?”

“형이 원하면 되죠?”

제현은 헛소리를 참 긍정적이고 믿음직스럽게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열심히는 해 볼게.”

“열심히 말고 잘하셔야죠.”

“어쭈?”

건방진 소리에 귀를 잡아당기자 제현이 과하게 아픈척하며 질질 끌려왔다.

“어디 더 건방지게 굴어 봐. 숙소 가서 네가 잘하나 내가 잘하나 1:1 해 볼래?”

“잘못했습니다.”

*본 회차는 범죄행위 등 비도덕적인 행동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 이용 시 참고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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