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답답한 심정에 버럭 소리를 지르자 찬희가 뭐라고 말하다 말고 바짝 굳더니 아까보다 차가워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닥쳐 달라고 한마디만 하면 되잖아. 왜 소리까지 지르고 그래.”
“형, 그런 게 아닌…….”
무심하게 담배를 재떨이에 지져 끄더니 문으로 향했다. 저대로 가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다급하게 팔을 붙잡으려는 순간 돌아선 찬희가 나를 벽에 밀어붙이고 얼굴을 바싹 붙였다. 당황해서 숨도 참은 채 겨우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네가 뭐에 그렇게 속이 상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계속 그렇게 말 안 하면 평생 모른다는 것만 알고 있어라.”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답답해서 기분이 많이 상했는지 말을 끝내자마자 흡연 구역을 성큼성큼 나섰다. 찬희가 흡연 구역을 나간 지 한참 후에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박력 대박이라니까…….”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전율에 떨었다.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지? 어떻게 저 사람을 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지?
이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멋대로 내가 한눈이라도 팔거나 다른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닐까 예측한 것은 참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늘 전전긍긍하며 질투해 대는 것은 내 몫이었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 수 있나?
우리는 항상 별일도 아닌 일로 싸우는데 보통 어느 한쪽이 입을 닫는 순간 싸움이 불 번지듯 커졌다. 이번에는 과실 9:1 정도로 내 탓이 컸지만 애초에 형이 형 소리만 안 했어도 없었을 싸움 아닌가.
조금은 억울했다. 그래도 내 잘못이 크긴 하니 납작 엎드리고 내가 먼저 입을 열어야겠거니 생각하며 연습실로 향했다.
“어, 그거 어쩌다 보니까 깨졌어. 몰라. 내가 깨 먹고 싶어서 깼겠어?”
문가에 서자 찬희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 또, 또 그렇게 성질내지?
“내가 통화하기 싫다고 했잖아.”
- 그럼 언제가 좋은데. 맨날 싫다고만 하잖아. 요즘 경기 성적도 좋으면서 왜 그렇게 짜증을 내.
“알았어. 미안해. 그냥 그럴 일이 좀 있어.”
- 약은?
“됐어. 그 정도는 아니야.”
- 내가 너 그렇게 신경질 부리다가 앓아눕는 거 본 적이 한두 번이야? 못 챙겨 주니까 알아서 챙겨 먹어.
“알았어. 끊어.”
- 응, 다음에 또 통화해.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저 눈치도 없는 놈은 꼭 이럴 때 전화를 걸어야 했나. 분명히 납작 엎드릴 기세로 왔는데 괜히 또 심통이 나서 말없이 자리에 가서 앉았다. 연습실은 평소 같지 않게 긴 침묵과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만 들렸다.
“방금 뭐예요?”
“뭐가.”
“왜 전화했대요?”
“그냥 안부 전화야.”
쌀쌀맞은 목소리에 저절로 풀이 죽었다. 사과하려던 다짐은 다 어디로 가고 모니터만 노려봤다.
찬희는 그런 나를 쳐다보다가 한숨을 푹 쉬더니 연습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렇지만 먼 타국 땅에 있는 사람에게 패배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자존심 상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키보드에 머리를 푹푹 박았다.
***
“황제현, 서찬희. 너희 이제 슬슬 화해하지 그래?”
“진짜 다음 판만 이기면 2라운드 1위 확정으로 최초 결승전 무대 밟는데 숙소 분위기 좆창났네 진짜. 저 형이랑 게임 못 해 먹겠다. 왜 맨날 시즌 중에 딜러랑 싸우냐.”
“씁, 김준.”
동진이 경고를 다 끝마치기도 전에 내가 준의 앞에 우뚝 섰다. 원래 준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말을 막 하는 성격인 것은 알고 있지만 유독 찬희에게 건방지게 구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신장이든 체격이든 차이가 큰 편이라 준이 자기도 모르게 겁이라도 먹었는지 뒷걸음질 쳤다.
“찬희 형한테 사과해.”
“야, 내가 뭐 못 할 말 했어? 나는 팩트만 말한 거야. 내가 사과를 왜 해야 하는데?”
“안 해?”
“안 하면 뭐 때리기라도 할 거야? 너 깡패 새끼야?”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와, 황제현 눈깔 봐. 쳐, 쳐 봐.”
분위기가 점점 더 험악해지자 동진이 나와 준 사이에 몸을 끼워 넣어 틈을 벌렸다. 항상 푸근한 인상이었던 동진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셋 다 상담실로 따라와.”
“왜 셋인데요. 저까지?”
“서찬희, 빠질 생각하지 말고 따라와.”
4인용 테이블과 의자 네 개가 전부인 작은 방은 상담실과 더불어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고도 불렸다. 멘탈이나 폼이 좋지 않거나, 커뮤니티 등에 논란이 생기거나, 이번처럼 싸웠다거나 할 때 불려 오는 곳이었다.
어떤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만 오는 곳이라는 소리였다. 먼저 앉은 찬희 옆자리에 습관처럼 앉으려는데 동진이 내 옷을 잡아채 질질 끌더니 찬희 맞은편에 앉히고 옆자리에 자기가 앉았다.
“김준, 앉아.”
“네.”
좁은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동진이 테이블을 손가락을 톡톡 두드렸다.
“성적 안 좋을 때도 우리 분위기만큼은 괜찮았잖아. 지금은 경기력도 좋고, 성적도 좋게 잘 나오고 있는데 왜 이 모양인지 나는 이해가 안 가.”
김준이 슬쩍 찬희를 보자 동진이 테이블을 가볍게 내려쳤다.
“김준, 너 내가 찬희한테 함부로 말하는 거 고치라고 몇 번 말했어. 찬희가 만만해? 나이가 몇 갠데 할 말, 못 할 말 못 가려?”
“죄송해요.”
“나한테 하지 말고 찬희한테 사과해.”
동진의 단호한 말투에 바짝 얼어 있던 김준이 대답을 미루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찬희 형이 원인 제공인 건 맞잖아요.”
“그렇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해도 돼?”
“안 되죠……. 죄송해요, 형.”
“…….”
눈을 내리깔고 사과하는 준을 가만히 보던 찬희가 고개를 끄덕이고 동진을 봤다.
“얘도 답답해서 그랬겠죠.”
“네가 그렇게 넘기니까 계속 저러는 거 아냐.”
“얘 말도 틀린 거 없어요. 내가 성환이랑 게임 할 때 숙소 분위기 조진 거 한두 번도 아니고.”
“그건 그거고 인마. 하……. 아무튼 김준, 너 한 번만 더 그래 봐. 내 선에서 정리 안 하고 감독님, 코치님들한테도 보고할 거니까.”
“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는데 동진이 내 등짝을 철썩 쳤다.
“황제현, 너도 준이한테 사과해.”
“제가 왜요?”
“준이가 건방지게 군 건 맞는데 네가 나설 일 아니었잖아.”
순간 열받아서 나섰지만 내가 가만히 있었으면 동진이 알아서 준에게 훈계를 주어서 끝났을 일이었다.
“미안해.”
“아냐, 나도 미안…….”
준이와 사과를 나누고 나자 4인분의 숨소리만 오가며 끔찍하게 어색한 기류만이 흘렀다. 선생님이 강제로 화해시키려 한 초등학생들같이 느껴졌다. 준도 나와 같은 심정인지 팔에 닭살이 오도독 돋아 있었다. 오직 동진만이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자, 그럼 제현이랑 찬희 저녁 먹을 때 데리러 올 테니까 둘이 여기서 대화 나눠.”
“네?”
“어차피 게임 쪽도 아닐 거고 뭐 너희 둘 사이의 일로 싸운 거 아냐? 둘이 붙어 앉아서 해결 봐. 연습 시간 줄여서 맨날 여기 가둬 두기 전에.”
연습 시간을 줄인다는 말에 찬희가 미간을 좁히며 조용히 항의했지만, 동진은 엄지손가락을 세우고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준을 데리고 상담실을 나갔다.
찬희와 둘만 남게 되자 손에 땀이 저절로 흘렀다. 마주 보고 앉아 있으려니 더 긴장되는 거 같아 일어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찬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스도쿠를 켰다. 시간이나 때우고 나가겠다는 무언의 시위 같았다. 옆 얼굴선이 보면 볼수록 오밀조밀하니 단정했다. 오히려 저 답답할 만큼 단정한 이미지가 사람을 더 미치게 만드는 감이 있었다.
턱까지 괴고 구경하는데 한 번을 이쪽을 안 보는 게 정말 집중했거나, 화가 났거나, 둘 다였다.
“형.”
“왜.”
내 쪽을 보지도 않고 툭 대답을 던지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나긴 한 것 같다.
“죄송해요.”
“뭐가.”
“준이랑 똑같이 굴었던 것 같아요. 형이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해서 제가 그렇게 굴면 안 됐어요.”
찬희의 표정이 와장창 구겨지더니 나를 쏘아보았다.
“내가 원인 제공을 해?”
“음, 그게 정확히는 제가 잘못을 한 건데, 전에 형이…….”
“내가?”
“그러니까…….”
붉어지는 내 표정에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찬희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당황한 나는 의자에 더 기댈 수 없을 만큼 파고들었다.
내가 뒤로 간 만큼 찬희가 얼굴을 들이밀어서 우리 사이의 거리는 내 생각처럼 멀어지지는 못했다. 내가 아무리 들이밀어도 피하기 바쁘던 사람이 이렇게 바짝 달라붙을 때면 어쩔 줄을 모르겠다.
띠링, 소리와 함께 찬희의 핸드폰에 1:1 메시지 알람이 떴다.
[MVP King : 향수 다시 사서 보내 줄까?]
정말 기막힌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저 자식 우리 숙소에 CCTV 달아 놓은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내 표정 변화를 지켜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메시지를 확인한 찬희가 한숨을 쉬었다. 나는 편하게 답장하라는 의미를 턱짓으로 알려 주고 팔짱을 끼고서 뭐라고 치는지 대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TGT Checkmate : 됐어]
[TGT Checkmate : 제현이가 또 가져오면 갖다 버린대]
[MVP King : 없어 보이니까 질투 그만하라고 해]
[TGT Checkmate : 아무튼 보내지 마]
[MVP King : 직접 만나서 줄게 너희 팀 이번에는 월드 시리즈 올 것 같으니까]
[TGT Checkmate : 자기는 월드 시리즈 진출 확정인 것처럼 말하네]
[MVP King : 우리는 2회 우승자라 2등만 해도 확정이라 다음 경기 이기면 확정이야]
[TGT Checkmate : 차단할게 ㅅㄱ]
주고받는 메시지를 보며 다리를 떨고 있으니 찬희가 내 허벅지를 콱 움켜쥐었다.
“다리 떨지 마. 복 떨어져.”
내가 다리를 그렇게 심하게 떨고 있는 줄도 몰랐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스럽다는 말을 그렇게 많이 듣고 자랐는데 다 쓸모없었다. 찬희 관련 일에서는 초등학생이라고 하기에도 면목이 없을 정도로 미취학 아동 미만의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권진형만 얽히면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분명히 뱉고 나면 후회할 거 뻔히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질문이 툭 던져졌다.
“형, 아직 저 형 좋아하죠.”
내가 ‘너 설마 다른 사람 만나냐?’ 질문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찬희가 나를 돌아보았다. 아, 내가 저런 표정을 하니까 얼굴 보고 아니라고 했구나.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아니…….”
“내가 전에 널 왜 거절했는데. 진형이 형을 완전히 비우든 담든 하려고 그 아까운 시간을 오로지 삽질하는 데 썼는데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한없이 차가워진 찬희의 말이 귀에 때려 박히는 것 같았다. 얻어맞는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얼어붙어 있는데 찬희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나 말을 이어 나갔다.
“생각해 보니 고백도 결국 내가 했잖아. 그런데 지금 내가 뭐? 너는 내가 그렇게 가벼운 인간으로 보이냐?”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넌 내 인간관계가 얼마나 삭막하고 좁은지부터 좀 알아야 해. 한 줌의 한 줌 같은 인간관계를 가진 나란 인간 곁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사람한테 매몰차게 대하는 게 쉬운 줄 알아?”
“…….”
“세월이고 정이라는 게 칼로 자른 것처럼 뚝뚝 잘리는 것도 아닌데 나름대로 매몰차게 굴고 구박까지 한 이유가 오직 네 자리 하나 깔끔하게 만들어 주려고 한 건데 지금 너는…… 너는 지금…….”
그동안 억눌린 심정이 얼마나 많았는지 비트만 깔면 랩 하나가 뚝딱 나올 정도로 빠르게 심정을 털어놓던 찬희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휘청거렸다.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