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67화 (67/100)

67화.

해가 떨어진 지도 오래였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습기 가득한 더운 공기가 훅 끼쳐 와 불쾌했다.

요즘 우리 숙소는 밖보다 더우면 더 더웠지, 별반 다를 바도 없었다. 입고 있던 저지를 벗으며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헐.”

오만상을 하고 있던 얼굴들이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휘둥그레한 얼굴로 바뀌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더위에 쫓겨 ATM에 피신했던 때처럼 냉랭한 공기가 전신을 감쌌다.

“고쳤어요? 우리 경기장 가기 전까지만 해도 냉방 안 됐는데?”

“트릭스 게이밍에서 우리 상황 알고 급하게 사람들 보내 줬었거든. 고쳐졌다는 건 나도 경기 끝나고 알았어.”

“아셨으면 좀 일찍 알려 주셨어야죠!”

“너희 서프라이즈 좋아하잖아.”

감독님이 뿌듯한 얼굴로 코를 긁적였다. 준이 기쁨에 울면서 숙소 입구 바닥에 드러누웠고 그 위로 잽싸게 제현과 동진이 앉았다.

“찬희야, SNS 업로드용으로 한 장 찍게 너도 빨리 가서 서 봐.”

등을 툭툭 밀려서 어정쩡하게 서 있으려니 제현이 끌어당겨 자기 허벅지 위에 앉혔고 엎드려 깔린 준의 입에서 내장을 뱉는 것 같은 소리가 나왔다.

나는 가벼운 편이라고 쳐도 양옆의 180이 훌쩍 넘는 체육맨들은 다른 이야기였다. 좀비 같은 소리를 내다가 이내 힘이 쭉 빠지며 미동이 없어진 준을 보며 일어나려고 했지만, 제현이 허리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김준, 죽은 거 아냐?”

“이 정도로 죽을 거였으면 진작 죽었어야 하는 놈이니 신경 쓰지 마시고 카메라 보세요.”

다들 카펫처럼 깔린 준이를 신경 쓰지 않고 사진찍기 바빴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official @Triangle_Knights

드디어 숙소 에어컨 이슈 해결✌

2라운드는 시원한 숙소에서 시원한 경기력으로 더 멋진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Special thanks to @Trixgaming

└달링 살아 있나요?

└└ 사진에 달링이 어딨어요?

└└└바닥에ㅋㅋㅋㅋ

└└└└아 ㅅㅂㅋㅋㅋㅋㅋ

└최약체를 바닥에 두면 어떡하냐고ㅋㅋㅋ

└쳌메 왜 저렇게 아들 두 명 한국대 보낸 학부모처럼 찍힘?

└└혼자 엄근진해서 그런 듯ㅋㅋㅋㅋㅋ 구리는 진짜 한국대생이었잖앜ㅋㅋㅋㅋ

└└└입시라는 것은 자녀들을 믿으며 함께 뛰는 마라톤 –체크 메이트-

다들 오랜만에 맛보는 인공적인 냉기에 감탄하며 현대 문물의 경이로움에 대해 한마디씩 던지다가 1라운드를 잘 마쳤으니 오늘은 일찍 쉬자며 흩어졌다.

씻고 나오자 더위를 많이 타는 제현이 여태까지의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에어컨을 평소보다도 낮게 설정해 놓아서 긴팔 티셔츠를 꺼내 입고 있는 참이었다.

제현은 그간에 더워서 쿨매트가 깔린 제 침대에서 따로 자더니 오늘도 핸드폰을 쥔 채로 자기 침대에서 졸고 있었다.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자 졸음이 가득한 눈이 슬며시 떠졌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은지 배시시 웃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머리 다 말렸어요?”

“응. 얼른 자.”

잠투정이라도 부리는 사람처럼 내 옷을 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같이 자요…….”

“쿨매트 버석거려서 싫어. 춥기도 하고.”

“이러면 되잖아요.”

잔뜩 늘어지는 목소리가 고롱거리는 고양잇과 동물 같아 홀린 듯 잡아끄는 팔을 거부하지 않고 이끌려가 제현의 몸 위에 겹쳐 누웠다. 내가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은지 팔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인간 난로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체온이 높은 제현의 위에 누워 있으려니, 마치 따끈하게 데워진 장판 위에 몸을 눕힌 것처럼 피곤한 몸이 사르르 녹았다.

무겁지 않은가 걱정이 되어서 위를 보자 그새 반수면 상태로 접어들었는지 뭐라고 웅얼거리는데 제대로 완성된 단어 하나가 없었다.

원래 정자세로 누워서 자는 편이라 엎드려서 자는 게 낯설 만도 한데 이상하게 편안했다. 그간 혼자 자면서 뒤척인 것을 생각하면 더 이상했다.

누가 수치를 딱 맞추어 재단한 것처럼 매일 비슷한 하루를 살아왔는데 제현과 같이 지내다 보니 일상과 일상이 아닌 것의 경계선이 모호해졌다.

내 어깨 위에 머리가 얹어지지 않으면 어쩐지 어색했고 잘 때도 침대가 좁게 느껴질 만큼 자리를 차지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잠을 설쳤다.

귓가에 들리는 일정한 제현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천천히 잠이 쏟아졌다.

***

이번 서머 시즌은 2라운드도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걱정했던 KJ 스노우도 우리의 투 딜 전략 앞에서는 도무지 기세를 펴지 못했고 우리는 2라운드 내내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최근 승부 예측에서는 90% 이상이 우리 팀의 승리를 예상했고 대체로 그 예측대로 들어맞았다.

항상 이런 실험적인 운영은 북미나 유럽 리그에서 나오는 편인데 이번 시즌은 특이하게 우리 팀이 새로운 운영법을 선두 지휘하고 있고 각국 리그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2라운드를 1위로 마무리하고 창단 이래 한 번도 밟아 본 적 없는 결승전 무대를 직행으로 갈 수 있을 것이었다.

매번 준결승전에서 주저앉기 바빴는데 결승 직행 티켓이라니, 거짓말 조금 보태서 월드 시리즈 직행 티켓보다도 KKL 결승 직행 티켓이 더 탐날 정도였다.

[MVP King : 찬희야]

[TGT Checkmate : ?]

참 오랜만에 연락한 진형이었다.

[MVP King : 보고 싶어]

[TGT Checkmate : ㅋㅋ]

[MVP King : 나 너 보려고 KKL 챙겨 보잖아]

[TGT Checkmate : 말은 참 잘하네]

[MVP King : 같이 한판 할래?]

[TGT Checkmate : 잠깐만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연습실을 나가는데 체력단련실에서 운동을 마치고 돌아온 제현과 마주쳤다. 같이 가서 운동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랭킹전 핑계로 떨구어냈던 터라 입술을 삐죽이고 있었다.

“왜 못생긴 표정을 하고 있어.”

“저 못생겼어요?”

장난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는지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내가 저 얼굴이었으면 누가 못생겼다고 해도 가소롭게 느껴질 텐데 참 유별난 반응이었다.

“아냐, 네 얼굴에 아무 이상 없으니까 일 봐.”

화장실로 향하면서 슬쩍 뒤돌아보니 제현은 아직도 못생겼다는 말에서 벗어나질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기 얼굴을 열심히 매만지고 있었다.

제현이 아무리 용을 쓰더라도 저 얼굴은 못생겨질 수 없는데 그 사실을 본인만 모르는 것 같았다.

서둘러 화장실에 다녀와 젖은 손을 제현의 등에 닦았다.

“형도 요즘 장난기가 늘었어요.”

“네 등이 따뜻해서 닦기 좋아.”

축축하게 젖은 얇은 여름 유니폼이 몸에 들러붙어 등 근육이 슬쩍 보이는 것은 보너스였다. 아주 바람직한 풍경이 따로 없다.

군침을 흘리기 전에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돌려 내버려 두고 있었던 진형에게 제현이 와서 같이 못 돌리겠다고 말하려는데 대화가 한참 길게 이어져 있었다.

[TGT Checkmate : 너랑 게임 같이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MVP King : ?]

[MVP King : 아 오랜만이네?]

[TGT Checkmate : ?]

[MVP King : 황제현 맞지? 나 이제 이름 외웠어]

[TGT Checkmate : 아닌데]

[MVP King : 찬희는 나 부를 때 너라고 안 해 형이라고 하지^^]

[MVP King : 너는 백 살 먹어도 형 소리는 못 들을 텐데 어쩌냐]

[System : MVP King 님을 차단했습니다. 해당 플레이어의 1:1 메시지를 차단합니다.]

애들도 아니고 유치 뽕짝으로 싸운 흔적들을 보고 제현을 흘겨보자 제현이 모르는 척하며 나에게 파티 신청을 걸었다. 제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파티 거절 버튼을 누르자 제현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왜요…….”

“누구 마음대로 차단하래.”

“거슬려서요.”

“거슬릴 게 뭐가 있다고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 이 형은 미국에 있는데.”

“아, 진짜 단지 몇 년 더 빨리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형한테 형이라고 불리는 거 진짜 거슬려요.”

벌칙으로 형이라고 불리고 싶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형이라는 호칭에 단단히 꽂힌 게 있는 모양이었다.

“동형도 형인데.”

“동형은 괜찮아요.”

“지운이 형도 있고.”

“그 인간도 좀 거슬리긴 하는데 봐줄게요.”

“진형이 형?”

“…….”

제현의 속이 실시간으로 부글부글 끓는 게 느껴졌다.

“진짜 귀엽네. 형이 뭐라고.”

“이게 다 형이 연상만 좋아해서 그러잖아요. 형 취향이 문제라니까요.”

“내가 언제?”

“시치미 떼지 마세요.”

제현이 또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아까 내가 못생긴 표정이라고 한 게 생각났는지 내가 보지 못하게 손으로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조막만 한 얼굴이 길쭉한 손에 다 가려졌다.

황당할 정도로 귀엽게 구는 모습에 현기증이 다 날 것 같았다. 동진과 준이 프로그램을 촬영하러 가서 연습실에 제현과 단둘이 있긴 했지만 언제든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올 수 있어서 저걸 콱 잡아다가 어떻게 해 버릴 수도 없고.

“너 일부러 그러는 거야?”

“제가 뭐요.”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하자 제현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화나셨어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내 쪽 가까이 들이미는데 이걸 참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처였다. 잠시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콱 잡고 입술 도장을 한 번 콕 찍고 놔주었다.

‘이제야 좀 속이 풀리네.’

갑자기 뽀뽀를 당한 제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상태로 굳었다.

“나도 내 취향에 대해 잘 모르는 편이긴 한데 내 생각에 내 취향은 연상이 아니고 잘생긴 사람이야.”

“그건 맞죠…….”

“근데 너무 잘생긴 건 또 별로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요……? 하긴 형 너무 먼치킨 형 사기캐는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아냐.”

누구보다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한 손으로 제현의 턱을 붙잡아 왼쪽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감상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잘생긴 게 최고인 거 같아.”

“……네?”

“너 잘생겼다고.”

“그런 편이죠?”

자기가 잘생겼다는 걸 모르는 띨빵한 놈은 아니라서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도 그렇다고는 말하는 점도 귀여웠다.

“내가 지금 너 내 취향이라고 말하고 있잖아.”

그냥 입맛에 맞는 정도도 아니었다. 그냥 인스턴트 라면만 줄곧 들이붓고 있던 입에 갑자기 코스요리가 쏟아지는 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조금 걱정스러웠다. 내가 걱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가고 있는 와중에 제현의 내 말에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나를 어깨에 둘러멨다.

“윽, 뭐 해. 랭킹전 하자며.”

“형, 진짜 그렇게 꼬셔 놓고 지금 랭킹전 하자 그러는 건 아무리 형이 게임에 미쳤다고 해도 너무한 거예요.”

“내가 언제 널 꼬셨어. 네가 날 꼬셨지.”

“맞아요. 저 형 꼬셨고요, 꼬시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꼬실 거예요.”

또 저놈의 과거, 현재, 미래를 꿰뚫는 3단 콤보가 나왔다. 내려가려고 발버둥을 치자 제현이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철썩하고 때렸다.

“위험하니까 얌전히 계세요.”

“내 신상에는 네가 제일 위험해.”

“그건 맞는 말인데, 조금 늦지 않았어요? 저희 벌써 같이 지낸 지 반년인데.”

능글거리며 슬쩍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길에 그냥 입을 다물고 주먹이나 콱 쥐었다. 반항해 봐야 나만 손해인 장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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