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와 씨, 저 가려면 무슨 대륙 횡단해야 해요. 저 제때 못 갈 것 같은데.”
맵 구석에 있는 준은 지금 달린다고 해도 합류가 늦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버틸 수 있는 조합도 아니고 일단 위치가 그렇게 멀지 않은 나라도 가서 지원해야겠다 싶어서 달려가는데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전투가 일어나 맘이 조급했다. 인상을 쓰며 입술을 짓씹는데 갑자기 화면에 로그가 우르르 떴다.
[Joker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Joker 님의 더블 킬]
[Joker 님의 트리플 킬]
[Joker 님이 전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Joker 님이 적을 전멸시켰습니다!]
[전설적인 존재 Joker 님]
“어……?”
“우리 팀이지만 너는 진짜 미친놈이다.”
동진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보통 이렇게까지 대승하면 다들 소리를 지르고 난리가 나는데 고요했고 다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기도 바빴다.
“제가 템 하나만 더 나오면 딜 잘 나온다고 했잖아요.”
- KJ 스노우 한순간에 침몰합니다!!! 완전히 주저앉습니다!!!
-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 조커 선수의 집중력이 빛났습니다. 아니, 이게 입나이츠도 아니고 이게 되네? 소리가 저절로 나오는데요? 이걸 이겨?
- 조커 선수 체력이 진짜 엄청나게 조그마해서 방금 판타 선수가 쏜 궁극기를 빗겨서라도 맞았으면 바로 죽었거든요! 전부 피하고 전부 맞춘 겁니다. 제가 말하고도 지금 이게 가능한 일인지 믿기지 않습니다.
- 지금 KKL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나 없어도 될 것 같은데.”
“진짜요. 동형 고기 방패로 세우고 제현이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우리 오브젝트나 챙겨 먹으러 다니죠?”
진짜 서포트형 버퍼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딜러가 버퍼 없이도 네 명을 상대할 수 있으면 과연 버퍼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잠시 철학자에 빙의해 존재에 대한 깊은 고찰을 시작했다.
순간 황망한 기분에 사고가 멈춰서 홀린 듯이 오브젝트를 챙기는 준이라도 지원하러 가는데 제현이 내 쪽에 경고 핑을 연속해서 찍었다.
“어디 가세요.”
“어? 어. 준이…….”
“이리 오세요. 같이 밀고 집 가서 골드 털고 게임 끝내야죠.”
생각해 보니 지금 오브젝트 챙기는데 사람이 두 명이나 갈 필요가 없었다. 정신 차리자, 서찬희.
“너 이번 세트 진짜 사람 아닌 것 같아.”
“이번 판 MVP 진짜 절실하거든요.”
“맨날 절실하면 안 될까?”
“제가 게임 설렁설렁한 적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건 아니지.”
게임은 아직 중반인데 벌써 거의 성장을 마친 제현은 거의 신이었다. 스킬 한방에 적들이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가는데 보는 사람이 다 짜릿했다.
- 진짜 데미지가 이게 말이 됩니까?
- 이번 세트 조커 선수의 플레이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정말 말로 표현이 안 됩니다. 올해 데뷔한 선수라고 믿기지 않습니다.
- 여러분 더우실까 봐 아주 시원시원하게 터트려 주네요! 또다시 전멸을 띄우며 난공불락이라고 불렸던 KJ의 단단한 성문이 연속해서 두 번씩이나 빠른 속도로 무너집니다!! 완벽한 2:0으로 경기에 승리하며 KKL 서머 시즌 1라운드를 1위로 마무리하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입니다!!!
[승리]
“체크 메이트 선수, 조커 선수 MVP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네.”
제현이 당연한 것처럼 씨익 웃으며 허리를 숙인 상태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춤 신청을 건네는 중세 귀족 도련님 같았다. 어디서 봤나 싶었더니 오늘 MVP 플레이 기사 캐릭터 모션 동작이었다. 건넨 손을 잡는 척하다가 짝 소리가 나게 내려쳤다.
“끼 부리지 마.”
“형 앞에서 아니면 어디서 해요.”
“카메라 앞에서 하든가.”
성큼성큼 인터뷰 스테이지로 향하자 제현이 바쁘게 따라왔다.
“형 다리 다쳤을 때 유일하게 좋은 점이 하나 있는데, 남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안고 다닐 수 있었던 건 참 좋았어요.”
“난 쪽팔렸는데.”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다 안겨 다녀서 공주님이라고 불렸다. 목발 쓰면서 걷고 있노라면 누구든 다가와 덥석덥석 안아 들고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는 했다.
“뭐, 편하긴 했지. 내 발로 안 걸어도 되고.”
“그러시다면야. 실례하겠습니다?”
제현이 날 쌀가마니 들 듯 어깨에 들쳐 멨다.
“해 달라는 말이 아니잖아.”
“편하시다면서요?”
“내가 쪽팔렸다고 더 먼저 말했던 것 같은데.”
공주님 안기를 당하는 것보다는 덜 쪽팔렸지만 그렇다고 짐짝처럼 옮겨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내려놓으라고 한참을 실랑이했지만, 제현은 자기에게 불리한 말은 싹 무시하고 그냥 허허, 웃으면서 무시했다. 결국 제현의 어깨에서 나부끼다 인터뷰 스테이지에 도착했다.
“어라, 체크 메이트 선수 아직도 다리 아파요?”
하이톤의 딕션이 좋은 목소리가 화사하게 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꼴을 구경하고 있는 문은영 아나운서가 있었다.
“아, 그냥 제가 형한테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하하, 그 장난 저도 언제 한번 받아 보고 싶네요.”
“작년인가 동형 어깨 위에 앉지 않으셨어요?”
“맞아요. 올해는 조커 선수 어깨 위에 한 번 앉아 보려고요.”
“하하, 영광이죠.”
제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나를 내려 주었다. 슬금슬금 내 옆에 붙어서는 게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내가 질투에 미친 사람도 아니고 저 정도 대화를 나눴다고 뭐라고 할 줄 아는 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현을 보자 제현이 눈썹을 한껏 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체크 메이트 선수, 인터뷰 준비되셨어요? 오늘 출근길에서는 좀 긴장하신 것 같던데.”
힐을 신어서 눈높이가 비슷한 은영이 고개를 숙여 들이밀며 올려다보았다. 인터뷰 준비라고 해 봤자 뭐가 있지도 않았다. 제때 제 위치에 서서 덜 뚝딱거리길 기도하는 게 다였다.
“어…… 네.”
“오늘은 조금만 더 힘내서 최대한 길게 답변해 주세요!”
주먹을 쥐고 아자아자 외치며 웃는 은영의 얼굴이 반짝반짝했다. 잘생긴 얼굴은 제현이 덕분에 면역력이 좀 있지만 예쁜 얼굴엔 면역력이 한없이 0에 수렴해서 거의 반쯤 눈을 감고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뜨거웠던 KKL 서머 시즌 1라운드가 마침내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순위 변동이 컸던 시즌인데요.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하다가 마지막에야 단독 1위 자리에 올라선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었습니다. 오늘 경기 승리의 주역 1, 2세트 MVP 선수분들 모셨습니다. 체크 메이트 선수, 조커 선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세요.”
타이밍을 놓쳐서 제현의 인사 끝에 슬쩍 목소리를 얹으며 인터뷰 때마다 이래서 커뮤니티에 돌고 있는 ‘체크 메이트 세요 모음’ 영상이 생각났다. 보면서 다음엔 엇박자로라도 완전하게 ‘안녕하세요’를 외쳐야지 다짐해 놓고 또 이 모양이었다.
“네, 1세트에서 특이하게 하이브리드 공격형 버퍼로 누가 딜러인지, 왜 딜러가 두 명인지 혼란을 주었던 체크 메이트 선수인데요. 랭킹전에서는 자주 사용하셨는데 리그에서 보여 주신 것은 처음이라 놀랐습니다. 본인이 하겠다고 했나요?”
“아뇨, 제현이가 먼저 해 보자고 했어요.”
“조커 선수의 제안이었군요! 미세한 차이이긴 하지만 조커 선수보다 총 딜량이 높았습니다. 버퍼로 딜러보다 딜을 더 잘 넣은 기분은 어떤가요?”
“좋죠.”
대답을 마쳤는데도 방긋 웃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은영과 눈이 마주쳤다. 아, 길게 해 달라고 했었지.
“제가 잘해서 잘 넣은 게 아니고 팀원들과 제현이가 희생해서 만들어 준 딜 그래프라고 생각합니다. 골드라든가 저한테 양보해 준 게 많거든요.”
“네, 팀원들에게 공을 돌리는 모습이 정말 멋지네요. 조커 선수는 1세트에서 제라를 기용하셨는데, 제라의 현재 전적은 3전 2승 1패입니다. 혹시 2라운드에서도 볼 수 있을까요?”
“네. 스킬 계수가 낮아져서 데미지를 뽑아내긴 힘들지만, 잘만 쓰면 충분히 기용할 수 있는 기사라고 생각합니다. 상황이 잘 맞는다면 또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잘만 쓰면’이라는 말이 1세트의 체크 메이트 선수처럼 공격형 버퍼와 함께한다면 이렇게 들려서 혹시 또 1세트와 같은 조합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기대되네요.”
은영의 말을 들으며 관객석을 둘러보다가 ‘삼각이들 1위 축하해 이번에도 3위 하면 같이 죽자’라는 치어풀과 마주쳐서 심란해졌다.
“1세트에서 킬을 체크 메이트 선수에게 양보하시던 모습과는 다르게 2세트는 거의 한풀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그냥 싹 다 파괴하셨는데요. 혹시 MVP 욕심이 있으셨나요?”
“네, MVP 포인트도 욕심나지만, 체크 메이트 옆자리를 항시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역시 체크 메이트 바라기로 유명하신 이유가 있네요. 조커 선수는 1세트와 2세트 중 어떤 운영법이 더 잘 맞으시나요? 역시 딜러답게 본인이 캐리하는 편이 더 좋으신가요?”
“음, 제가 나이츠 시작을 버퍼로 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팀원들을 서포트하는 것도 좋아해서 꼭 제가 주인공일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어느 쪽이든 이기는 운영법이 좋습니다.”
제현이 청산유수로 대답하며 카메라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버퍼로 시작하셨다는 거는 저도 처음 알았네요. 모든 버퍼의 첫사랑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체크 메이트 선수인 만큼 조커 선수의 체크 메이트 사랑이 어디서 온 건지 조금 알 것 같네요. 월드 시리즈 직행 티켓이 걸린 서머 시즌인 만큼 치열한 2라운드가 예상되는데요. 1라운드를 1위로 마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 2라운드에는 어떤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줄지 두근두근합니다! 체크 메이트 선수 2라운드 각오 한 번 들려주시겠어요?”
“열심히…….”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은 오늘 경기장 도착 촬영 때도 했던 말이었다. 뭐 다른 말이 없나 머릿속을 뒤적여 봐도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오더할 때는 막힘없이 나오는 말이 카메라 앞에서 인터뷰하라고 하면 어딘가 막힌 것처럼 도무지 나오지를 않았다.
흔들리는 눈으로 카메라를 보다가 관중석에 눈이 갔다. 다양한 치어풀이 흔들리고 있었다.
“열심히 해서, 응원해 주시는 팬 분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서머 시즌 3위 탈출 넘버원 반드시 하겠습니다.”
‘3위 하면 같이 죽자’라는 치어풀 옆에서 ‘삼각이들 3위 탈출 넘버원’ 치어풀을 흔들고 있던 관객이 포효했다.
“네, 멋진 말씀 감사합니다. 서머 시즌 2라운드에서도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멋진 모습을 기대합니다. 다시 한번 승리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숙소로 복귀하는 차에 타자 다들 울상이 되었다.
“아, 감독님 저 경기장에서 자고 갈래요. 숙소 진짜 너무 더워요. 요즘은 밤에도 더워서 잠도 잘 못 자겠어요. 진짜 내가 사람인지 찜통 속 만두인지 모르겠다고요.”
“맞아요. 진짜 죽겠어요.”
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중얼거리던 동진마저도 감독님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감독님이 시선을 피하며 홀홀 웃었다.
“나는 만두인가, 만두가 나인가?”
울먹거리며 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버티던 준이 동진에게 달랑 들려서 끌려 나오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