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65화 (65/100)

65화.

“자, 자. 우리 저번에 한번 해 봤잖아. 1위로 마무리 잘하고 2라운드 상큼하게 시작해 보자고.”

더위에서 벗어난 기쁨은 마찬가지인지 감독님의 목소리도 한껏 격양되어 있었다.

“준이 컨디션 괜찮으면 루시리안 한 번 더 써 봐도 좋은데.”

감독님이 말하는 순간 루시리안이 밴이 되었다.

- 트릭스 게이밍 전용 밴 카드죠?

- 이 팀만큼 다크힐러에 최적화된 팀이 없으니 받아칠 전략이 없다면 밴하는 것이 스마트한 밴픽 전략입니다.

- 트릭스 게이밍은 정말 예측이 어려운 팀 중에 하나죠.

- 단단하고 난공불락의 성과 같은 KJ 스노우와 맞붙는 것을 보자면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는 창의 대결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 이번에는 서로 조금 무난하게 가려나요?

“2:0으로 잡으려면 이거 무난하게 가서는 안 될 것 같은데.”

우리는 딜러 픽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제현의 주력 기사는 항상 강력한 한방과 종잇조각 같은 생존력의 죽창 캐릭터들이었지만 안정적이고 단단한 KJ 상대로는 항상 한발이 부족했었다.

“저 이번에 제라해도 되나요?”

“제라를? 데미지 안 나올 텐데.”

“저번에 보니까 찬희 형이 서포트 버리고 딜템 가니까 어지간한 딜러 딜 뽑더라고요. 제가 이니시만 잘 넣으면 데미지 충분할 거예요.”

“투 딜러가 잘 먹히긴 했지. 저번에 한 세트 땄을 때 준이 루시리안했으니까.”

제현이 씩 웃으며 제라를 픽했다.

- 아니, 이게 얼마만의 제라!

- 10.01 패치에 스킬이 전체적으로 리뉴얼 되면서 리그에서 모습을 감추었는데요.

- 현재 제라의 리그 승률은 50%라고 합니다.

- 단 두 판밖에 나오지 않았거든요.

- 하하, 그중에 한 판이 조커 선수라는 게 재밌네요.

- 극한의 데미지형 딜러였던 출시 초기와는 다르게 현재는 궁극기를 통한 이니시 에이터로 운용이 가능한데,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 기대되네요.

“내가 공격형으로 가니까 초반에 꽤 강하거든? 압박하면서 스노우볼 굴려야 될 것 같아.”

“기선 제압 갈게요.”

그렇다고 게임 시작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저렇게 적진으로 성큼성큼 가라는 말은 아니었는데 제현이 신이 나서 돌진하자 준과 동진도 산적처럼 웃으며 따라갔다. 이렇게 모두 모여서 쳐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연약함, 그 자체인 갓 태어난 힐러가 순식간에 우리에게 둘러싸였다. 퍼스트 킬 골드를 나에게 먹이려고 실피를 남겨 놓고 딜이 중지되었는데 동진과 준이 티배깅이라도 하듯이 이모티콘을 띄우며 춤을 추고 있었다. 준이는 원래 저런 성격이라고 쳐도 동진까지 오늘 어딘가 정신머리를 두고 왔거나 술이라도 한잔 걸친 사람처럼 하이 텐션이었다.

“그만해. 둘 다 그럴 정신에 라인 복귀해서 성장이나 해.”

“네, 형.”

- 깔끔한 퍼스트 킬!!!

- 그런데 체크 메이트 선수가 먹었죠?

- 시작 아이템 구성도 그렇고 이번에는 체크 메이트 선수에게 딜링을 맡기려나 봅니다.

- 체크 메이트 선수가 랭킹전에서 답답하면 딜러로 변신하는 하이브리드 버퍼로 유명하죠.

- 이거 퍼스트 킬 골드까지 얻었으니 KJ 스노우 초반 전향이 아찔해졌습니다.

초반에 킬을 넘긴 탓인지 KJ는 극도로 싸움을 회피했고 10분대까지도 킬 스코어는 1:0을 유지했다. 내가 혼자 남은 순간을 노렸는지 적팀 탱커가 시야가 없는 곳에서 난입해 순식간에 세 명이 나를 포위해왔다. 다행히 근처에 제현이 있었다.

“제현아, 커버 좀.”

“가고 있어요.”

투 딜 전략에서는 한 명에게 몰아주는 것이 기본인데 아무래도 버퍼로 딜을 다 도맡기는 무리라 딜링을 나와 제현이 거의 반반으로 하고 있는데 제현에게 몸을 대 대신 죽어 달라고 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아, 안 되겠다. 그냥 너라도 쭉 빼.”

“어차피 죽을 상황이라면 하나 데려가시죠?”

“그러다가 너까지 잘리면…….”

“형, 절 믿으세요.”

탱커는 어차피 우리끼리는 못 잡으니 목표는 딜러와 버퍼였다.

“버퍼 반 피니까 먼저 녹여 줘.”

“옙.”

대답과 동시에 제현이 회피기를 쓰며 중앙에 자리를 잡더니 정확하게 궁극기를 메다꽂았다.

- 조커의 절대 감옥 3인궁!!!

- 체크 메이트를 노리던 세 명 전원 스턴!!! 이야, 특훈했다더니 오늘 조커 선수의 스킬 적중률이 미쳤는데요?

- 체크 메이트 선수의 더블 킬!

- 잡고 바로 죽긴 했지만 두 명이나 길동무로 데려갔으니 완전 이득이죠!

- 갑자기 체크 메이트 선수의 아이템이 말도 안 되게 뽑혀 나왔거든요? KJ 스노우 지금 완전 비상입니다. 이거 어떻게 상대합니까.

- 그렇다고 조커 선수의 딜이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니거든요. 지금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딜러가 두 명이에요!

“이번 판 MVP 누굴까? 동형, 저랑 내기하실래요?”

거의 승기를 다 잡아서 그런지 준이 흥얼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찬희겠지.”

“그럼 저는 제현이요. 제가 이기면 어떡하실래요.”

“뭘 원해.”

“엉덩이로 이름 쓰기 어때요.”

“애냐?”

“SNS에 올리고 지우기 없기.”

“좋아. 콜.”

두 사람의 내기가 성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전투일 것 같은 한타가 열렸다.

“가라 황제현!!!”

포●몬 트레이너 같은 소리를 하며 모든 힐을 제현에게 때려 박는 준이었다.

“아, 서찬희. 지지 마! 킬 주워 담아!”

힐러와는 달리 지원 스킬이 없으니 울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동진이었다. 필사적인 모습에 나와 제현은 ‘아, 이걸 내가 먹어? 말아?’하고 실실 웃으며 두 사람의 간절한 모습을 즐겼다. 결국, 성문 앞까지 몰린 적들에게 제현이 4인 궁을 박아 넣고 킬을 내가 싹 주워 담으며 게임이 끝났다.

“이거 아직 모른다.”

준이 내가 전멸을 띄우며 게임이 끝나서 불안한지 대기실에 와서도 중계 화면이 나오는 TV 앞에 서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 네, 정말 화끈한 경기였죠?

- 아무래도 트릭스 게이밍이 경기하는 날이면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다고 해야 할까요?

- 조기 퇴근을 기대하시는 거죠?

- 핫하하, 아무래도 그렇죠!

- 이번 세트 MVP는……!

- 네, 체크 메이트 선수입니다.

- 자기 주도적인 버퍼 운영법의 선구자가 한 번 더 나이츠에 혁신을 불어넣나요? 서포트형 아이템 트리를 싹 무시하고 공격형 하이브리드 버퍼로서의 면모를 톡톡히 보여 주었습니다!

- 아, 데미지 그래프 보세요. 딜러인 조커 선수보다 조금 더 앞섰습니다!

“안 돼……!!!”

TV 앞에서 뮤지컬 속 비련의 주인공처럼 쓰러져 흐느끼는 준이었다. 제현과 동진이 킬킬거리며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엉덩이로 이름 쓰기 할 거래요.”

“야, 당연히 닉네임으로 써야 하는 거 알지? ‘Darling’ 한 글자도 빼놓지 말고 다 써.”

“아, 닉네임으로 쓰라는 말은 없었잖아요!!!”

“이름으로 쓰라고도 한 적 없는데?”

준이 주먹으로 땅을 치며 꺼이꺼이 흐느끼자 감독님이 오버하지 말라며 수첩으로 준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들 이겨서 기분 좋은 건 알겠는데 아직 우리 1위 아니거든? 다음 세트 이기면 오늘 하루는 너희가 아무리 원숭이들처럼 떼로 낄낄거려도 터치 안 할 테니까 한 세트만 더 집중하자.”

감독님의 말씀에 동진이 엎어져서 아직도 힝힝거리고 있는 준을 들어다가 제대로 앉혔다.

“KJ 스노우가 대처가 빠른 편이다 보니까 하이브리드 버퍼를 한 번 더 쓰는 건 좀 위험할 것 같아. 우리가 원하는 건 2:0 승리니까. 리스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필승 전략을 들어야 해.”

“루시리안이요?”

울상이던 준의 얼굴이 밝게 빛났다.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느낌이 황홀해서 좋다며 픽이 열릴 때마다 시켜 달라고 노래를 불렀다.

“아마 밴 할 거야. 우리 고정 밴 카드고 KJ가 풀어 준 건 딱 한 세트가 전부니까.”

“쳇.”

“만약에 풀리면 그때 조합 보고 마지막 픽으로 하든가 하고 무난하게 밴픽 흘러가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통의 조합으로 가야겠다.”

“저희 전통 조합이 있어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전통의 죽창 조합으로 가야지. 죽창 앞에서는 너도 한 방, 나도 한 방!”

감독님은 거의 농민 봉기의 한 장면 같은 느낌으로 주먹을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1세트 시작 전에는 무표정으로 집중하기 바쁘던 제현도 이제는 표정이 완전히 풀렸다.

“KJ 스노우 천적은 무슨. 이제는 그냥 라이벌이라고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근데 우리 전적이 망하긴 했어. 만날 때마다 하도 져서.”

“동형, 잘 좀 하지 그러셨어요.”

“어쭈. 이게 내 탓이라는 소리야?”

동진이 준의 머리에 헤드록을 건 채로 경기장으로 끌고 갔다. 준이는 꼭 저렇게 매를 버는 경향이 있었다.

“이번 세트 MVP는 양보 안 해 줄 거예요.”

“언제는 양보한 것처럼 말한다?”

“방금 1세트는 제가 형한테 MVP 양보해 드린 건데요? 같이 인터뷰 나가고 싶어서요.”

괘씸하고 건방진 소리에 속으로 ‘어쭈?’ 하며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거리기에 나도 제현의 머리를 잡아당겨 옆구리에 낀 채로 경기장까지 끌고 갔다. 하여간 우리 팀 20살들은 매를 벌어요.

- 네, KKL 서머 시즌 1라운드 마지막 경기의 마지막 세트가 될 수도 있는 경기입니다!

- 이번 경기를 이기게 되면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 단독 1위로 진출하게 됩니다!

- 이기면 1위 확정, 지면 2위 확정! 정말 드라마틱한 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 KJ는 변함없이 루시리안을 밴 해 주는군요.

- 아무래도 지난 경기에서 대패한 기억이 크게 남은 것 같네요.

- 이제 각 팀 픽이 마무리되었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 제가 1세트 시작 전에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는 창의 대결을 보는 것 같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KJ 스노우의 조합은 전형적인 방패 조합입니다. 그런데 이제 방패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조합이죠. 반면에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다 그냥 죽창이에요. 탱커를 빼놓고 전부 KJ 스노우가 방패 한 번 휙 휘두르면 와르르 무너질 조합인데 그만큼 또 날카롭습니다. 아주 칼을 갈고 나왔어요!

- 말씀만 들어도 정말 흥미로운데요. 경기 함께 보시죠!

동진 빼고 전부 생존력이 좋지 못하니 초중반은 그냥 이 악물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 중간에 기습으로 제현이 한 번 잘리긴 했지만,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칠 만큼은 아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황제현, 너 한 번 더 잘리면 우리 60분까지 버텨서 시즌 최장 경기 가든가 아니면 그냥 서렌 쳐야 해.”

“조심할게요. 저 일단 동형이랑 붙어서 골드 수급 조금만 더 할게요. 템 하나만 더 나오면 데미지 잘 나와요.”

“이미 살벌하던데? 저쪽 힐러 지금 네 데미지 계산한다고 골 빠개지고 있을걸. 하하하 고생 좀 해 보라지.”

준은 힐러지만 상대 팀 힐러를 괴롭힐 때 제일 행복한 모습을 보였다.

“죽도록 힐 해 봐라. 힐이 들어가나. 크하학!”

“주여, 저 타락한 영혼을 구제하소서.”

악당 웃음소리를 내며 웃는 준을 보다 못한 동진이 신음하며 짧게 기도했다.

“어? 쟤네 지금 우리 쪽에 오는 거야?”

시야 토템이 박힌 곳에 동진이 핑을 찍었다. 왜 저기에 다 몰려 있지? 언제 저기까지 갔지? 식은땀이 다 흘렀다. 방금 나와 마주쳤던 딜러의 마나 상태가 좋지 않기에 얌전히 집에 간 줄 알았더니 제현과 동진 쪽으로 달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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