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64화 (64/100)

64화.

어느새 서머 시즌 마지막 경기 날이 왔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서 눈 감았다가 뜨면 이번 서머 시즌도 덧없이 끝나 있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출근길 촬영을 잠깐 한다더니 간소한 촬영 스텝들이 준비를 마치고 대기 중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카메라가 따라왔다. 화려한 패턴의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문은영 아나운서가 마이크를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네, 지금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선수단이 도착했는데요. 인사 한번 나눠 볼게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제일 먼저 내린 동진이 어색한 얼굴로 인사하고 준이 카메라 앞이라고 신나서 손으로 하트를 연신 만들며 애교를 부렸다.

제현은 내가 깁스했을 때 안고 내리는 습관이 들었는지 가끔 무의식중에 나를 안아 들려다가 머쓱한 얼굴로 팔을 거두곤 했다. 오늘도 내 허리에 팔을 두르다가 말고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먼저 차에서 내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내리자 제현이 내가 미처 생각 못 하고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겨 주었다. 머리가 오늘따라 정신없이 붕붕 뜨길래 가라앉힐 생각으로 쓰고 있던 모자였다.

“아, 나 머리 산발이지?”

“네.”

물이라도 좀 묻히고 올 걸 후회하며 그냥 뒤로 슥슥 넘기는데 제현이 앞으로 다시 쓸어내렸다.

“산발이라며.”

“그냥 두세요.”

제현이 내 머리를 매만지며 너무 방방 뜬 부분만 손으로 가라앉혀 주면서 마음에 드는지 씩 웃었다.

“두 분이 정답게 꽃단장해 주는 모습이 인상적인데요. 오늘 1라운드 마지막 경기 대망의 숙적 KJ 스노우랑 맞붙게 되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아, 자신 없어요. 질 자신이요.”

준이 제현의 성대모사를 한답시고 똥폼을 잡으면서 말했다.

“하나도 안 비슷해.”

“이게 얼굴이 이래서 그렇지 꽤 비슷하거든요? 제현아, 다시 해 볼 테니까 립싱크해 봐.”

제현이 활짝 웃으며 입을 벙긋거리며 립싱크하는 동안 다시 성대모사를 했지만, 여전히 그냥 김준 같았다. 나와 동진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며 준이 답답해했다.

“다들 똑같다고 했거든요? 제현아, 어떻게 생각해?”

“비슷해.”

“그렇지? 진짜 뭘 모르는 형들이라니까.”

“다들 오늘 컨디션은 좀 어떠세요?”

주제가 너무 삼천포로 흘러가기 전에 은영이 다시 분위기를 다잡았다. 제현이 근엄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완전 최고죠.”

그런 제현을 보던 준과 동진이 손등을 보이며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다들 나를 놀리는 데 도가 튼 인간들이었다. 눈을 굴리며 불만을 표하다가 실실 웃고 있는 제현의 발을 밟았다. 나름대로 힘주어 밟았는데 표정 변화 하나도 없이 따봉 자세로 나를 부드럽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하, 체크 메이트 포즈로 유명한 자세를 해 주시는 센스 만점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네요. 그렇다면 체크 메이트 선수에게 오늘 경기 각오 한마디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어…….”

건네준 마이크를 받아 든 채로 바짝 굳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하려니 단어들이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오는 말은 역시 지극히 상투적인 데다가 어쩐지 끝이 올라가 의문형으로 나왔다. 이럴 때 진형이라면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대며 뭐라도 더 말하게 하려고 했겠지만, 제현은 그냥 가만히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얹으며 방긋 웃었다.

제현의 얼굴을 주시하던 은영이 제현을 따라 해맑게 웃었다. 은영이나 제현이나 정말 빛이 나는 부류의 인간들이라 보고 있자면 눈이 부셨다. 광채가 도는 인간들이라고 해야 할까. 나와는 같은 종족이 아닌 것 같았다.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 나갔다.

“최근 제현이랑 기본기 연습을 열심히 했는데 특훈의 결과를 보여 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특훈이라니 아주 기대되는데요. 승리 MVP 인터뷰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이제 경기 준비할 수 있게 보내 드릴게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오늘 멋진 경기 부탁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대기실로 돌아오자 벌써 기운이 쭉 빠져서 대기실 소파에 가방을 멘 채로 길게 엎드려 누웠다.

“그거 잠깐 찍고 지치면 어떻게 해요. 본경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몰라. 힘들어 죽겠어.”

제현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초콜릿을 꺼내 포장지를 벗겨 입에 넣어 주었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렇게 반갑지는 않았지만, 당 떨어지는 기분에 인상을 지으며 받아먹는데 생각보다 달지 않고 오히려 씁쓸했다. 견과류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도 씹히는 식감도 좋고 맛있었다. 잔뜩 찡그렸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본 제현의 표정도 밝아졌다.

“마음에 들어요?”

“응, 맛있네.”

“좋아하실 것 같았어요. 하나 더 드실래요?”

“응.”

엎드린 채로 입을 벌리자 하나 더 까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뭐야, 뭐 먹어? 나도 줘.”

“넌 저기 초코바 있잖아. 저거 먹어.”

“뭔데. 왜 찬희 형만 특별 대우하는데. 많잖아. 나도 하나만 줘.”

“네가 별로 안 좋아하는 맛이야. 먹고 나서 똥 씹을 표정 할 거 뻔히 아는데 잘 먹는 사람 놔두고 너한테 왜 줘야 하는데.”

“내가 싫어할지 좋아할지 네가 어떻게 알아?”

“알지. 너 완전 전형적인 애들 입맛이잖아. 달고, 짜면 다 맛있다고 하면서 뭘.”

“그냥 준이 하나 줘.”

겨우 초콜릿을 두고 저렇게 싸우나 싶어 일어나 제현의 손에서 초콜릿을 하나 뺏어 준의 손에 쥐여 주자 잔뜩 신이 나서 입에 넣었다. 다만 입에 넣자마자 제현이 말한 대로 준의 얼굴이 똥 씹은 표정으로 변했다.

“내 말이 맞잖아.”

“웩, 이렇게 쓴 걸 왜 먹어?”

“네가 단 걸 좋아하는 거라니까.”

그러는 제현도 초코바를 우적거리고 있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휘핑크림도 산처럼 쌓아 먹는 편이고 아메리카노는 입에도 안 댔다. 갑자기 장난기가 돌아서 초콜릿 하나를 까서 제현의 입에 넣자 제현이 입에 문 채로 딱딱하게 굳었다.

“고장 났어?”

“으…….”

“뱉어, 뱉어.”

오만상을 다 쓰고 있는 제현에게 뱉으라고 휴지를 쥔 손을 입에 갖다 대주자 제현이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쳐나갔다. 장난이 너무 심했나 싶어 가방을 내려놓고 서둘러 제현을 뒤따라갔다.

화장실 앞 구석에 머리를 박고 있던 녀석이 내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숙여 내 입에 초콜릿을 넘겨 주고서 짓궂은 표정으로 입술을 핥았다. 입에서 녹아드는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뭐 저런 앙큼한 녀석이 다 있나 감탄했다.

“저를 너무 모르신다니까. 저는 단 걸 선호하는 거지 못 먹는 사람은 아닌데요.”

“속이라도 안 좋아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런 장난을 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형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경기전에 새로운 거 도전하는 건 하면 안 되겠어요.”

“이건 맛있어.”

제현의 추천은 대체로 합격점 이상이었다. 최근 몸무게가 안정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도 다 제현 덕이었다.

“더 드려요?”

“아니 물려.”

당 충전도 되었으니 슬슬 경기장에 가서 장비를 연결하러 가야 했다.

에어컨 바람이 쾌적했다. 찜통 같은 숙소의 장점은 극한의 환경에 있다가 시원한 경기장에 도착하면 다들 컨디션이 좋아진다는 점이었다. 핫팩을 하나 뜯고 있으니 제현이 이미 뜯어 놨었는지 벌써 따끈따끈한 것으로 들려주었다.

“고마워.”

“추워요?”

덥다고 반팔 차림으로 있었더니 약간 쌀쌀한 것 같기도 했다. 고민하고 있으니 제현이 저지를 가져와 내 얼굴을 옷으로 싸맸다. 오늘따라 제현의 장난기가 쉼 없이 쏟아졌다. 시원해서 기분이 좋아서 그런 것 같다.

“너 진짜 장난 그만 쳐.”

“알았어요.”

대답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한다는 듯이 내 머리를 마구 헤집고 준에게 시비를 걸러 갔다. 만만한 동네북인 준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머리를 다시 정리했다.

***

- 네 어느새 서머 시즌 1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는데요. 대망의 마지막 경기, 천적, 앙숙 관계로 유명한 팀이죠. KJ 스노우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매치 업입니다.

- 현재 단독 1위는 KJ 스노우인데요. 이번 경기를 트릭스 게이밍이 2:0으로 이긴다면 1위 자리를 빼앗게 되고 그 외의 경우는 2위로 1라운드를 마무리하게 됩니다.

- 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입장에서 1위로 1라운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단 한 경기도 지면 안 됩니다.

- 지더라도 2위라는 건 그래도 마음이 편하겠네요.

- 이왕이면 1위로 마무리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트릭스 게이밍은 스프링 시즌에 1라운드 전승 1등으로 마무리한 전적도 있지 않습니까!

- 아, 맞습니다. 이번 서머 시즌에는 스프링 시즌처럼 파괴적인 느낌은 줄어들었지만 노련해진 느낌이죠?

- 야생마같이 날뛰던 조커 선수가 좀 길이 든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하!

- 반면에 KJ 스노우는 조금 더 단단해진 느낌입니다. 트릭스 게이밍과의 지난 매치 업에서는 치열한 승부 끝에 KJ가 2:1로 승리했었죠.

- 맞습니다. 지난 시즌 약점 없는 팀의 유일한 약점이라고 불리던 신인 탱커 ‘Manday’ 선수가 이제는 신인 티를 벗었다는 평을 받고 있죠.

- 이거 두 팀 모두 신인 선수가 얼마나 잘해 주느냐가 관건일 것 같은데요.

- 경기 준비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이야기해 보자면 지난번에 각종 커뮤니티에 이슈가 되었던 지난 솔로 랭킹전 경기도 있었죠.

- 아, 맞습니다. 판타 선수와 체크 메이트 선수가 합을 이루어 조커 선수를 무참히 박살을 냈던 게임이었죠?

- 하하, 체크 메이트 선수가 몰래 조커 선수 화면을 본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확하게 현재 위치를 잡아내 플레잉 시간보다 죽어 있는 시간이 많았었죠.

- 랭커 순위도 지금 1위가 체크 메이트, 2위가 판타, 3위가 조커다 보니까 이번 경기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 결국 딜러 대결에서는 KJ가 조금 더 우세하지 않나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랭킹전과 리그 경기는 아무래도 다르거든요.

- 네, 화제의 게임 승리의 딜러는 판타 선수였는데 이번 세트의 승리자는 누구일지! 경기 준비되었으니 서둘러 보러 가시죠. KKL 서머 시즌 1라운드 마지막 경기의 첫 번째 세트 시작합니다!

“아, 저 배 아픈 것 같은데.”

“김준, 내가 진작 화장실 다녀오라고 했지. 퍼즈 내서 토일렛 이슈 만들 거야?”

“똥배가 아니라고요. 참나, 찬희 형이 아프면 위경련부터 읊는 사람이 왜 제가 아프다 그러면 무조건 똥부터 싸고 오라 하지.”

“찬희가 똥 싼 게임 하나라도 대 봐.”

“없죠.”

“네가 똥 싼 게임은?”

“많죠.”

“그러면 똥을 싸고 와야 할 사람은?”

“저죠.”

“더럽게 똥똥, 거리지 마세요.”

동진의 질문에 홀린 듯이 대답하던 준이 내 말에 킬킬대며 웃었다. 아프다더니 꾀병이 틀림없었다. 사람은 도대체 몇 살이나 먹어야 똥 이야기에 열광하지 않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게임 전 잡담들도 녹화가 되고 있어서 이번 대화도 분명히 편집되어 중계를 탈 생각을 하니 현기증이 다 나왔다.

“제발 철 좀 들자.”

“방금 동형도 웃었는데.”

“형…….”

“미안.”

평소 같았으면 대화에 끼어들어서 양쪽 모두에게 깐족거리기 바빴을 제현이 진지한 얼굴로 손을 주무르고 있었다. 제현은 늘 웃는 얼굴이라 자주 까먹지만, 무표정일 때는 참 차가운 얼굴이었다.

“넌 또 왜 그래?”

“네? 아, 아니에요. 조금 집중하느라. 뭐라고 하셨어요?”

“어디 안 좋아?”

“아니요. 그냥 이 게임 저만 잘하면 이길 것 같아서요.”

“무슨 소리야. 팀 게임에 그런 게 어딨어.”

동진이 피식 웃으며 김준이 똥만 안 싸면 이기는 거 아니냐고 농을 걸자 살짝 웃으면서도 제현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집중하는 모습에 홀린 듯이 쳐다보다가 밴픽이 시작되고 감독님이 전략을 말하고서야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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