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느긋하게 씻고 노닥거리다가 방을 나오자 날이 저물어 한결 더위가 가신 듯했다. 제현에게 업혀서 연습실에 도착하자 눈을 부릅뜬 동진이 준에게 헤드록을 건 채로 맞이했다.
“나약한 녀석들…….”
준이는 잠시 피시방에 대피해 있다가 와서 연습실에 계속 있었던 것은 동진뿐이었던 듯했다.
“그러니까 제가 같이 가자고 했잖아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
“혹시 더워서 뇌 약간 녹았어요?”
“김준, 너는 진짜 형한테 건방지게.”
동진이 준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었다. 킬킬거리며 구경하던 제현은 거꾸로 들린 준을 간지럽히며 괴롭히다가 자리에 와서 앉았다.
“같이 돌릴까요?”
“어? 나 벌써 돌렸어.”
“그새를 못 참고.”
제현이 혀를 차며 자기도 매칭을 돌렸다. 요즘 매칭 대기 시간에 즐겨하는 리듬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가 큐 잡히는 소리를 못 들을 뻔했다.
예전에는 매칭 대기 시간에 카드 게임을 서너 개씩 동시에 돌렸는데 요즘은 예전만 못한 것 같았다.
“어?”
적팀 딜러에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TGT Joker’ 미간을 좁힌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제현도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돌리자니까요.”
“다음 판부터는 같이 하자…….”
큐 돌린 시간도 꽤 차이가 났는데 하필이면 제현과 같은 판에 걸릴 건 또 뭐란 말인가. 하긴 제현의 랭킹이 많이 올라서 매칭이 같이 잡힐 만도 했다.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고 보니 제현과 같이 게임을 한 적은 많아도 적으로 상대해 본 적은 없었다. 심지어 진형과도 놀 때는 1:1을 자주 했는데 제현과는 합을 맞추느라 바빠서 해 본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테스트하는 것도 좋은 기회 같았다.
“제 화면 보시면 안 돼요.”
“안 봐.”
“형 0.1초만 봐도 위치 파악 다 하시잖아요.”
“안 본다니까.”
제현이 분주하게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가 들렸다.
[KJ Fanta (딜러) : 엥 왜 여기 계세요? 상대편에 조커 있는데]
[짜리몽땅 (탱커) : 와 저기 버퍼는 와일드캣 문즈네 이번 판 라인업 미쳤고ㅋㅋ]
[KJ Holymoly (힐러) : 트라이앵글 내전 가 보자고ㅋㅋ]
[KJ Fanta (딜러) : 우리 친추 되어 있던가요?]
하필 딜러와 힐러가 이틀 뒤에 서머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둔 KJ 스노우의 선수들이었다. 한숨을 푹 쉬며 오케이 이모티콘을 띄웠다
[KJ Fanta (딜러) : 아 맞다 채팅 안 치시지ㅋㅋㅋ ㅇㅋㅇㅋ]
[전체 - KJ Fanta (딜러) : 조커야 부럽지?ㅎㅎ]
[전체 – TGT Joker (딜러) : 랭킹전 아니면 같은 팀으로 게임 해 볼 일도 없을 텐데 즐기세요]
제현이 피식 웃으며 채팅을 쳤다.
“저걸 왜 받아 줘.”
“제가 뭘요. 그냥 게임 즐기시라고 한 건데. 그건 그렇고 너무 잘해 주지 마세요.”
고개를 쑥 내밀어 귓가에 ‘질투 나요.’하고 속삭이더니 씩 웃기에 손바닥으로 얼굴을 밀어냈다.
“너도 내 화면 몰래 보지 마.”
“그럴 정신이 어딨어요. 이번 판 지면 지는 대로 이기면 이기는 대로 한 소리 하실 거잖아요.”
“이기면 밖에서 재울 거야.”
“지면요?”
“지면 안 재워야지. 잘 시간이 어딨어.”
“너무해요.”
제현이 울상을 지으며 마우스를 고쳐 잡았다.
게임은 생각보다 팽팽하게 흘러갔고, 거의 중반으로 접어들었음에도 각 팀 딜러들의 성장력이 비슷했다.
제현의 경우 이렇게 비슷하게 가면 후반으로 갈수록 상대하기 힘든 편이라 조급한 것은 내 쪽이었다. 후반까지 질질 끌리지 않으려면 지금 제현을 주저앉혀 놔야 했다.
딜러 쪽에 핑을 찍고 지원 핑을 연속으로 찍었다. 아마 제현의 위치가 이쯤이니까 우리 팀 딜러가 도착할 때쯤 예상되는 위치를 핑으로 찍었다.
[TGT Checkmate (버퍼) : 여기 궁ㄱ]
[KJ Fanta (딜러) : ?]
[KJ Fanta (딜러) : ㅇㅋ]
공격력 증가 버프도 둘둘 달아 주자 잠깐 머뭇거리던 딜러가 궁극기를 내가 표시한 위치에 정확히 날렸다.
[ KJ Fanta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
킬 메시지가 뜨자 만족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솔직히 자신만만하게 박으라고 했지만, 혹시나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제현의 행동도 이제 내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아……!”
딜러들이 잘려서는 안 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보니 옆에서 제현이 짧은 탄식을 터트리는 소리가 들렸다.
“형, 제 화면 보셨어요? 이상하다. 시야 토템 없었는데.”
“안 봤어.”
신나서 적진으로 들어가는 딜러를 옆에서 보좌하며 전진했다. 앞으로 제현을 두어 번만 더 잡으면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우리 팀 딜러의 궁극기 쿨타임이 돌 때마다 잡는다면 10분 이내였다.
[TGT Checkmate (버퍼) : 궁]
[KJ Fanta (딜러) : ㅇㅋㅇㅋ]
“아…….”
“거기 있으면 어떡해.”
“도대체 어떻게 아시는 건데요…….”
“내 손바닥 안에서 잘 뛰어 보렴.”
제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TGT Checkmate (버퍼) : ㄱ]
[KJ Fanta (딜러) : 넵]
위치를 찍고 채팅을 치면 쪼르르 달려와 내가 말한 위치에 궁을 정확히 썼고 그때마다 제현의 데스 로그가 화면에 떴다. 최종 스코어 11:5 완벽한 승리였다.
“아, 저 랭킹 순위 4위로 밀렸어요.”
“그 정도면 한두 판 하면 다시 복구할 수 있잖아.”
“형 손으로 내린 거니까 형 손으로 올려 주세요.”
제현이 오버해서 훌쩍거리며 말했다.
“아, 그런데 진짜 무섭더라고요. 저 형이랑 절대 다른 팀 안 할래요. 어떻게 다니는 족족 위치를 들키지.”
“그러게. 반쯤은 나도 확신은 없었는데 찍으면 거기에 있더라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던 녀석이었는데 역시 시간이 해결해 준 건가 싶기도 했다. 오히려 적으로 만날 때 행동 예측이 잘 되는 것을 보니 자주 해 보는 것도 좋겠다.
“너 나중에 나랑 1:1 좀 하자.”
“네?”
제현이 심한 말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뒤에서 준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 황제현도 드디어 끌려가는구나. 체크 메이트의 지옥 캠프!”
“트라이앵글에 왔으면 한 번쯤은 끌려가야지.”
“동형이 제일 오래 시달렸지 않아요?”
“말도 마. 나 진짜 맨날 울면서 게임했어.”
동진과 준의 대화에 제현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 갔다.
“졌다고 벌주시는 거죠?”
“다들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나랑 1:1 좀 하는 게 뭐 어때서.”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기라도 한 줄 알 것 같았다. 동진이 콧방귀를 픽 뀌더니 팔짱을 끼고서 말을 시작했다.
“나 그때 배운 콤보는 자다가도 할 수 있잖아. 거의 뇌를 안 거치고 척추에서 나와. 지운이 형이 맨날 쟤 군대 갔으면 사람 여럿 조졌을 거라고 면제인 걸 다행으로 알라고 그랬다니까.”
“동형, 저 트라이앵글 들어왔을 때 랭킹 90위권이었던 거 아시죠. 쳌메 지옥 한번 끌려갔다가 나오니까 20위까지 올라갔잖아요.”
“아, 그래도 지나고 나니까 웃음이 다 나오네. 너랑 전우애도 생기고.”
“진짜요. 황제현 아자아자 파이팅!”
준이 막 들어왔을 때 하도 기본기가 부족해서 옆에 앉혀 놓고 1:1만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제현이 가련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
보기 흡족한 모습이긴 하다만 게임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할 일은 해야지.
“아니다. 나중에 하지 말고 지금 하자.”
“형……!”
“파티 받아.”
자유 설정 게임으로 초대했다.
“손 풀기로 제라 미러전 가자.”
잔뜩 풀 죽은 모습으로 얌전히 제라를 픽하는 제현이었다.
***
“제라 안 해 본 거 아니잖아. 스킬 리뉴얼 전에 그렇게 잘해 놓고 여태 한 번도 안 했어? 거리 범위 내 확정 스킬인데 왜 한 번을 못 맞춰? 리뉴얼하면서 거리 살짝 줄어든 거 사람들 다 아는데 왜 너만 몰라.”
“형, 제가 몰라서 못 맞추는 게 아니고요…….”
“이펙트 선에 맞춰서 거리 계산만 잘하면 되잖아. 스킬 계수 변했다고 안 쓸 것 같아? 나중에 리그에서 픽해야 하면 감으로 할 거야? 스킬 계수 줄어서 데미지 넣으려고 쓰는 캐릭터가 아니고 다인 궁으로 광역 스턴 넣으려고 쓰는 걸 텐데 그때 1인 궁, 2인 궁으로 끝낼 거야?”
쉼 없이 말을 쏟아 내면서도 제현이 쏟아 내는 거의 모든 스킬을 피하고 있는 찬희였다.
‘괴물 아닌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혼이 나면서 스킬을 나름대로 정교하게 쓰는데도 내가 어디로 어떻게 공격할지 이미 보고 온 사람처럼 최소한의 무빙으로 족족 다 피했다.
“형이 잘하는 거지 제가 못하는 게 아니라니까요…….”
“그럼, 이젠 네가 피해 봐. 내 포지션은 버퍼고 나만큼 하는 딜러는 쌔고 쌨으니까 피하는 건 잘해야지.”
이 악물고 무빙을 치는데도 처맞기 바빴다. 거리 범위 내 확정 스턴이라 맞고 나서 스턴이 걸리는 동안에만 안 맞을 수 있었다. 옆에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걸 맞아? 너 연습 안 해? 모션 들어가면 적당히 예측할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냐. 한타 들어가면 정신없어서 더 보기 힘들 건데 1:1에서도 못 피하면 어떡해.”
“죄송해요.”
“잠깐 하고 랭킹전 다시 하려 그랬는데 안 되겠다. 다른 것도 좀 손 보자. 여태 기본기는 좋아 보여서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그게 아니네.”
“살려 주세요.”
“응, 알겠으니까 파티 받아.”
울먹이며 준과 동진 쪽을 보자 둘이 그 마음 안다는 눈빛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온갖 캐릭터로 불려 와 맞으면서 기본기를 다시 다잡았다. 찬희에게 한 시간을 맞다 보니 여태 랭킹전에서 만났던 딜러들은 무슨 애들 장난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 잘 피하네. 좋았다.”
“형, 제가 진짜 잘할게요.”
“누가 못한대? 잘하는데 더 잘하자고 그러는 거지.”
평소에는 입에 거미줄 친 것처럼 말수도 없는 사람이 1초에 거의 7자씩 뱉는데도 뭉개지는 발음 하나 없이 귀에 쏙쏙 박히는 것이 당장 래퍼로 데뷔해도 될 것 같았다. 하나하나 뼈 때리는 것을 보면 디스전에도 소질이 있었다.
“저 오늘 완전 순살 제현이에요.”
“난 순살이 좋더라. 이제 랭킹전 좀 돌려서 너 3위 만들고 자러 가자.”
내 마음도 모르고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랭킹전 파티를 거는 찬희였다.
매칭을 돌리고 리듬 게임을 켜더니 평온한 얼굴을 한 채 보이지 않는 속도로 쏟아지는 노트를 정확하게 누르고 있었다. 화면에 Perfect가 가득했다. 찬희의 닉네임은 체크 메이트가 아니라 퍼펙트였어야 했던 거 아닐까.
자기가 한참 고스톱을 했을 때 닉네임을 정하게 했으면 고도리가 되었을 수도 있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했으니 그때 리듬 게임을 했다면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
찬희가 리듬 게임이 지겨워졌는지 지뢰 찾기를 틀자마자 매칭이 잡혔다.
“이 판 지면 너 오늘 진짜 잠 안 재울 거니까.”
“형, 저 자신이 없어요.”
“왜 그래? 내가 말이 그렇게 심했어?”
신랄하게 쏟아 낼 때는 언제고 당황을 감추지도 못하고 새하얗게 질려서 물어 오는 모습에 방긋 웃었다.
“질 자신이요.”
찬희만 아니라면 지금 누가 와도 다 이겨 먹을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장난치지 말라며 내 의자를 발로 밀어냈다. 킥킥 웃으며 다가가 머리를 들이밀자 쓰다듬으면서 밴픽을 지켜보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아, 이런 체크 메이트에게 1:1 과외받고 온 사람에게 랭커 나부랭이들이야 껌이지. 손가락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