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60화 (60/100)

60화.

헉헉거리며 핸드폰을 보던 제현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준이가 방금 말해 줬는데 형들이랑 같이 매칭 잡힌 힐러가 아는 사람이라 사정 설명했고 지금 조기 항복 투표 막는 중이래요.”

팀원 중 한 명 이상이 탈주 혹은 자리 비움 시 게임 시작 8분대에 조기 항복 투표를 할 수 있었다. 젠장, 젠장! 게임 클라이언트가 켜지자 웅장한 BGM과 함께 알림창이 떴다.

[진행 중인 게임에 재접속 시도 중]

[TGT Checkmate 님이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TGT Guri 님이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하…… 살았다.”

“미친…….”

거의 동시에 연결된 동진과 내가 한숨을 돌렸다. 게임이 시작된 지 정확히 13분째였다. 내가 전속력으로 뛰어도 족히 20분은 걸릴 거리를 10분도 안 걸려서 도착했다. 아직도 숨이 차는지 제현과 동진은 거친 숨을 뱉으며 책상에 머리를 박았다.

“헉, 허억. 진짜 죽겠다.”

“형, 힘드신 건 알겠는데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마우스 잡으세요.”

채팅창을 올려 보니 3분 전에 딜러가 항복 투표를 돌렸고 힐러가 반대를 한 덕분에 게임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힐러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TGT Checkmate (버퍼) : 죄송합니다]

보통 잘못해서 욕설 제재라도 당하면 곤란하니 채팅은 잘 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입이라도 털어야 했다.

[영종도할머니 (힐러) : ㄱㅊㄱㅊ]

[Jungguji (딜러) : 아니]

[Jungguji (딜러) : 두 명이나 튕겨서 10분 넘게 날렸는데 어차피 질 게임을 왜 계속하는데]

[TGT Guri (탱커) : 죄송해요 저희 정전 나서 피시방 뛰어왔어요ㅠ]

[TGT Checkmate (버퍼) : 30분만 주세요]

[TGT Checkmate (버퍼) : 이 게임 이깁니다]

35위의 동진과 큐를 돌린 거라 상대 팀은 대부분 20~30위였고 랭킹이 제일 높은 사람이 20위권 대였다.

“레벨 차이 그래도 꽤 나는데 괜찮겠어?”

“이 게임 이겨야 혹시라도 페널티 붙어도 할 말이라도 생겨요.”

“형, 지금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아 봐. 동형, 일단 힐러랑 붙어서 버티면서 성장해 보세요. 절대 죽으면 안 돼요. 저는 딜러 케어 최우선으로 갑니다.”

키보드도 마우스도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없지만, 이 게임은 반드시 이겨야 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지금 멘탈이 있는 대로 털린 것 같은 딜러 케어가 제일 급했다.

[Jungguji (딜러) : 짜증 나네 프로면 다인가]

최대한 달래 가며 지원 핑으로 와 달라는 요청을 여러 번 하자 안전 지역인 성문 앞에서 늘어져 있던 딜러가 무거운 엉덩이를 겨우 들었다. 귀족 딜러 대접 제대로 해 드릴 예정이었다.

상대방은 이미 이긴 게임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그리 빡빡하게 시야를 챙기지도 않았고 자기들끼리 노닥거리며 설렁설렁 게임을 해서 그렇게 큰 차이도 아니었다.

이 정도 레벨 차이라면 30분까지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거의 맵핵 수준으로 시야를 밝혀 놓고 돌아오자 빈사 상태의 우리 팀 딜러가 상대방 딜러에게 물려 있었다. 아이템 구비 상황을 보면 딱 봐도 싸울 타이밍이 아닌데 딜교에 미쳐서 싸운 모양이었다.

딜러에게 퇴각 핑을 난사하며 몸을 대 가며 딜러를 물었다. 가까스로 딜러는 살렸지만 내 화면이 회색으로 변했다.

[Jungguji (딜러) : 이걸 킬을 주면 어떻게 싸우라고]

[Jungguji 님이 항복 투표를 시작합니다. /ㅇㅇ 또는 /ㄴㄴ를 입력해 찬성/반대하실 수 있습니다.]

“하…… 장난하나.”

내 옆에 바짝 붙어서 구경하던 제현이 한숨을 쉬었다. 몸까지 대 가면서 지켜 줬더니 저 난리라니 저렇게 나약한 멘탈로 랭커를 어떻게 달았는지 의구심이 다 들었다. 채팅 칠 시간에 게임에 집중이나 좀 더 해 주었으면 했다.

대충 시야는 다 밝혀 두었으니 앞으로 딜러 옆에 딱 붙어서 어르고 달래 가며 거의 육아를 해야 했다.

[TGT Checkmate (버퍼) : 앞으로 20분]

“동형, 거기로 적 버퍼 가고 있으니까 조금 빠지세요. 회피기는 없고 궁 쿨타임 10초쯤이요.”

“지금 저기 탱커 집 갔거든? 힐러랑 버퍼뿐이라 네가 지원하러 오면 우리가 이길 것 같은데.”

“못 가요. 딜러 똥꼬 빨아야 해요.”

당장 눈앞의 킬이 아닌 연두부보다 연하게 말캉거리고 있는 우리 딜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확실히 내가 요즘 내 말 잘 듣는 명품 딜러들이랑만 게임을 하긴 했지.

가끔은 이런 징징이들과도 게임을 해 봐야 사람이 오만해지지 않는다.

버퍼가 힐러를 지원하러 간 것을 깨달은 딜러가 무리하게 적진에 진입을 시도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동형, 킬까지는 못하더라도 궁이든 뭐든 박아서 버퍼 피 쭉 빼 주실 수 있어요?”

“어, 왜? 너무 낭비 아니야?”

“우리 팀 딜러 제정신 아니라서 곧 타워에 들이박을 것 같은데 버퍼 오면 더블 킬 내줄 각이라서요. 그냥 발 붙잡는 용으로 좀 물어 주세요.”

“오케이.”

동진이 바로 궁극기를 버퍼에게 박아 넣으며 피를 쭉쭉 뺐다. 성장 차이가 있어서 반피 정도로 그쳐야 했지만, 갑자기 날아온 궁극기에 놀란 상대 팀이 몸을 사리는 동안 당당하게 적진으로 저벅저벅 걸어갈 수 있었다.

우리 팀 딜러에게 온갖 스킬을 다 쏟아부어 버프를 줄줄 달아 줬고 겨우 상대방 딜러를 잡아냈다.

[승리]

제현이라면 내 도움 없이도 충분히 잡아낼 것을 온갖 버프 다 달고도 보는 사람 애간장을 다 녹일 정도의 실피를 남겨 두고 겨우 이겼다. 아까부터 투자 대비 가성비가 안 좋아도 너무 안 좋았다.

“하, 못 해 먹겠네.”

그냥 내가 킬 먹고 크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런 놈이 랭커 구간에 당당하게 있는 건지 하도 의구심이 들어 검색해 보니 랭킹이 94위였다. 상대 팀은 20~30위 대로 잘 맞춰 놓고 우리 팀은 1위 있다고 지금 랭커 끝물에 겨우 있는 딜러를 매칭시켜 준 건가.

환상적인 밸런스의 매칭 시스템에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우리 연두부 딜러가 하라는 게임은 안 하고 또 뭐라고 채팅을 줄줄 치길래 참다못해 채팅을 차단했다.

“너 괜찮아?”

“형, 이제 킬 제가 먹습니다.”

“야, 너 그러다 트롤링으로 신고당해. 지금까지 딜러 잘 키워 놓고 무슨 소리야.”

“제가 지금부터 커도 저거보단 딜 잘 넣을 자신 있어요.”

초반에 자리를 비운 것은 미안했지만 이만큼 도 닦는 기분으로 케어해 주었으니 된 것 아닌가. 지금 날 태우면 분명히 사리가 쏟아질 것 같았다.

해탈한 얼굴로 서포트형 아이템을 전부 팔고 공격형 아이템으로 바꿨다. 골드를 조금 허공에 내다 버리긴 했지만 이게 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았다.

“버퍼로 딜을 넣어 봤자…….”

“저거보단 잘 나오겠죠.”

동진도 딜러가 답답하긴 했는지 나를 더 말리려다가 말았다.

“혼자 다닐게요. 힐러랑 둘이 성장 도모하세요. 딜러가 뭐라 하든 말리지 말고.”

“응…….”

***

[승리] 명성 포인트 +19점

정확히 43분 59초에 게임이 끝났다. 게임 결과표의 딜 그래프를 보자 딜러의 두 배가 넘었다.

내가 킬을 독식하는 것을 아니꼽게 보는 딜러가 중간에 방해를 시도하긴 했지만, 게임은 오히려 무던하게 흘러갔다.

승기를 거의 잡은 후반부에는 펫처럼 내 근처에 머물며 어시 골드나 열심히 챙기는 모습을 보였다. 게임 한 판이 이렇게까지 힘들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이 자식 태세 전환 빠른 거 봐.”

“왜요. 뭐라고 해요?”

“쳌렐루야 이러고 앉아 있네.”

“그럴 거면서 진작 말 좀 듣지. 찬희 형 고생이나 시키고. 어라…… 형?”

제현이 동진과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내 얼굴을 확인하고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게임이 끝나자마자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고 있었다. 게임을 하는 중에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던 토기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밀어닥쳐서 식은땀이 다 흘렀다.

“우욱…….”

“야, 제현아, 찬희 들어. 얘 토한다.”

동진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고 제현이 나를 안으려고 다가온 순간 제현의 티셔츠를 붙잡아 속을 게워 냈다. 동시에 제현이 티셔츠 끝을 민첩하게 들어 올려 깔끔하게 내 토사물을 받아 냈다.

“나, 나이스 캐치……?”

뒤에서 동진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

피시방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제 역할을 다한 듯한 제현의 티셔츠는 그대로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아무리 보기 좋은 몸이라지만 맨몸으로 거리를 활보할 수는 없어서 내 겉옷을 벗어 주었다. 나에겐 헐렁하던 저지가 제현이 입으니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지퍼를 잠그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세면대를 가리켰다.

“입 헹궈요. 이 다 삭아요.”

“알았어…….”

“아직도 좀 하얗게 질렸는데 한 번 더 게워 내고 출발하실래요?”

“아니야…….”

총체적으로 부끄럽고 미안해서 제현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아무리 잡히는 게 제현이었다지만 그대로 쏟아 낼 건 또 뭔가.

‘차라리 바닥에 쏟아 냈으면 덜 쪽팔렸을까.’

입을 헹구고 대충 물기를 손등으로 닦는데 제현이 옷소매로 입을 닦아 주었다. 물론 팔이 짧아 소매를 끌어 올리지 못해 팔로 닦는 중이었다.

“좀 괜찮아요?”

“응.”

“표정은 아니라는데요.”

제현이 몸을 낮춰 시선을 맞추어 나를 살펴보더니 방긋 웃었다.

“형, 설마 지금 부끄러워해요?”

“…….”

제현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다가 그대로 나를 안고서 올려다보았다.

“아, 진짜 사람 걱정시켜 놓고 그만 귀여우세요. 귀여우면 다예요?”

“귀엽게 느낄 만한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토한 게 뭐 별거라고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손에 하신 것도 아니고 겨우 티셔츠에 해 놓고. 제 손에 사정했을 때는 이렇게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셨잖…….”

제현의 입을 두 손으로 다급하게 막았다. 밖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제현이 내 손에 입이 막힌 채로 능글맞게 웃다가 나를 안아 든 채로 화장실을 나섰다. 피시방 문을 나서던 동진이 우리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피시방은 내가 계산했어. 뭐야, 찬희 못 걷겠어? 코치님한테 차로 데리러 와 달라고 할까?”

“아니요. 게워 냈더니 완전, 완전 괜찮아요.”

“너 오늘 얼굴이 하얬다가 빨갰다가 난리네.”

제현이 어깨를 떨며 푸흐흐 웃길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떼서 어깨를 주먹으로 내려치자 과하게 아픈 척하며 나를 내려 주었다. 동진이 피시방에서 사 왔는지 이온 음료를 건네주었다.

“이야, 서찬희. 자기 장비 아니면 죽어도 게임 안 하면서 잘도 했다?”

“아직도 속 안 좋아요.”

낯선 상황에 대뜸 떨어지는 것만큼 당황스러운 일이 또 없었다. 이런 상황을 못 견디는 나약한 몸뚱이가 게임 중에는 버텨 줘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피시방에 갈 때는 동진과 제현의 전력 질주로 10분 만에 도착했지만, 숙소로 돌아갈 때는 내 걸음에 맞춰서 느릿하게 걷는다고 30분이 넘게 걸렸다.

“하필 랭킹전 돌릴 때 무슨 정전이 나고 그러냐.”

“그러니까요. 노트북이라도 사 둬야 할까 봐요.”

“트라우마 올 것 같아. 서머 시즌 동안은 랭킹전 쉴까 봐.”

“그러다 휴면 강등당하면 나중에 더 빡셀걸요.”

터덜거리며 걷는데 멀리서 준이 손을 흔들며 뛰어왔다.

“씨바, 우리 좆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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