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 조커 선수와 체크메이트 선수가 대기하고 있는데요. 눈치…… 못 채나요?
- 아무래도 주요 오브젝트 쪽에 아예 시야 토템을 아예 안 둘 수는 없거든요.
- 아, 얼굴을 내밀자마자 달려드는 조커 선수! 이건 죽었다고 봐야죠.
- 조커 선수 혼자라면 모를까, 딜러가 버퍼 끼고 달려오는데 이거 그냥 회피기도 쓰지 말고 얌전히 죽어야 합니다. 와일드캣 문즈, 더 이상 손해 보면 안 됩니다!
- 네, 얌전히 죽음을 받아들이는군요. 퍼펙트한 퍼스트 킬!!!
어차피 와일드캣 문즈는 드러눕는 픽이라 초반에는 제현이 훨씬 강했다. 사린다고 사리지만 아무래도 버퍼는 시야 체크를 하러 나올 수밖에 없어서 제현과 함께 깔끔하게 퍼스트 킬을 먹었다.
“아, 황제현 퍼킬 골드도 나한테 몰아줘야 한다고 했잖아.”
“응, 민첩한 하루 되세요.”
어시 골드를 낙낙하게 주워 먹은 나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제현이 입맛을 다시며 혼자 남은 딜러를 잡으려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견제받고 있는 준이를 지원 중이었다.
“아, 찬희 형 케어 끝내 준다. 나 생각보다 딜러가 적성에 맞을지도…….”
“개소리하지 말고 힐이나 해.”
“저, 저 미천한 딜러가 어딜 감히 귀족 힐러님에게 말을 거는 것이냐?”
“나으리 고정하시고 짜지시옵소서. 요즘 왜 이렇게 내 밥그릇 탐내는 잡놈들이 많아.”
준과 만담 같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진심으로 짜증이 난 제현의 목소리에 실실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요?”
“평생 웃지 말까?”
“죄송해요.”
“얘들아, 집중 좀 하자.”
“넵.”
셋이서 작당하고 시시덕거리고 있자 동진이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분위기를 다운시켰다.
- 달링 선수의 도트 딜이 슬슬 데미지가 나오고 있죠?
- 싸우기 전에 저렇게 툭툭 피를 깎아 놓으면 아무래도 짜증 나죠.
- 아이템 조금 더 뽑으면 이거 짜증으로 끝날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조커 선수도 딜이 안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와일드캣 문즈 이번 세트만큼은 버틴다고 만사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 더 크기 전에 싸워야죠!
- 아, 와일드캣 문즈 쪽에서 퇴각 콜이 나오네요. 후반전을 바라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얘네 왜 이렇게 사리지.”
“그러게요. 버티면 더 아플 텐데.”
데미지가 잘 박히는 것을 확인한 준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 화면 아래쪽에 총 딜량과 힐량이 나오고 있는데요. 이야, 트릭스 게이밍 지금 누가 딜러고 누가 힐러죠? 달링 선수의 딜량이 딜 그래프를 뚫었습니다!
- 지금 구리 선수가 힐량 1위인데요? 달링 선수가 넣은 전체 힐보다 구리 선수의 자가 치유량이 더 많아요!
- 역시 종잡을 수 없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혼란 그 자체입니다.
-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습니다. 아마도 이번 전투가 이번 세트 마지막 전투가 될 것 같은데요.
- 달링 선수의 궁극기 쿨이 거의 다 돌았거든요? 거리를 주지 않고 달링 선수부터 녹여야 하는데요. 가능할까요?
- 불가능에 가깝죠.
- 아!!! 회피기를 이용해 중심으로 파고든 달링 선수의 기가 막힌 4인 궁!!!
- 이거 힐러가 맞나요? 초당 데미지가 미쳤어요!!! 녹습니다!!! 녹아요!!!
혼비백산해서 상대 힐러가 온갖 스킬을 다 끌어모아 힐을 넣었지만 차는 양보다 깎이는 양이 더 많아서 하나씩 쓸려 나갔다.
[승리]
- 달링 선수의 대학살로 마무리 짓습니다!!!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서머 시즌 첫 경기부터 놀라운 전력을 보여 줍니다!
- 이거 다음 상대 팀들은 지금 비상이겠는데요?
- 각 팀의 당장 다음 세트 밴픽 전략도 궁금하네요!
준이 방방 뛰며 대기실로 들어가 감독님과 얼싸안고 난리였다.
“자, 다들 다음 세트도 이기고 시원하게 발 뻗고 자자.”
수첩을 붕붕 휘두르며 감독님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와, 이번 세트 MVP는 만능 힐러 달링!”
제현이는 물론 상대 딜러까지 압살하는 딜량이었던 데다가 KKL 최초등장이라는 것도 MVP 선정에 한몫했을 것 같았다.
“딜러인데 서포트하는 느낌 어땠어?”
“재밌던데요?”
“다행이네.”
“초반에 조금만 더 집중했으면 딜량 더 잘 나왔을 텐데 그건 좀 아쉬워요.”
극 초반을 제외하고 모든 킬을 준에게 몰아줬는데도 2/0/13이라는 준수한 KDA를 해 놓고도 만족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무리하다가 잘리는 것보단 나아.”
“다음 판은 그냥 상대편이 루시리안 밴 해 줬으면 좋겠어요.”
“맞아. 밴 안 하면 우리 골치가 아프겠네. 하자니 대응할 것 같고, 안 하자니 아쉽고.”
“역시 저랑 좀 통하신다니까.”
감독님도 같은 고민 중인지 코치님들과 격렬한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일단 열리면 그냥 해 보는 거로 하자. 초반이라서 전력 공개는 덜 될수록 좋으니까. 이기면 좋고, 아니면 다음 세트 열심히 해야지.”
감독님의 말씀에 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기를 믿어 달라고 난리였다. 내 생각에는 그래도 설마 1세트에 저렇게 완패해 놓고 열어 줄까 싶었다.
- 화제의 다크힐러 루시리안이 또 열리는데요!
- 트릭스 게이밍의 선택이 궁금합니다.
“이게 진짜 열리네…….”
“아자! MVP 단독 인터뷰 꼭 하고 싶습니다!”
- 화끈하게 픽을 하네요. 우리는 한 번 더 간다!
- 1세트와 탱커를 제외하면 같은 조합인데요. 어떻게 보시나요?
- 네, 이번에 기용한 탱커의 경우 자가 치유가 부족한 편이라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흥미롭습니다.
“동형, 괜찮겠어?”
“어, 뭐……. 저쪽 딜러가 그렇게 공격적인 편도 아니고. 나대지만 않으면 죽진 않을 듯.”
확실히 동진은 무난하게 버텨 주었지만, 상대 조합이 지난 경기보다는 초반이 강한 편이라 제현이 시작하자마자 여러 번 잘렸다.
“저 또 죽어요…….”
“와, 황제현 한 번만 더 죽으면 0/3/1이네. 경기도 딜러 가자!”
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대 딜러에게 잘려 제현의 데스로그가 화면에 떴다. 탐라국 딜러에 이어 경기도 딜러라는 소리에 나와 동진이 속절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 형들까지 그러지 마세요.”
“수원 출신이니까 경기도 딜러 맞긴 하잖아.”
전향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준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지라 어둡지도 않았다.
“하하하, 이 게임은 내가 집도한다!”
“김준 저러는 꼴 보기 싫어서 다음 경기부터 루시리안 상대 팀이 밴 안 하면 제가 하려니까 아무도 막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부활하자마자 준이를 서포트하러 부지런히 달려가는 제현이었다. 적팀 탱커와 힐러를 혼자서 상대하고 있던 준에게 제현이 합류하자 금세 더블킬 로그가 떴다.
“나 이제 템 뜰 거 다 떴음요. 이제 아무도 나를 막을 수 없다…….”
중2병이라도 온 것처럼 큭큭 거리며 온 맵을 뛰어다니며 학살을 한 준 덕분에 오히려 1세트보다 경기가 빨리 끝났다.
“딜러로 포지션 변경 진짜 할 만할지도…….”
“나랑 주전 경쟁 자신 있어?”
“죄송.”
바로 사과할 거면서 일부러 제현을 도발하는 준이었다. 장비를 챙기는데 카메라가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들려다가 제현이 저번에 무슨 따봉을 하냐고 놀렸던 게 생각나 브이로 바꾸려 했는데 입력 오류로 미처 엄지손가락을 접지 못해 대뜸 손가락 세 개를 펼치고 있는 포즈가 되었다.
“큽…….”
“푸학……!”
뒤에서 제현과 준이 웃음을 터트리는 소리가 나 다급하게 엄지손가락을 접었다. 귀가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3등 팀이라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왜 하필 손가락 세 개를…….
“달링 선수 MVP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넵넵.”
데뷔 후 최초의 MVP 단독 인터뷰라며 준이 인터뷰하러 덩실거리며 갔고 나는 대기실 구석에서 아직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있었다. 내 위로 그림자가 지길래 올려다보니 제현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씨익, 웃더니 가슴팍을 두 번 두드리고 손등이 보이게 손가락을 세 개 펼쳐 보이는 것이었다. 나야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엉겁결에 나온 거라 어색하기 그지없었는데 제현이 하니 무슨 의미라도 있는 동작 같았다.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게 빤히 보였다.
“나 놀려 먹을 건수 하나 잡았다고 신났지 아주?”
“나, 랭킹 3위, 서찬희다.”
“시끄러워.”
오늘 잠은 다 잤다. 쪽팔려서라도 랭킹 3위를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이 솟구쳤다.
***
내일은 개인 스트리밍을 제외하면 별 일정이 없었기에 정신없이 랭킹전을 하다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MVP 인터뷰를 만족스럽게 마친 준은 의기양양해져서 일찍 쉬러 갔고 그 뒤로 동진이 두 판인가 연속으로 지더니 책상을 뒤엎을 기세로 식식거리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따로 개인적으로 연습할 게 있다며 굳이 남아서 자유 설정 게임을 돌리던 제현과 나만 연습실에 남아 있었는데 제현이 왜 이렇게 조용한가 했더니 마우스를 쥔 채로 졸고 있었다. 그냥 자러 가라고 그랬는데 말을 안 듣더니 피곤했나 보다.
그도 그럴 게 제현은 오늘 아침에도 어김없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운동을 하고 손도 풀고 연습하다가 저녁 경기를 뛰고 온 참이라 체력이 바닥일 만도 했다.
고개가 몇 번 꺾이다가 책상에 박으려고 하는 순간 놀란 내가 빛의 속도로 두 손을 뻗어 제현의 머리를 받았다.
“어…….”
“세이프…….”
내 인생에 이렇게 민첩한 순간이 있을 줄이야.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책상에 머리를 장렬하게 박을 뻔한 녀석이 눈에 졸음을 덕지덕지 달고 웃었다. 사람을 놀라게 해 놓고 웃어?
“웃지 마. 정들어.”
“그럼 더 웃어야죠…….”
배시시 웃는 모습에 욱했던 심정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한 번 봐주자. 저렇게 귀엽게 웃는데.
“일어나. 방에 가서 자.”
“형, 갈 때 같이 갈래요.”
“알았어. 나도 슬슬 그만하려 했어.”
아직 랭킹 3위인 것이 거슬렸지만 어차피 하루 이틀 해서 후다닥 올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래서 내가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랭킹전해서 랭킹 1위 유지했던 건데…….
내가 랭킹 1위 붙박이 시절에는 다들 감히 넘볼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서 유지가 더 쉬웠는데 그런 내가 부상으로 쉬면서 그랜드 마스터로 미끄러지자 다들 랭킹 1위 한번 찍어 보겠다고 난리 통이라 다시 올라가는 게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내일이면 2등은 찍겠네…….”
핸드폰으로 순위표에 나온 2위의 명성 포인트를 보면서 중얼거리고 있는데 제현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를 안아 들었다. 방금까지 축 늘어져 있던 녀석이 사람을 번쩍번쩍 들어 대니 뭔가 속은 기분이었다.
“내려.”
“싫어요. 찬희 올리고 제현이 내려.”
제현이 무슨 청기 백기 톤으로 장난을 치며 연습실을 나섰다.
“장난꾸러기가 다 됐어.”
“조심한다고 하는데 슬슬 본 성격이 나오나 봐요.”
“원래도 그랬잖아.”
“무슨 소리예요. 제가 형 앞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내숭 부렸는데.”
제현이 억울한 톤으로 말했다.
“진중하고 쿨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너무 똥폼잡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 터지게 고민했다고요.”
“귀엽네.”
“귀여운 거 말고 멋있고 싶은데요.”
하긴 제현은 귀엽다기엔 너무 커다란 편이었다. 거기에 이미 내겐 충분히 멋져서 더 멋져지면 곤란했다. 내가 뜸을 들이자 제현이 나를 뚫어져라 봤다.
“음…….”
“됐어요. 생각해 보니까 귀여운 것도 좋아요. 멋있는 건 형이 다 하세요.”
“삐졌어?”
내 물음에 피식 웃었다.
“아니요. 제가 어디서 들었는데 사람이 예쁘고 잘생긴 건 유통기한이 있는데 귀여운 건 답도 없다더라고요.”
“…….”
“잔뜩 귀여워해 주세요.”
이를 드러내며 웃는 얼굴이 늦은 새벽에도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 진짜 늘 생각하지만, 저 얼굴로 저런 말 하는 건 범죄 아닌가? 누가 안 잡아가나? 그런 생각이 휘몰아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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