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56화 (56/100)

56화.

6월이 되자 이제부터 여름이라고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낮 기온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위와 함께 서머 시즌도 함께 찾아왔다.

다음 주면 개막전이 열릴 예정이라 마지막 정비에 힘쓰고 있었다. 죽창 딜러인 제현을 데리고 있는 만큼 팀 특색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면 할수록 더더욱 우리가 스프링 시즌은 정말 어영부영 잘도 경기를 치렀구나 싶었다.

“더운데 슬슬 에어컨 틀어도 되지 않나?”

준이 티셔츠를 펄럭이며 징징거렸다. 아직 6월인데도 낮 기온이 30도를 돌파하고 있었다. 체온이 높은 편인 제현은 게임이 끝나면 선풍기 앞으로 달려가 끌어안고 있었다.

“작년에 서머 시즌 전부터 에어컨 돌렸다가 단체로 감기 걸린 거 때문에 늦게 틀어 주시려나 본데.”

동진이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토끼 모양 손풍기를 들고 중얼거렸다. 나만 혼자서 긴팔 유니폼을 입고 여유로웠다.

“형, 안 더워요?”

“응, 딱 좋은데…….”

이 시기만 지나면 여기저기서 냉방을 풀가동해 감기에 걸리지 않으려면 저지를 챙겨 들고 다녀야 했으니 나에게는 지금이 제일 살기 좋은 시기였다.

“우리 첫 경기 누구랑 하지?”

“와일드캣 문즈.”

“그래도 KJ는 아니네. 다행이다.”

저번 시즌에는 이례적으로 1라운드에서 압살했다지만 역시 만나고 싶지 않은 팀이었다. KJ 스노우는 저번 스프링 시즌을 우승하며 약점이었던 신인 탱커의 폼도 오를 대로 올랐다. 서머 시즌은 스프링보다 어려울 것 같았다.

“스퀘어는 내일 KKCL 개막전 한대요.”

“영화 딜러 데뷔전이 개막전이야?”

제현도 데뷔전이 개막전이었던 것이 생각나 은은하게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요. 저 말고 다른 딜러한테 관심 두지 마세요.”

“영화도 데뷔전 MVP 타면 좋겠다.”

내 말에 제현이 눈을 세모꼴을 하며 투덜거렸다.

“만약에 영화가 서브 딜러로 올라온다고 해도 주전 경쟁 절대 안 밀릴 거니까 다른 사람이랑 게임할 생각하지 마세요.”

제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하여간 질투는 많아서.

피식 웃으며 게임을 켰다. 화면에 뜨는 순위를 보자마자 한숨이 다 나왔다. 그간 랭킹전을 꽤 오래 붙잡고 있었는데 아직도 1위를 탈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TGT Checkmate 랭킹 3위]

숫자 3이랑 무슨 악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돈 모아서 굿이라도 해야지…….”

“왜요.”

대답 대신 내 랭킹을 보여 주자 제현이 자기 화면을 두 손으로 가리켰다.

[TGT Joker 랭킹 13위]

“참고로 동진이 형은 33위예요. 대박이죠.”

“가지가지 한다.”

단체로 3에 뭐가 씌었나. 다행인 것은 원래 10위권 대를 유지하던 준이 최근 5위로 오를 정도로 폼이 좋아졌다. 10위권 내의 힐러는 단 둘뿐이니 꽤 큰 업적이었다.

“문즈는 어차피 이번 서머 시즌도 드러누울 거니까 어떻게든 뚫어야지.”

“찬희 형, 안 바쁘면 이것 좀 같이 볼래요?”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 했더니 지운의 개인 방송이었다. 지운은 선수 생활을 은퇴하긴 했지만 그마와 랭커를 왔다 갔다 하는 준수한 실력으로 실험적인 게임을 많이 해서 조회 수를 뽑아 먹는 편이었다.

[화이트 페이퍼의 다크힐러 루시리안 응용법] 진정한 힐러는 힐을 해야 할 상황을 제거하는 법

지운이 현역일 때도 감독님한테 시켜 달라고 했다가 대차게 까였던 기사 ‘루시리안’은 나이츠의 몇 안 되는 준수한 비주얼로 유명한 미남 캐릭터였다.

긴 장발의 까만 머리를 휘날리며 간지나는 이펙트와 함께 쥐똥만 한 도트 힐과 도트 데미지를 자랑하는 희대의 꽃쓰레기 캐릭터였다.

스피릿 게임즈가 힐러의 쓰임새를 다양화하겠다며 대차게 내놓았지만, 트롤 픽으로 장렬하게 전사한 캐릭터인데 지운은 좋다고 노래를 불렀다.

- 도트 뎀이라고 무시하면 골로 가는 거라고.

지운의 신이 난 목소리가 들렸다. 아는 딜러와 합을 맞춘 듯 죽창 딜러와 함께 맵을 쏘다니며 킬을 자기가 주워 먹고 있었다.

“왜 킬 골드를 딜러한테 안 몰아주는 거야?”

“아무래도 루시리안 도트 데미지가 워낙 쥐콩만 하잖아요. 골드 빡빡하게 벌어서 템 차이로 찍어누르더라고요. 이게 초반엔 초반대로 짜증 나고 중후반에는 존나 아파요.”

“실전에서 쓸 만하려나.”

“제현이가 이거 특화형 딜러라고 생각하는데요.”

안정적인 생존력과 데미지의 기사들로는 곧 죽어도 못 쓸 전략이지만 생존이라는 걸 내다 버리고 데미지에 몰아넣은 죽창 캐릭터 전문인 제현을 생각하면 의외로 현실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와 푸시를 상대적으로 덜 받게 된다는 소리인데 그건 또 제현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음, 제현아. 어떻게 생각해?”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던 제현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재밌을 것 같아요.”

확실히 새로운 도전을 즐기는 타입이기도 했다.

“이거 극 초반 라인전 킬은 내가 먹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때 열심히 주워 먹으면 되겠네요.”

준이 당장 감독님께 허락받으러 간다며 핸드폰을 들고 뛰어나갔다. 방금까지 덥다고 퍼져 있던 놈들이 기운이 넘쳤다.

제현이 내 어깨에 머리를 올렸다. 뜨끈한 기운이 온 어깨를 타고 왔다.

“너 열나는 거 아냐?”

“원래 이 정도예요. 형 체온이 너무 낮은 거지.”

“아냐. 어제는 이렇게까지…….”

제현이 씩 웃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는 트릭스 게이밍 창립기념일이라 프런트 스태프들은 물론 선수들도 휴가라서 숙소가 말 그대로 텅텅 비었다.

아포칼립스 세계관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단둘이서 텅 빈 숙소를 쏘다니며 놀다가 시즌 시작 전에 실컷 해 둬야 형 몸이 버틸 수 있을 거라며 대낮부터 뒹굴었고 저녁부터 무리한 몸이 열이 올라 오히려 제현보다 체온이 높았다.

자연스럽게 어제 하루가 머릿속에서 상영되었고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이 자세 불편하지 않아?”

“저는 좋다니까요. 여기랑 형 옆자리는 제 전용이니까 다른 사람한테 내주지 마세요.”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앙큼한 녀석 같으니. 가볍게 딱밤을 한 대 먹였다.

***

- KKL 대망의 서머 시즌 첫 경기를 치르는 두 팀입니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와일드캣 문즈 입니다!

- 아, 정말 팀 스타일이 정반대에 있는 팀들이라 너무 기대됩니다.

- 상대 전적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 우세하지만, 스프링 시즌에는 와일드캣 문즈가 무려 준결승전이라는 큰 무대에서 승리하고 결승전 티켓을 거머쥐었죠.

- 플레이오프 전에는 와일드캣 문즈를 상대로 연전연승했던 트라이앵글이라 아무도 예상 못 했던 패배였습니다.

- 서머 시즌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 정말 두근두근합니다.

- 각 팀 선수들이 입장하고 있는데요.

- 지난 준결승전에서 체크메이트 선수의 부재가 워낙 컸던 터라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보니 좋군요.

전광판에 새로 찍은 프로필 사진이 떠 있었는데 어정쩡한 포즈로 어색하게 서 있는 내 모습을 저렇게 커다란 화면으로 보자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벌써 몇 년째인데 한번을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 프로필 사진이었다.

“형, 이번 사진 진짜 역대급인 거 같아요.”

“뚝딱거리는 게 역대급이라는 소리야?”

지금 나 놀리는 건가 하고 쳐다보자 제현의 시선은 전광판에 나오는 내 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형 팀 트라이앵글 때만 해도 카메라도 제대로 안 보셨는데 진짜 이번 거 너무 멋있어요.”

아, 맞다. 얘 내 팬이었지. 경기 전이라 핸드폰이 없어서 찍지 못해 아쉬운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제현의 핸드폰 배경이 아마추어 대회 시절에 찍힌 내 뒷모습 사진인 것을 알았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바로 옆에 있는 제현의 프로필 사진은 그야말로 완벽했다. 팔짱을 낀 채로 턱을 들어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시즌 만에 신인 티를 벗고 여유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스프링 시즌에는 누구 하나 잡아먹을 것 같이 정면을 응시하며 무표정을 찍은 것과는 대비가 되어 더 좋았다.

“너는 무슨 고개를 쳐들어도 잘 나오냐.”

옆에서 준이 투덜거렸다. 온갖 교태와 아양을 다 부리는 포즈의 프로필 사진으로 유명한 준의 경우 이번에는 손으로 하트를 하고 있었다.

“너는 진짜 은퇴해도 굶어 죽진 않겠다.”

제현이 갑자기 동태눈이 되어서 화면에 떠 있는 준을 보면서 말했다.

“은퇴를 왜 해? 나는 최고령 프로게이머로 기네스북에 오를 때까지 프로 할 거야.”

“누구인가? 누가 은퇴 소리를 내었지.”

“앗, 아…….”

동진이 이 악물고 말하는 소리에 제현과 준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최근 랭킹전을 열심히 하는데도 최상위층이라고 불리는 20위 안으로 들지 못하고 있는 동진은 최근 심기가 매우 예민했다. 현재 KKL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편이라 더 그랬다.

“동형, 서른까진 버텨 주세요.”

“버티고 있잖아…….”

약한 소리 하는 형이 아닌데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 걱정이 많았다.

“형, 저 오늘 MVP 타면 영광을 동형에게 바칠게요.”

“김준, 건방지게 벌써 MVP 탈 생각부터 하는 거야?”

힐러가 딜도 힐도 전부 하는 전략에 감독님께서도 흔쾌히 오케이 사인을 보내 주었다. 그간 코치님들과 머리를 맞대고 최적의 밴픽 조합도 열심히 연구한데다가 초반을 버리고 극 후반을 보는 와일드캣 문즈는 시험 삼아 써 볼 상대로 딱 맞았다.

- 이야, 이게 이렇게 나오나요?

- 저도 영상을 보긴 했는데 이렇게 나와 줄 줄은 몰랐거든요?

- 다크힐러 루시리안 KKL 최초 등장입니다!

준이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 달링 선수 기쁨의 춤을 다 추고 있네요.

- 밝은 트릭스 게이밍 선수들과는 다르게 와일드캣 문즈 선수들의 표정은 어둡습니다.

- 하하, 이게 무슨 봉변이죠! 마지막 픽으로 깜짝 등장한 거라 대응도 쉽지 않습니다.

- 그래도 게임은 해 봐야 아는 거겠죠.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서머 시즌 첫 경기, 첫 세트의 승리를 거머쥘 팀은 과연 누구일지 보시죠!

이번 전략을 철저하게 준비해 온 준은 물론이고 덩달아 제현도 텐션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너 스크림 때처럼 초반에 무리하면 가만 안 둬.”

난리가 난 제현의 캐릭터 위에 후퇴 핑을 연달아 찍으며 말하자 잠시 얌전해졌다.

트릭스 게이밍 스퀘어와의 연습 경기에서 극 초반에 무리하다가 잘리는 모습을 여러 번 보였던 제현이었다.

보통 킬 골드는 딜러에게 몰아주는데 극 초반을 제외하면 힐러에게 몰아주는 전략이기에 아이템 하나라도 더 뽑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무리하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피지컬을 맹신하고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애가 킬 욕심을 내니 자연스럽게 데스가 많아졌다. 한 번은 KDA 0/6/4로 게임을 마무리한 적도 있었다. 김준이 저거 제주도 지역 번호라며 탐라국 딜러라고 한참을 놀려 댔다.

“영화가 저만 물고 늘어져서 그래요.”

“변명하지 마. 스프링 시즌 내내 집중 견제받았잖아. 서머라고 다르겠냐.”

“그건 그래요. 형, 저 버퍼 자르러 가요.”

“같이 봐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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