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황제반점’과 게임을 할 때는 항상 내가 딜러를 했다. 그쪽 계정 전적이 순도 100% 버퍼길래 다른 직업도 할 수 있는 줄 예상도 못 했다. 그 시절이 생각나 제현의 위치에 의미 없이 백핑을 여러 번 찍자 제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 그럼 내가 버퍼로 프로 뛰는 거 알면서도 딜러 시킨 거야?”
“저는 애초에 딜러인 형한테 반한 거라서요.”
“포지션 변경해 줘? 나랑 주전 경쟁 뛰어 볼래?”
“아, 제발 봐주세요. 아니다. 그러면 제가 버퍼로 포지션 변경하면 되니까 하고 싶으면 하세요.”
도무지 농담이 안 통해서 재미가 없었다.
“농담이 안 통해.”
“툭하면 은퇴를 농담처럼 말하는 사람이 할 말이에요?”
“오늘 랭커 복귀 못 하면 은퇴한다는 건 농담 아니었는데.”
“진짜 봐주세요. 저 벌써 허리 아파요. 게임하실 땐 약간 어딘가 고장 나 있으시다니까.”
“안 고장 난사람이 나이츠를 왜 해.”
“그건 맞는 말이에요.”
깊은 동의를 표하며 제현이 적진 깊숙한 곳으로 다이브했다.
“나 지원 못 가. 거기로 적 버퍼 가는 중.”
“괜찮아요. 잘하면 둘 다 잡고 죽을지도요.”
나보다 더 가까이에 있는 힐러가 제현에게 백업을 가 준다면 살아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이기주의로 가득 찬 그마 생태계에서 그런 백업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었다. 더블 킬과 동시에 제현이 제압당했다는 표시가 떴다.
“너무 들어가지 말라니까.”
“죄송요.”
“버퍼 할 때는 안 그러더니 딜러만 하면 왜 그러는 거야?”
“형도 딜러 할 때는 다른 사람이잖아요.”
“내가 뭘?”
“제가 차니니 코스프레 해 드려요?”
지원을 오지 않았던 힐러 쪽에 퇴각 핑이 우다다 박혔다.
“씨발.”
“미안, 내가 미안하다.”
처음 듣는 걸쭉한 욕설에 바로 사과했다. 제현이 내 사과에 언제 쌍욕을 했냐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무난하게 이길 수 있을 것 같네.”
“그런데 아무리 연승한다고 해도 오늘 내로 랭커 복귀는 힘들어요.”
“응, 은퇴할게.”
제현이 마우스를 쥔 채로 힘을 주었는지 마우스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근데 왜 닉네임이 황제반점이야? 아버님 가게 이름?”
“아뇨, 비슷하긴 해요. 수원에서 좀 유명한 중국집이라서 친구들이 별명으로 황제반점이라고 불렀거든요.”
“이렇게 대놓고 황제현이라고 해 놨는데 아직도 내가 영화로 착각한 게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요. 자기 남편도 못 알아보시네.”
“야.”
동진과 준이 옆에서 듀오를 돌리고 있어서 눈치를 보면서 슬쩍 팔을 때렸다.
“여보 나 죽어!!!”
순간 준의 우렁찬 괴성이 들려왔다.
“씁, 그거 하지 말라니까. 승미한테 혼나고 싶어? 그냥 곱게 죽어. 집에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망이다.”
“너무해…….”
하긴 저쪽이야 서로 마누라라고 부르다가 동진이 형 여자 친구분한테 불려가 사이좋게 혼났던 사이인데 눈치 볼 필요가 있나 싶었다.
“영화가 새 남편 후보긴 하잖아.”
제현과 주요 오브젝트 파밍을 하는데 분주하게 움직이던 제현의 손이 내 말에 멈췄다.
2군 트릭스 게이밍 스퀘어에서 딜러로 활약을 한다면 1군 서브 딜러로 콜업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옆을 슬쩍 보자 잔뜩 인상을 구기고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몰라요.”
입이 삐죽 나와서는 모니터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거지. 진짜 놀려 먹는 맛이 있었다.
“질투 나?”
“제가 분명히 맨날 한다고 했는데요.”
“자기는 영화랑 나랑 두 집 살림해 놓고.”
“허, 제가 좋아서 두 집 살림 차렸어요? 저만큼 일편단심인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연습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와, 부부싸움 레전드.”
“내버려 둬. 딜러랑 버퍼 싸움은 칼로 물 베기지.”
준과 동진이 우리 말다툼 구경이 재밌는지 킥킥거리며 말했다. 제현이 머쓱한지 목소리 볼륨을 줄였다.
“두 집 살림하고 싶으신가 봐요?”
“글쎄. 영화 하는 거 봐야 알지.”
“저 막판 할게요. 랭커는 형 혼자 올라오세요.”
“미안, 미안. 안 놀릴게.”
“됐어요. 밥 먹으러 갈 거예요.”
말투는 딱딱한데 목소리에는 투정이 가득해서 오히려 귀여웠다.
새벽 늦게까지 플레이하니 랭커 승급전에 안착했는데 승급전을 하기에는 둘 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게임을 종료했다. 침대에 누워서 게임 커뮤니티를 둘러보는데 제현이 자연스럽게 내 침대로 올라왔다.
“네 침대처럼 올라오는구나.”
“저 제 침대보다 여기서 잔 시간이 더 많을걸요.”
그건 그렇지만. 핸드폰을 내려두고 제현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푹신하면서 탄탄해 느낌이 좋았다.
“형, 바쁘신 건 아는데 토요일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왜?”
“아버지가 형 밥 좀 먹이고 싶으시다네요.”
“아버님께서?”
예상하지도 못한 만남에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냥 밥 한 끼 드시는 거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상견례도 아니고.”
“그런 생각 안 했어.”
제현이 내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
제현이 하도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중국집 한다고 해서 동네 중국집을 생각했는데 수원에서 알아주는 고급 중식당 ‘황제연화’는 고급스러운 외관에 사이즈부터가 남달랐다.
“…….”
들어가기 전에 셔츠에 구김은 없는지 한 번 더 점검했다. 전날부터 지운을 닦달해 깔끔한 캐주얼 정장을 빌려 왔길 다행이지 평소처럼 유니폼만 덜렁 입고 왔다면 절대 못 들어갔을 듯했다. 너무 긴장한 탓인지 위장이 다 아파 왔다.
“귀엽긴 한데 왜 그렇게 긴장해요. 친구 집에 밥 먹으러 왔다고 생각해요.”
“친구가 없어서.”
“네?”
입술을 깨물다가 깊게 심호흡했다. 이럴 거면 지운이 형 어머니께서 부르실 때 한 번쯤 가 보는 건데 싶었다.
“상견례 아니라며…….”
“상견례에 자주 쓰이는 룸이기는 해요. 진짜 상견례였으면 좋겠다.”
“아드님을 제게 주십시오…….”
영혼이 나간 채로 대사를 뱉자 제현이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드넓은 테이블이 있는 프라이빗 룸은 생화로 고풍스럽게 장식되어 있었다.
“마주 앉는 게 낫지 않을까?”
“싫어요.”
넓은 공간에 붙어 앉아 있으니 공간 낭비가 더 심하게 느껴졌다. 땀으로 축축한 손을 바지에 닦아 내는데 아버님께서 들어오셨다.
“서찬희 선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짜 닮았다. 제현보다 조금 더 성숙한 남자의 모습이었지만 제현이 나이가 들면 이런 얼굴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 정도로 닮아 있었다. 누가 공들여 그린 것 같은 짙은 눈썹이라거나 깊은 눈매가 똑같았다. 얼굴을 붉히며 내민 손을 마주 잡자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진작에 모셔서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니 좋네요.”
“사장님 아들은 여기 있는데요.”
“넌 자주 보잖아. 준비해 드릴 테니 제현이랑 둘이 편하게 드세요.”
깊게 한숨을 돌렸다.
“얼굴은 왜 붉혀요.”
“설레서…….”
제현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아직도 입을 벌리고 아버님이 나간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짜 멋있으시다.”
“아버지를 상대로 질투하는 못난 아들이 되고 싶진 않은데요.”
“너도 최대한 빨리 나이 먹어 봐.”
“저도 동안인 편은 아니거든요?”
코스 식사로 화려한 음식들이 줄지어 나왔다. 둘이 먹기에 많은 양이라서 걱정이 많았는데 제현이 대식가라 다행이었다. 둘이서 먹는데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기가 빨려서 의자에 기대 지친 기색을 감추는 것에 급급해 있는데 ‘Happy Birth Day HJH’레터링이 적혀 있는 케이크가 나왔다.
“생일?”
“모르셨어요?”
제현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쁘게 차려입으셨길래 아시는 줄 알았죠.”
핸드폰을 들어 올려 트라이앵글 SNS 계정을 검색했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official @Triangle_Knights
4월 30일, 오늘은 TrixGaming Triangle Joker, 황제현 선수의 생일입니다. ������
Happy Joker Day!
#TGT #TGTJoker #HBD
진짜잖아.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어떻게 제현의 생일을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는지 눈앞이 깜깜해졌다.
“생일 선물 뭐 갖고 싶은 거 있어……?”
“이미 받았어요. 체크메이트와의 식사권이라고.”
“너 매일같이 나랑 같이 밥 먹잖아. 그게 어떻게 선물이야.”
“제가 좀 매일이 생일이고 크리스마스인 편이죠.”
제현이 만족스럽게 끄덕거렸다. 눈가를 꾹꾹 누르고 있다가 케이크를 들고 있게 하고 사진이나 찍어 주었다. 제현이 케이크를 조금 잘라 내 접시 위에 덜어 주었다.
“이 정도는 먹을 수 있죠?”
“응.”
“음식은 입맛에 잘 맞았나 봐요? 평소보다 잘 드시던데.”
“응…….”
나를 배려하셨는지 매운 음식들이 주로 구성되어 있어서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별개로 제현의 생일을 아예 몰랐던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밥은 좀 괜찮던가요?”
아버님이 들어오셔서 케이크를 먹다 말고 벌떡 일어섰다.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앉으세요.”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시간 날 때 또 들러 주세요. 집사람도 뵙고 싶어 하는데 오늘 일이 바빠 못 와서 아쉬워합니다.”
“네, 네.”
내 손을 덥석 잡고는 토닥여 주시는 손길에 말을 버벅거리며 눈을 마구 깜빡였다. 나에겐 참 다정하고 따듯하시다가 제현에게는 조금 냉랭하게 말씀을 건네셨다.
“집에는 언제 오냐.”
“당분간은 조금 바빠요.”
“알았다.”
***
식당을 나와 차에 타자 온몸에 힘이 다 빠졌다. 시트에 널브러지자 제현이 몸을 숙여 안전벨트를 매 주었다.
“이렇게 긴장하실 줄 몰랐네요. 다음엔 잘 돌려서 거절할게요.”
“아냐. 아버님이 진짜 친절하시고 좋았어.”
“제가 집에 가서 형 얘기밖에 안 하니까 되게 만나 보고 싶어 하시더라고요.”
제현이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움직였다. 나는 기분 좋아 보이는 제현의 옆모습을 감상하며 생일 선물을 고민 중이었다.
‘역시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나.’
반 자포자기 상태로 있다가 번뜩 머리에 무언가 지나갔다. 고민 해결의 기쁨으로 은은하게 웃음을 짓고 있으니 제현이 옆을 힐끔힐끔 봤다.
“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셨을까.”
“몰라도 돼.”
“형이 그렇게 웃으면 저는 조금 무섭더라고요.”
“아, 잠깐만 세워 봐. 나 편의점 좀.”
“뭐 살 거 있어요?”
“응.”
매번 콘돔을 제현이 사 들고 온 게 생각나 이번에는 내가 사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편의점에서 구색용 이온 음료를 들고 콘돔 진열대 앞에 섰는데 종류가 많아서 현기증이 났다. 콘돔을 사 본 적이 있어야지…….
들고 뒤적거리기엔 부끄러워 무슨 눈싸움이라도 하듯이 제품명만 읽다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거 안 맞아요.”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콘돔 박스를 놓쳤다. 귀가 화끈해졌다.
“뭐야, 왜 그렇게 놀라요. 혹시 제거 말고 형 거 사는 거예요? 저는 안 하시는 게 더 좋은데…….”
“어, 아니…….”
“그럼 됐어요. 제가 사 뒀어요.”
제현이 바닥에 떨어진 콘돔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내 손에 들려 있는 이온 음료를 가져가 계산했다. 안 맞는다던 콘돔 박스를 노려보며 그러면 맞는 건 무엇인지 고민했다. 그러니까 대충 제현이 크기를 떠올리며 손으로 둘레와 길이를 가늠하다가 제현이 이상하게 보기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저번에 그렇게 별로였어요?”
“어?”
차에 타자마자 이온 음료를 따서 내 손에 쥐여 준 제현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저번에 하다가 찢어진 적 있잖아요. 그래서 사러 온 건가 싶어서요.”
“아니. 원래 이런 건 번갈아 가면서 사야 하지 않나 싶어서.”
“됐어요. 제 건 제가 사요.”
제현이 해맑게 웃었다. 숙소에 돌아가면 제현이 사 둔 콘돔을 찾아서 제품명과 사이즈를 기억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연상의 자존심이 상해.”
제현이 내 말에 피식 웃었다.
“겨우 두 살 차이에 누가 그런 거 따져요.”
“내가.”
내 진지한 얼굴에 제현이 잠시 골똘히 생각에 빠져 핸들을 톡톡 두들기다가 말을 꺼냈다.
“그럼 오늘 절 마음껏 리드해 주세요.”
“그러려고.”
***
내가 방긋 웃으며 두 손으로 내민 선물을 본 제현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황제현, 생일 축하한다.”
“형, 이건…….”
“생일 선물.”
가죽 재질이 부드럽게 은은한 광을 내뿜고 있어 상품 상세 페이지보다 실물이 훨씬 고급스럽게 생긴 검은색 재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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