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51화 (51/100)

51화.

“아주 재밌었나 봐?”

“형, 진짜 저는 말씀드리려고…… 한 적은 없지만 정말 놀려 먹으려고 그런 건 아니라니까요.”

“말할 기회 충분히 많이 있었잖아. 정말 놀린 게 아니야?”

제현이 눈을 굴리며 부끄러워했다.

“솔직하게 다 말씀드릴 테니까……. 팔 좀 풀어 주세요.”

“싫어. 대답부터 해.”

사실 제현에게 속았다거나 놀림을 받았다는 기분은 하나도 들지 않았지만, 눈치를 보는 제현이 귀여워서 화난 척을 계속했다.

힘으로 날 제압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이쑤시개 같은 내 팔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저렇게 난처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현을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러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언제나 청산유수로 말이 나오던 입이 다시 닫혔다. 얼굴이 붉었다. 무심코 아래를 봤다가 제현의 바지 아래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것에 당황했다.

“왜 세우고 그래?”

“한평생을 함께한 저랑도 대화가 늘 통하는 놈이 아니니까 이해하려 하지 마세요…….”

나라고 저렇게까지 잘 익은 제현을 한입에 털어먹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랭킹전이 우선이라 일단 가둬 둔 팔을 풀고 거리를 뒀다. 제현이 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연습실 구석에 마주 보고 앉아 제현이 가라앉는 것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제가 형이랑 처음 게임을 했던 게…….”

***

인생살이 퍽퍽하다는 게 대체로 공감되는 말이라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와닿는 말이 아니었다. 어려서 그렇게 느낄 수 있다지만 내가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딱히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인생은 쉽다. 중학생이지만 키도 180이 넘었고 얼굴도 이만하면 괜찮아서 길거리에서 심심치 않게 연예 기획사 명함을 받고는 했다. 공부든 운동이든 필요하거나 하고 싶은 일이라면 꽤 잘할 수 있었다.

정작 어려운 것은 게임이었다.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나이츠를 모른다는 말은 사회화가 덜 되어 있다는 말과 같았다.

온라인 게임에는 딱히 취미를 두지 않았는데 어렸을 때부터 동네 친구였던 성환이 제발 같이 하자고 노래를 불러대 잡았던 것을 시작으로 요즘 꽤 열심히 하고 있었다. 다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는 것이 나이츠였다.

“답답하네.”

팀 게임이란 원래 개개인이 잘한다고 잘 굴러가는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심각해도 너무 심각했다. 그나마 괜찮게 하는 성환과 함께 플레이할 때는 그래도 괜찮았지만 혼자 돌리려니 그랜드 마스터 티어임에도 팀원들이 하나같이 사람이 아니었다.

답답함에 모바일 접속이 되어 있는 성환에게 1:1을 걸었다.

[황제반점 : ㅇㄷ?]

[나뚜루 : 학원]

[황제반점 : 언제 와]

[나뚜루 : 10시?]

지금이 8시니까 한 판만 더 하고 성환을 기다렸다가 같이 몇 판 돌리면 될 것 같았다.

[황제반점 : ㅇㅋ]

[나뚜루 : 나랑 하는 거 아니면 버퍼 말고 다른 거 해ㅋㅋ]

[황제반점 : ㄴㄴ버퍼가 재밌어]

딜러가 게임을 이끌어 가기는 쉬웠지만, 더 어려운 난이도의 모드가 있다면 괜히 하고 싶은 게 게이머의 심정 아닌가. 거기다 버퍼는 매칭 시간도 빠른 편이었기에 돌리면 바로바로 매칭이 잡히는 점도 좋았다.

[찌이누(탱커) : ㅎㅇㅎㅇ]

[요들송마스터(힐러) : 차니니님 또 보네용]

[찌이누(탱커) : 저 님 잘함?]

[찌이누(탱커) : 엥 전적 대박이네 님 계속 솔큐 돌림?]

[찌이누(탱커) : 왜 말없?]

[요들송마스터(힐러) : 저 님 전 판에도 말없이 하심ㅋㅋ 채금이라도 당했나? 핑 ㅈㄴ 찍어 대서 개시끄럽긴 함]

딜러 ‘Chanini’의 전적을 검색해 보니 확실히 압도적인 스코어의 승리가 많기는 했다. 그런데 무슨 딜러가 핑을 다 찍지.

보통 딜러는 던지는 게 아니라면 핑 찍을 시간도 없었다. 쓸모없는 핑을 찍어 대면 차단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난하게 버티기 좋은 픽을 했다.

[ 게임이 곧 시작됩니다.]

딜러 옆에 붙어서 상대방 버퍼를 견제하고 있으려니 갑자기 내 쪽에 핑이 연달아 찍혔다. 그리고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탱커 쪽에 핑이 우다다 찍혔다.

[황제반점 : 지원 가라고요?]

채팅 대신 오케이 손 모양을 하고 있는 고양이 기사 마오의 이모티콘을 띄웠다.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강제로 해야 하는 튜토리얼을 끝내면 받는 기본이모티콘 중 가장 귀여운 이모티콘이었다. 말 한마디 없이 핑만 찍던 사람이 저런 이모티콘을 쓰니 웃음이 다 나왔다.

지원하러 가는 동안 혹여 2:1을 하다가 상대방 딜러에게 킬이라도 내주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지만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미친 사람인가?”

피지컬이 남다르다는 건 초반부터 눈치를 챘다. 타겟팅 스킬이 아니라면 잘 맞지도 않아서 체 관리도 잘했고 조금만 옆에서 거들어도 공으로 어시스트가 달달하게 들어왔다.

거기까지는 그냥 평범하게 잘하는 딜러겠거니 할 수 있었는데 도대체 시야를 어디까지 두고 있는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아까부터 세심하게 맵 전반적으로 핑이 들어왔다.

시간이 남아도는 초반이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 적팀 딜러와 전면전을 펼치고 있는데 나머지 적팀이 주요 오브젝트를 챙기고 있으니 막으라는 듯 오브젝트 쪽에 핑을 엄청나게 찍어 댔다.

내가 시야 토템을 박으러 가는 길에 왜 그렇게 퇴각 핑을 찍어 대나 했더니 적팀이 모여서 암살 각을 노리고 있기도 했다. 경이로운 플레이였다.

그랜드 마스터에 꽤 오래 머물면서 천상계 사람들도 꽤 만나 봤지만 이렇게까지 세심한 플레이는 겪어 본 적 없었다.

나름 버퍼로 게임해 오면서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맵을 넓게 보면서 아군이고 적이고 모든 상황을 파악하면서 세세하게 컨트롤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이 사람 실제로 보면 엄청난 통제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늦으면 핑 폭탄이 날아오기에 정신을 다잡으며 부지런히 클릭질을 해야 했다.

이 사람을 데리고 질 수 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완벽한 게임이었다. 마지막 성문을 두들기면서 게임 시간이 너무 짧아서 아쉬웠다.

[찌이누(탱커) : 영어님 버스 잘 탔습니다ㅋㅋ]

[요들송마스터(힐러) : 차니니님 친추 받아주세요ㅠ]

핑은 그렇게 쉬지 않고 찍어 댔으면서 채팅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미 나가 버린 ‘Chanini’였다. 나는 거의 황홀경에 젖어 게임 결과표를 보고 있었다.

이 이상 완벽한 플레이어가 있을까? 안정적이고 압도적인 딜량 그래프가 반짝이는 것 같았다. 뽕을 맞기라도 한 것 같이 심장이 뛰는 게임이었다. 또 하고 싶다.

[Chanini 님이 친구 신청을 보냈습니다.]

“대박.”

바로 수락을 하고 1:1 대화창을 열었다.

[황제반점 : 안녕하세요]

[Chanini : ?]

[Chanini : 아 죄송 잘못 눌렀나 봄 친삭할게요]

[황제반점 : ㅈㅏ깐만ㅇㅛ]

[황제반점 : 제가 잘할게요]

설마 벌써 삭제한 건가 싶어 손이 떨렸다.

[Chanini : ?]

신이 아직 나를 버리지는 않았나 보다. 하늘을 향해 잠시 감사를 표하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황제반점 :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황제반점 : 같이 해 주세요]

생각해 보면 살면서 그렇게까지 어떤 사람에게 구차하게 매달린 적이 있었나 싶었다. 천운이 따랐던 건지 따로 같이 돌릴 사람이 없었는지는 몰라도 의외로 파티 초대를 먼저 걸어 주었다.

[Chanini : 몇 시까지 가능해요?]

[황제반점 : 얼마나 하실 건데요?]

[Chanini : 모름]

모른다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매칭이 잡혔다.

***

“야, 황제현. 어제 나 집에 오면 같이 하겠다는 소리 아니었어? 연락도 다 씹고.”

“어, 미안…….”

“헐, 얼굴 봐. 어제 무슨 일 있었어? 게임하는 거 같던데.”

원래 하루에 세 판정도 할까 말까 했는데 어제 밤을 꼬박 새워 ‘Chanini’와 게임을 돌리다 온 내 상태는 정말 말이 아니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상적인 플레이를 밤새 바로 옆에서 즐겼고 모든 경기는 다시 보기를 전부 저장했다.

그간 학교에서 딴짓해 본 적이 없는데 계속 그 사람이 띄우던 이모티콘이 생각났다. 되게 이상하고 특이한 사람.

그 뒤로도 틈이 나면 함께 플레이했는데 곧 랭커에 다다를 정도가 되자 랭커 승급을 막는다고 트롤들이 너무 많아졌다. 저 사람이 2인분은 거뜬하게 하는 사람이라지만 팀원 절반이 던져 버리면 답도 없었다. 핑 오더도 한계가 있었던지라 오늘따라 더 답답했다.

[황제반점 : 님 혹시 마이크 있나요?]

[Chanini : 있긴 해요]

[황제반점 : 그럼 음성 채팅으로 오더해 주시면 안 되나요?]

[Chanini : 저 욕을 너무 많이 해서 불편하실 텐데]

[황제반점 : ㄱㅊㄱㄱ]

목소리가 궁금했을뿐더러 게임 중에 채팅 하나도 안치고 핑이나 찍는 사람이 욕을 해 봤자 얼마나 하겠냐는 생각이 강했다.

- 씨발, 대가리에 뇌 대신 우동 사리 넣었나. 빡대가리 짓도 정도껏 해야지.

완벽한 오산이었지만. 탱커가 죽은 자리에 핑을 연달아 찍으며 거하게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초 단위로 섬세한 오더가 들어오면서 동시에 다량의 욕설도 함께 쏟아졌다.

‘이 사람 그동안에도 핑 찍을 때마다 1핑 1시발이었겠구나…….’

이런 생각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목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험한 말을 하면서도 시종일관 목소리 톤이 차분했고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아 귀에 쏙쏙 들어왔다.

- 시발…….

물론 욕을 염불처럼 외우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은근히 내면에 화가 많은 사람인가 보다.

- 집중 안 해?

함께 플레이하는 나라고 불똥이 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딴생각하고 있으면 귀신같이 알아채고 혼을 내기 때문에 서둘러 마우스를 움직여 Sorry 이모티콘을 띄웠다.

지난번에 나이를 터서 내가 어리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채팅으로는 꼬박꼬박 존대해 주면서 음성 채팅으로는 저렇게 반말이나 욕설을 뱉곤 했다. 그런데 그게 또 의외라서 좋았다.

누가 나한테 욕하는 게 이렇게 설렐 수도 있다니 혹시 나에게 나도 모르던 변태 성향이라도 있나 싶었다.

시험 기간이라 한동안 접속을 못 하다가 들어오니 이미 게임 중인 ‘Chanini’가 보였다. 상태 창에 2인 랭킹전 플레이 중이 떠 있는 것을 보니 누군가와 함께 플레이 중이었다. 보통 혼자 했는데…….

[황제반점 : ?]

[Chanini : 오늘 같이 못 해요]

[황제반점 : 네]

다음날

[황제반점 : ??]

[Chanini : ㅈㅅ]

[황제반점 : 네]

그 후에도 몇 번이나 말을 걸었지만, 매번 거절당했다. 며칠 뒤에는 혼자서 랭커로 올라가 버려서 함께 매칭도 돌릴 수 없게 되어 말도 걸지 못했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머리를 박고 울적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현, 너 어제 내가 귓 보냈는데 씹고 나가더라.”

“나이츠 이제 안 할 거야…….”

“뭐야, 언제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열심히 돌리더니 왜 그래?”

“그 사람 나 버리고 혼자 랭커 갔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침울해 있자 성환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먹버 당했구나……. 딜러가 버퍼 갈아치우는 거 흔한 일이다. 힘내라.”

모바일 메신저로 접속해 보니 오늘도 아침부터 누군가와 랭킹전을 돌리고 있었다. 요즘 전적을 보면 버퍼를 하는 것 같았다.

‘아, 이 사람이 플레이하는 버퍼 나도 구경하고 싶다.’

이제라도 딜러를 해야 하나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우울한 나날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함께 플레이하면서 몰래 녹화해 둔 영상을 틀어 차분한 시발 소리를 들으며 지냈다.

그러던 중 하루는 ‘Chanini’의 닉네임이 바뀌어 있었다.

[TT Checkmate – 2인 랭킹전 플레이 중]

“엥, 너 차니니랑 아는 사이야? 이 사람 KKCL 준비하는 걸로 유명한 버퍼인데.”

성환이 슬쩍 내 화면을 보더니 말했다.

“KKCL이 뭔데?”

“나이츠 2부 리그. 프로게이머 등용문.”

“프로게이머……. 그런데 버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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