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진형의 얼굴에 잠깐 당황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당황이 사라진 곳을 채우는 것은 절박함이었다.
진형의 절박한 표정을 보면 마음 한편이 통쾌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진형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너 필요해.”
“형은 내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그냥 한결같은 사람이 필요한 거지.”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나처럼 오랜 시간을 들여 곁에 머물렀더라면 진형은 이처럼 말하며 잡았을 게 분명했다. 진형은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 얼마나 자존심 상하던 일인데 이제는 별로 아무렇지 않았다.
“어쩌냐. 나도 사람인지라 변하네.”
“…….”
“우리 그냥 서로 멀리 있자. 그게 서로한테 좋을 것 같아.”
진형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줄게.”
“어…….”
“반응이 왜 그래. 안 된다고, 절대 그렇게 못 한다고 짐 싸 들고 한국으로 돌아올 기세로 질척거리기를 바랐던 거면 지금 말해. 그것도 해 줄 테니까.”
이렇게 순순히 오케이를 해 주리라 생각을 못 해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형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어 누웠다.
“이제 좀 형이랑 같이 있어도 살 것 같다.”
“원래는 죽을 것 같았어?”
“응, 누구라도 좋으니까 형도 언젠가는 꼭 겪어 봐.”
저주라도 하는 것 같다며 진형이 웃었다. 같이 있으면 속 터져 죽을 것 같고, 같이 없으면 속 쓰려 죽을 것 같은 감정을 꼭 겪어 보라고 했으니 일종의 저주라면 저주였다.
진형과 침대에서 한참을 뭉그적거리다가 지운과 합류해 점심을 먹고 진형에게 업혀서 산책로를 따라가고 있었다.
“슬슬 애들 올 때 됐는데 마중하러 갈까?”
“그래요. 생각보다 빨리 오네.”
“해뜨기 전에 갔으니까.”
주차장 근처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 버스가 도착했다. 동진과 제현이 각각 준과 영화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리는 모습에 지운이 배를 잡고 웃어 댔다.
“와, 얘네 죽어 있는 거 봐. 지리산 정기 받으러 가서 왜 다 뺏기고 왔냐고.”
“그래도 둘 다 천왕봉까지 다 올랐어.”
“장하다. 장해! 어땠어? 응? 준아, 좋았어?”
지운이 이것저것 물어봐도 좀비 같은 비명만 내지르는 준이었다. 제현이 흡연 구역 구석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했는지 다 죽어 가는 영화를 바닥에 내려 두고 내 쪽으로 상쾌한 얼굴로 다가왔다.
“형!”
“안 힘들었어?”
“네. 간만이라 좋더라고요. 날씨도 너무 좋았고. 형이랑 같이 못 가서 아쉬워요.”
끝내 주는 산책을 다녀온 대형견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이 말갛게 빛났다. 그늘에 있는데도 건강함이 넘치는 모습이 너무나 눈이 부셔 눈을 가늘게 떠야 했다.
“나는 아마 반의반도 못 오르고 내려왔을걸.”
“제가 업고 가면 되죠. 아, 오늘도 그냥 데려갈 걸 그랬네요.”
제현이 내 담배를 빼앗아 한 번 빨고서 다시 내 입에 물려 주었다. 스스럼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눈치를 못 챘지만, 나 혼자서 왠지 부끄러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형이 그런 날 유심히 보더니 제현을 보다가 제현과 눈이 마주쳤다. 제현이 건방진 표정으로 삐딱하게 말했다.
“뭘 봐.”
나도 진형에게 함부로 말하는 편이었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하는데 진형이 담배 연기를 제현 쪽으로 내뿜었다. 연기에 제현이 오만상을 지으며 손부채질을 연거푸 했다.
“내가 보긴 뭘 봐.”
“보고 싶으면 돈 내고 봐. 닳아.”
“뭐래, 못생긴 게.”
둘이 시시덕대는 건지 싸우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아 모호한 표정으로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진형이 얼빠진 내 표정을 보고 웃다가 내 머리를 헤집더니 담배를 끄고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흡연 구역에는 나와 제현만 남아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둘이 언제 그렇게 친해졌어?”
“안 친했고, 안 친하고, 앞으로도 친할 일 없어요.”
제현이 내가 무슨 소리를 할지 뻔하다는 듯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원천 차단을 시도했다.
담배를 피우는 사이 사람들은 리조트 안으로 들어갔는지 조용해졌다. 퍼뜩 뭔가 생각이 났는지 제현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숨을 쉬며 짜증을 냈다.
“하, 지금 일부러 우리만 여기 두고 간 거네.”
“그게 왜?”
“형, 지금 목발 없어서 안거나, 업어야 하는데…….”
“어, 나 이 정도 거리는 내가 걸어가도 돼. 괜히 힘쓰지 마.”
거의 8시간가량의 등산 코스를 다녀왔으니 힘들 만도 했다. 제현이 내 대답에 더 곤란한 표정을 하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저 땀 많이 흘려서 신경 쓰인단 말이에요…….”
전부터 제현은 자기가 흐트러지거나 완벽한 상태가 아닌 모습을 나에게 보이는 것에 눈치를 많이 봤다. 쭈뼛거리며 티셔츠를 끌어 올려 코에 박는데 올라간 티셔츠 아래로 모양 좋게 자리 잡은 복근이 드러났다. 쟤가 지금 일부러 유혹이라도 하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황제현…….”
“네?”
“혹시 차 키 아직 갖고 있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던 제현의 얼굴이 3초 만에 토마토같이 변했다.
아쉽게도 차 키가 아직도 제현의 손에 있었을 리는 없었다.
제현은 불타는 얼굴로 핸드폰을 부술 듯이 두드려 지운을 호출해 나를 챙기게 하고는 등산을 다녀온 팀원들과 함께 온천을 다녀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따끈따끈하고 촉촉한 몸 상태로 자기 방처럼 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진형과 침대에 누워서 판돈으로 사탕을 걸고 섰다를 하고 있었다.
“찬희야, 뭐 해.”
“아, 어어…… 죽을게.”
“뭐야, 3 땡을 들고 왜 죽었어?”
여덟 끗을 들고 있던 진형이 판에 걸린 사탕을 쓸어 가는 동안 나는 제현을 구경하느라 바빴다. 제현도 내 시선이 자기에게 머무른다는 걸 느꼈는지 뿌듯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재롱이라도 부리듯 예쁜 척을 해 댔다. 하여간 애교가 많은 녀석이었다.
“야, 너 작작 안 해?”
내 집중력이 흐트러진 수준이 아니라 아예 넋이 나간 것을 보던 진형이 급기야 제현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뭘?”
“야, 그냥 너도 들어와.”
진형이 사탕 봉지에서 사탕을 한 움큼 쥐더니 제현에게 던졌다. 제현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바닥에 흩어진 사탕을 주워 담아 침대로 올라왔다.
“너 섰다 할 줄 알아?”
“안 해 봤는데 어떤 게임인지는 알아요. 핸드폰에 족보 틀어 놓고 하면 돼요. 그냥 돈도 벌칙도 없이 치는 건가요?”
“응. 어차피 시간 때우려고 하는 거니까. 왜 뭐가 걸려 있어야 흥이 나?”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제현이 잘 모른다는 것 치고는 흐트러져 있는 패들을 들고 능숙하게 섞었다.
“죽을게요.”
첫 패를 들고 핸드폰으로 족보를 한참을 보던 제현이 패를 내려놨다. 시종일관 방긋방긋 웃고 있으니 뭘 들고 죽었는지 예상도 가지 않았다. 진형이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건드리다가 사탕을 3개 더 걸었다. 내 패는 장삥이었다.
“따당.”
“콜.”
총 사탕은 15개. 진형이 먼저 패를 공개했다. 세륙이라 나의 승리였다. 기분 좋게 사탕을 쓸어 담았다. 패가 꽤 잘 맞아서 진형과 제현의 사탕을 내가 거의 독식했다.
“너무 이기기만 하니까 재미없어. 둘이 해 봐. 구경할게.”
내가 거의 독식하다시피 들고 있던 사탕을 둘에게 반씩 나눠 주었다. 한참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다가 둘 다 심상치 않은 패가 붙었는지 계속해서 판돈이 커지고 있었다.
흥미진진함에 팝콘을 먹듯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물었다. 내가 입 안에서 사탕을 굴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둘 다 마지막 판이라는 것을 예감했는지 둘이 동시에 씩 웃었다.
“내가 사탕 더 많은데 뭐라도 더 걸지?”
“뭘 원하는데.”
“이 방.”
진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했다.
“도박에는 역시 집문서 정도는 걸어야지. 왜, 쫄려?”
“너는 뭐 걸 건데.”
“원하는 거 제시해 봐.”
“이 방 출입 금지로 할까.”
“콜, 올인.”
가진 사탕을 전부 털어 넣는 제현을 따라 진형도 자기 사탕을 한데 모았다. 둘 다 포커페이스가 좋은 편이라 도박사를 했어도 잘했을 것 같았다.
진형이 패를 내려놓았다. 어쩐지 후반에 계속 판돈을 올리더니 일팔광땡을 들고 있었나. 이걸 어쩌나 하는 표정으로 제현을 바라보았다.
제현이 심각한 얼굴로 진형의 패를 보다가 눈썹을 한 번 올렸다. 심각한 얼굴은 페이크였는지 순식간에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며 자기 패를 공개했다.
4월과 7월, 삼팔광땡을 제외한 광땡을 잡는 암행어사였다. 수북이 쌓인 사탕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진형에게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뭐 해. 안 나가고.”
***
진형은 군말 없이 짐을 쌌고 제현이 해맑게 웃으며 카드키를 건네주자 한숨을 푹 쉬고 방을 나섰다. 제현은 승리감이 가득 찬 표정으로 화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너 사실 성격 나쁘지.”
“네, 형 앞에서만 내숭 200% 상태인데요.”
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능숙한 손놀림으로 패를 섞는 게 어쩐지 뒷맛이 좋지 않았다. 의심 서린 눈으로 손을 지켜보고 있자 제현이 혀를 내밀며 웃었다.
“눈치챘어요?”
분명히 패를 한참 섞었는데 삼팔광땡을 바로 뽑아냈다. 그러고 보니 제현이 합류하고 나서는 제현이 패를 섞고 나눠 줬었다. 어……?
“너 섰다 안 해 봤다며?”
“섰다는 안 해 봤는데 화투패로 장난질 치는 건 익숙해서요.”
들고 있는 패를 섞더니 하나씩 순서대로 뒤집자 월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분명히 마구잡이로 섞었는데?’
바로 눈앞에서 보고 있었는데도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어서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보고 있자 제현이 민망해했다.
“제가 손장난을 좀 잘 쳐요.”
“그러면 내가 계속 이겼던 것도?”
“아예 다 장난친 건 아니고 어느 정도 맞춰 놓기만 했어요.”
“사기꾼…….”
앞으로 섰다든 고스톱이든 제현과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너 혹시 포커 같은 거도……?”
“음, 원리는 비슷해서 간단한 스테키나 카드 카운팅 정도는 할 수 있어요. 화투보단 미숙해도 어느 정도는 조작할 수 있을지도요.”
제현과 모든 종류의 도박류 게임을 하지 않기로 정정했다.
“저도 이렇게 치사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이렇게 안 했으면 틈만 나면 형이랑 한 침대에서 뭉개고 있었을 거잖아요. 질투 나게.”
“어차피 내일이면 숙소로 돌아갈 거고 곧 미국으로 돌아갈 사람이잖아.”
제현이 코웃음을 치며 화투를 정리해서 케이스에 넣었다.
“원래 제 방이었어요.”
“그래도…….”
“형, 지금 애인 두고 외간 남자 찾아요?”
애인이라니 단어 선택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져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제현이 그 모습이 영 탐탁지 않았는지 내 위로 몸을 겹쳤다.
“진짜 자꾸 그렇게 섭섭하게 굴 거예요?”
제현이 내 목 근처에서 입맛을 다시다가 한숨을 쉬더니 내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을 잘근잘근 물어 댔다.
“윽, 아파…….”
“목 물고 늘어지고 싶은 거 참은 거니까 형도 참아 보세요.”
“그렇지만…….”
어디 한 번 더 말해 보라는 듯이 힘껏 깨물어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말이 막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는데 인간의 피부란 생각보다 질긴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내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제현의 얼굴이 밝아지며 물어뜯고 있던 내 손바닥도 놓아주었다.
“저는 머물 거고 저 사람은 떠나갈 사람이니까? 이제는 제가 형 안에 잘 파고들었다고 봐도 되는 거죠?”
대답 대신 끌어당겨 내 위로 완전히 포개져 짓누르게 했다. 이 무게감이 주는 편안함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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