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제 거 제가 챙기는데 왜 그러시지. 질투 같은 거 안 하신다면서요.”
“찬희가 왜 네 거야?”
“오늘 저한테 주시던데요. 아, 떠먹여 줘도 안 먹었던 그쪽한테 감사 인사라도 드려야 할까요.”
어깨에 있는 손을 떼어 내고 먼지라도 털 듯이 툭툭 털었다. 진형은 그저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마치 노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의 살기에 가까운 혐오를 이렇게나 내뿜고 있는데 이런 인간이 날 꾀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던 찬희의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웃어?”
“왜요, 웃으면 정드니까 웃지 말까요?”
진형이 피식, 웃더니 돌연 내 멱살을 잡아챘다. 오늘 진짜 세게 나오시네. 눈은 당장 한 대 칠 기세인데 입꼬리는 말려 올라가 웃고 있었다.
“치고 싶으면 쳐요. 저 오늘 기분 좋아서 한 대 정도는 얌전히 맞아 줄게요.”
진형의 눈이 살벌해질수록 내 기분은 좋아졌다. 진형이 그런 나를 눈치챘는지 손을 거둬 갔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가지고.
“너 같은 놈들 사고방식 뻔하지. 찬희야 뭐 말 잘 듣고 얌전하니 홀리기도 쉬웠겠지.”
누가 말을 잘 듣는다는 건지. 내가 아는 찬희는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 절대 아니었다. 밀어붙이면 밀리는 편은 맞지만, 그것도 얼굴이 따라 줘야 했다. 취향이 워낙 확고하신 데다가 시각적인 유혹에 심하게 약하단 말이지. 이 인간도 저 반반한 얼굴 하나로 여태껏 찬희 곁에 살아남았을 것 같았다.
“됐다. 찬희가 좋다면 말릴 생각 없어. 어차피 떨어져 나갈 놈인데.”
“너, 찬희 형에 대해 하나도 모르지.”
“이젠 또 반말이야? 하나만 하라니까.”
“그러면 말 편하게 할까? 찬희 형 저렇게 놔두기 싫으니까 꺼져. 씻기고 재울 거야.”
욕조에서 불편하게 잠들어 있는 찬희를 한 번 보더니 혀를 차고서 나갔다.
***
머리를 어루만지는 기분 좋은 손길에 눈을 떴다. 차에서 졸던 게 마지막 기억이었는데 욕조에서 눈을 뜨니 기분이 이상했다. 체력이 얼마나 모자랐으면 무슨 방전이라도 된 배터리처럼 절전 모드였다.
“깼어요?”
일어나자마자 보이는 게 저 훤칠한 얼굴이라니 꽤 괜찮은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몸은 다 닦고 머리를 감기고 있었는지 한결 상쾌했다. 슬쩍 보니 제현의 옷이 다 젖어 있었다. 내 다리 깁스에는 물 한 방울 안 튀게 잘했으면서 자기 몸은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리를 감기는 손길이 부드러워 기분 좋은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미안. 자 버렸네.”
“괜찮아요.”
“네 방이야?”
“아뇨. 형 방.”
제현이 뭔가 찔리는 표정으로 눈을 돌렸다.
“너 또 진형이 형이랑 싸웠지.”
“음……. 그건 그렇고 감독님한테 전화 왔는데 10시부터 뭐 할 거 있다고 잠깐 내려오래요.”
대답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니 뻔했다. 누가 딜러들 아니랄까 봐 얼굴만 맞대면 싸우기 바빴다.
“싸우다 정들겠다.”
“형, 그 말 진짜 소름 끼쳐요.”
제현이 얼굴을 구기며 샤워기 물을 일부러 내 얼굴에 튀기며 말했다. 저런 반응을 보면 또 안심이 조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
머리를 말릴 시간이 나지 않아 축축하게 젖은 상태로 내려가자 이미 도착한 동진과 준은 종이를 들고 뭔가 써 내려가고 있었다. 코치님이 나와 제현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이번 영상에 올라갈 건데 너무 막 고심하지 말고 가볍게 적어도 돼.”
[ 3각이들 3문 3답 - 체크메이트]
Q1. 무인도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챙길 3가지
Q2. 이상형
Q3. 내 인생 최고의 딜러
아무래도 3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은 것 같았다. 만년 3등 타이틀 짜증 난다. 한숨을 쉬고 펜을 들었다.
1번과 2번은 쉽게 작성했는데 3번에서 막혔다.
‘최고의 딜러라.’
합 맞춰 본 딜러가 셋이었다. 진짜 3이라는 숫자와는 무슨 악연이 있어서 이렇게까지 엮이는지 모르겠다.
일단 지난 윈터 시즌을 함께했던 성환이는 자타공인 안 맞는 조합으로 유명했으니 제쳐둔다고 치더라도 진형과 제현 중에서 하나를 고르자니 고민이 깊어졌다.
게임 스타일로만 보자면 진형이 제일 최적의 궁합이긴 했다. 이쪽에서 쿵 하면 저쪽에서 짝하고 하나하나 짚어 주지 않아도 알아서 내 생각대로 움직였다. 체스판의 말과 같이.
반면에 제현은 쿵짝이 척척 맞는 것은 아니지만 맞부딪히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게임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새로운 루트를 찾아내고 파고들어 나에게 보여 주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진형이고 제현이고 닉값을 톡톡히 하는 편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게 답을 적었다. 가볍게 적으라고 해 놓고 이런 난감한 질문을 주면 어쩌라는 건지.
“다들 답변 다 적었으면 올라가서 쉬어. 새벽에 출발할 거니까.”
겨우 이거 하나 적자고 사람을 불렀다고 준이 투덜거리다가 올라갔다. 쟤도 나와 체력이 비슷한 편이라 등산하다 실려 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었다. 옆을 보자 제현이 방긋 웃었다. 얘는 걱정 없을 것 같다.
“찬희야, 제현아. 안 피곤하면 짧게 게임 하나만 찍고 가라. 준이랑 동진이는 아까 밖에서 찍었는데 너희는 찾아도 없더라.”
뭐라 대답도 안 했는데 촬영 준비가 완료되어 있는 의자에 앉혔다.
“무슨 게임이요?”
“내가 두 개 말하고 하나둘셋 해 줄 테니까 둘이 동시에 더 좋은 거 말하면 돼. 진짜 금방 끝나.”
제현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실방실 웃으며 의자를 옮겨 냉큼 붙어 앉았다.
“짜장면, 짬뽕. 하나둘셋.”
“짜장면.”
“짬뽕.”
첫 번째부터 선택이 어긋났다.
“조커는 왜 짜장면이야?”
“기본이니까요.”
“쳌메는 왜 짬뽕이야?”
“국물이 있어서…….”
워낙 먹는 게 느리고 적다 보니 먹다 보면 면이 불어나 버리는 게 더 많았다. 둘 중 뭐든 상관없었지만, 국물이 있는 편이 나았다.
“산, 바다. 하나둘셋.”
“산.”
“바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산이 더 좋아?”
“아, 저 높은 곳 좋아해서요.”
“그럼 다음 게임. 강아지, 고양이. 하나둘셋.”
“고양이.”
“강아지.”
“강아지라고요?”
“귀엽잖아…….”
그 뒤로도 몇 개를 더했는데 죄다 선택이 달랐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가. 이러니 게임을 할 때 오더가 갈리고 콜이 뒤죽박죽이 되는 건가 싶었다.
“이제 마지막 게임. 나는 다시 태어나도 딜러, 버퍼 할 거다. 예, 아니오. 하나둘셋.”
“예.”
“예.”
그래도 하나는 맞는군 싶었다. 제현이 뿌듯한 표정으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주먹으로 가볍게 부딪히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웃음을 참는 제현이었다.
“보, 보통 하이 파이브 해 주지 않아요? 주먹을…….”
고개를 숙이고 어깨까지 떨며 숨죽여 웃는 모습에 부끄러웠다.
“오케이. 둘 다 이제 자러 가. 제현이는 지금 자도 몇 시간 못 자니까.”
“네.”
제현이 나를 안아 들고 촬영 스태프님들께 인사를 꾸벅꾸벅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진형은 지운과 할 게 있다며 방을 비운 상태였다.
“그냥 잠들기 아쉽지 않아요?”
“너 아까 못 들었어? 나는 몰라도 너는 4시부터 산 오른다잖아.”
“그래 봤자 초보자 코스잖아요. 그 정도는 별로 안 힘들어요.”
산 좋아한다는 사람한테는 정상까지 4~5시간 걸리는 코스가 초보자 코스인가 보다. 제현이 침대에 겹쳐 눕고는 품 안 가득 안았다. 그리고 내 목덜미를 잘근잘근 물어 대기 시작했다.
“야, 진형이 형 오면 어쩌려고 그래. 그리고 나 진짜 더 했다간 죽을 것 같아.”
“알아요. 그냥 물기만 할게요.”
“자국 안 남게 해.”
“그건 좀 힘든데요. 형 피부 너무 연해서.”
제현이 입술을 혀로 핥으며 입을 떼면서 말했다.
“그런데 물지 말라는 말은 안 하시잖아요.”
씩 웃으며 내 손가락을 끌어다 와작와작 깨물었다. 말리지 않으니 자국이 남아도 상관없는 곳을 찾아 무는구나. 진심으로 깨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약간 이갈이 시즌의 강아지 같고 귀여워 보이는 게 내가 이 녀석에게 단단히 감기긴 했나 보다.
***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떴다. 눈이 부셔서 눈을 못 뜨고 있으니 머리를 만지던 손이 눈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가려 주었다.
“깼어?”
“응…….”
진형이 옆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자기 전에는 분명 제현이 있었는데 사람만 홀랑 바뀌니 기분이 묘했다.
“언제 들어왔어? 어제 늦게까지 안 오던데.”
“지운이 형이랑 뭐 좀 찍다가 얘기 나누다가 보니까. 그래도 12시쯤에는 왔어. 걔가 내 자리에서 자고 있더라.”
“무슨 소리야. 걔 내 침대에서 잤는데.”
“그러니까 내 자리라고.”
진형이 피식 웃으며 누웠다.
“배 안 고파? 밥 먹으러 갈까?”
“됐어.”
온몸을 누가 작신작신 밟아 놓은 것처럼 뻐근했다. 진형은 옆에서 잠들려는 폼을 잡고 있었다. 이대로 재웠다가는 평소처럼 나를 끌어안고 잠들 것 같아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붙였다.
“형, 미국 언제 돌아간다고 했지?”
“왜 너나 지운이 형이나 날 못 보내서 안달인 것 같지.”
진형의 미간이 조금 좁혀졌다. 뜨끔한 기분에 눈알을 굴렸다. 사실 진형이 지운한테든 나한테든 여기저기서 구박데기 취급받는 모습을 보면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진형에게도 진형이 바다 건너 멀리 미국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좋지 않은가 싶은 점이었다.
“나 이번 스프링 시즌은 몰라도 NKL 지난 윈터 시즌 경기는 챙겨 봤어.”
“나 보려고?”
“응, 잘하더라. 나는 그때 성환이랑 사이 별로 안 좋았는데 형은 팀원들이랑 친해 보이더라고.”
“그래? 평범했는데.”
MVP의 메인 버퍼는 Carnival 선수로 피지컬은 떨어지지만, 경력이 오래된 선수라서 순간의 판단력과 리더십이 좋은 노련한 선수였다. 각국의 명문 버퍼 C 가문이라며 나와 중국의 Correct 선수 등과 자주 묶여 소개되기도 해서 얼굴이 익숙했다.
북미 리그가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덜 치열하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요즘은 각국 리그들이 실력 상향 평준화가 이루어져서 그 말도 다 옛말이었다.
거기서 잘 적응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완벽한 팀워크로 우승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는데 속이 쓰렸던 기억이 났다. 진형이 생애 첫 우승컵을 나 없이 들어 올리는 모습은 유독 반짝반짝 빛이나 더욱 자괴감이 몰려들어 똑바로 볼 수조차 없었다.
“오히려 형은 거기가 더 잘 맞는 것 같더라.”
게임도 게임이지만 이 사람, 저 사람 안 가리고 가볍게 만나는 것도 한국에서나 천인공노할 쳐 죽일 놈 취급이지 외국에서는 라이프 스타일 아닐까 하는 내 선입견도 있었다.
“네가 뭐라 생각하든 나는 너랑 제일 잘 맞아. NKL도 너랑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싫어, 난 여기서 우승할 거야.”
“우승해. 서머 시즌 우승하고 나한테 돌아와. 우리 팀 프런트에 잘 얘기해 줄 수 있어.”
진형의 시선이 내 얼굴에 내려앉았다. 가장 곁을 많이 내줬던 사람이라 그런지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많이 닮아 있었다.
나는 저 눈빛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은근한 소유욕이었다. 본인을 내던지지는 않겠지만 곁에 머물겠다는, 그리고 그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마치 내가 제현을 손에 쥐어야 할지 놓아야 할지 갈팡질팡했을 때와 비슷했다. 고개를 저어 의사를 내비치자 진형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나, 왜 내가 형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아.”
근육통에 쑤시는 몸을 일으켰다.
“가질 수 없을 것 같으니까 한번 가지고 싶었나 봐. 한 번도 손에 들어 본 적 없는 우승컵같이.”
등 떠밀려 시작한 프로게이머 생활이라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 승부욕과 도전 정신이 한몫했다. 그리고 그 성질은 나를 무언가에 끈질기게 집착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첫걸음이 진형이었던 것 같다. 살면서 가장 오래 앓았던 열병이 개운하게 나은 것 같았다.
아침 햇살이 반투명한 커튼을 뚫고 침대에 내려앉고 있었다. 몸 상태와는 상관없이 더없이 상쾌한 기분에 진형에게 밝게 웃으며 말했다.
“나 이제 형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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