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45화 (45/100)

45화.

영화가 당황했는지 잡은 내 손에 힘을 주며 눈을 광속으로 깜빡였다. 제현의 낮은 저음이 음침하게 흘러나왔다.

“너, 지금 내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내 버퍼한테 프러포즈를 해?”

아무래도 탱커-힐러, 딜러-버퍼가 세트처럼 불리다 보니까 나이츠 유저들은 오래된 듀오들을 부부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무리 합 맞추는 것을 결혼 생활처럼 말하긴 한다지만 프러포즈라니.

영화도 당황했는지 내 손을 놓고 손을 저었다.

“아니, 제현이 형. 그게 아니라요.”

“건방지게 굴지 말고 더 크고 와.”

제현이 막무가내로 나를 어깨에 들쳐 메고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도 양손을 허공에 둔 채 굳어 있는 영화가 영 불쌍하게 보였다.

나를 자기 방으로 쌀가마니 옮기듯 들고 온 제현은 나를 소파에 내려놓고 한참을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벽에 머리를 박았다.

아까 진형에게 사과하라고 한 뒤에는 나랑 눈도 잘 안 마주치고 말을 걸어도 냉랭한 얼굴로 걸더니 저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아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풉…….”

결국,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갔다.

“형은 지금 제가 웃겨요? 예?”

얼굴이 벌겋게 되어서 따지는 제현을 보니 참을 수 없어서 배를 잡고 어깨를 떨었다.

“질투해?”

내 질문에 제현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당연한 걸 왜 물어봐요. 항상 해요. 매일 해요. 시도 때도 없이 해요.”

손가락을 벌려 사이로 나를 힐끔 보다가 다시 벽에 머리를 박는 제현이었다.

“권진형만으로도 충분히 힘들거든요. 제발 신경 쓰일 일 더 만들지 말아 주세요. 저 진짜 이러다 미치면 형 탓이에요.”

“그게 왜 내 탓이야.”

“맞아요. 사실 형 탓 아니고 그냥 제가 미친놈인 거 형 탓으로 덮어씌우는 거니까 형 인생이 기구해서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세요. 절 견디고 자소서에 제 이름 넣으시라고요.”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뱉고 있는 것 같은 제현이었다. 아무래도 최근 진형과 부딪히면서 스트레스를 너무 받은 것 같았다.

어떻게 달래 줘야 할지 고민하는데 제현이 여전히 머리를 벽에 딱 붙인 채로 귀 끝이 붉어진 상태로 말했다.

“괘씸하잖아요. 형은 제 버퍼인데…….”

말끝이 점점 흐려지는 게 본인도 이 상황이 적잖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얘 오늘 왜 이렇게 귀엽게 굴지.

“야.”

부르는 소리에 제현이 벽에 머리를 박은 채로 어깨만 움찔거렸다.

“대답 안 하면 은퇴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제현이 돌아보았다.

“농담인데 잘 먹히네.”

“형, 진짜 짜증 나요.”

“네가 올래, 내가 갈까.”

내키지 않아 보였지만 얌전히 다가와 다소곳하게 내 앞에 앉는 제현이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을 치우게 하자 방구석에 시선을 내리깔고 나를 보지도 않았다. 진짜 깜찍하게 구네.

매끈한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입 벌려 봐.”

“네?”

대답한다고 벌어진 입술에 달려들어 혀를 밀어 넣었다. 질척한 소리를 내며 혀들이 엉겨들었고 제현의 고개가 한껏 젖혀졌다. 제현은 매번 자신이 참는 것처럼 생각했지만 이쪽도 자주 여유를 잃었다.

예전에는 당당하게 나는 담백한 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지만 요즘엔 가만히 있다가도 문득 몸에 열이 올라 무슨 병이라도 걸렸나 싶을 정도로 몸이 쾌감을 찾았다.

슬며시 눈을 떴는데 제현이 아직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입술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거뒀다.

“키스할 때 눈도 안 감고 매너가 없어.”

제현이 다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잠깐 뒤로 물러섰다. 나는 잠시 성추행범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입술을 핥았다.

“형, 지금 이걸로 때우고 넘어가려고 이러시는 거죠. 진짜 나빴어요.”

“왜. 별로였어? 다신 하지 말까?”

“…….”

제현이 한없이 억울한 눈빛을 보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가 타격감 좋게 반응해 주니까 진형이 형도 계속 시비 거는 거 아냐. 내가 무시하랬잖아.”

“무시할 만해야 무시하죠.”

“무시가 안 돼? 진짜 둘이 눈이라도 맞는 거 아닌지…….”

제현이 진짜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얼굴이 구겨졌다.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저 귀 좀 씻고 올게요. 진짜 와, 내가 살다 살다 와…….”

터덜터덜 화장실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무리 생각해도 제현과 진형이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에서 썸타기 직전의 주연들 같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

“셀프 바비큐장이라 고기 우리가 구워야 해. 고기 잘 굽는 사람? 동동이 빼곤 전멸인가?”

“내가 할게.”

진형이 웃으며 집게를 들자 지운이 손등을 짝 소리가 나게 후려쳤다.

“너 당장 내려놔. 또 태워 먹으려고 그러지?”

“전에 강릉 갔을 때 얘기를 아직도 하는 거야? 그때도 조금 오버 쿡 된 거지 태운 거 아냐.”

“무슨 소리야. 멀쩡한 고기를 석탄으로 만들어 놓고.”

지운의 말에 나와 동진이 동시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게요.”

“혀니혀니, 고기 구울 줄 알아?”

“태워 먹진 않아요.”

지운이 진형의 손에서 집게를 뺏어 제현에게 들려 주었다. 진형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산보다는 바다였지 않아?”

“응.”

“팀원들이랑 산타 모니카에 갔었는데 해변이 진짜 예뻐서 네 생각이 나더라. 한 번쯤 놀러 와.”

“거기서 월드 시리즈 하면…….”

바다는 좋지만 아무래도 LA는 너무 멀었다. 재작년에 뉴욕에서 했으니 당분간은 미국에서 나이츠 월드 시리즈가 열리진 않을 것 같았다. 올해는 프랑스에서 개최될 예정이었고, 내년에는 한국에서 열릴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더니 제현이 목장갑을 낀 채 잘 구워진 고기가 담긴 접시를 내 앞에 놔주었다. 불 가에 있다 와서 그런지 얼굴이 붉었다. 아직 화가 다 풀린 것은 아닌지 나를 쳐다보지는 않고 있었다.

“잘 먹을게.”

“당신 먹으라고 열심히 구운 거 아닌데요.”

“응, 배고팠는데 고마워. 찬희는 내가 잘 챙기고 있으니까 고기 열심히 구워.”

진형이 방긋방긋 웃으며 고기를 한 점 들었다. 제현의 말이 맴돌며 떠오른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입으로 나왔다.

“여보 당신…….”

그 소리에 제현의 걷어 올린 팔에 실시간으로 닭살이 오도독 돋는 것이 보였다.

“형…… 세상에는 할 수 있는 농담과 아닌 농담이 있어요.”

세상 싸한 표정으로 다시 고기를 구우러 떠나는 뒷모습에 웃지 않으려 입을 틀어막았다.

“찬희야. 내 생각에 쟤 놀려 먹는 사람은 내가 아니고 너야.”

“나는 그래도 되는데 형은 그러지 마.”

진형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쌈을 싸서 내 입에 넣어 주었다.

“요즘 네가 참 낯설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카메라도 계속 돌고 있다 보니 편안하게 밥을 먹기 영 힘들었다. 옆에서 자꾸 먹이려 드는 진형도 귀찮아 진형 앞에 고기 접시를 밀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담배 태우러. 형은 배고프다고 했으니까 따라오지 말고 먹기나 해.”

슬슬 걸어 다니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흡연 구역 구석 자리에 숨어서 두 개비째 물고 있었다.

한참 고기를 굽다 잠깐 담배를 피우러 나왔는지 흡연장에 들어선 제현이 담배를 물다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언제 오셨어요?”

“좀 됐어.”

머뭇거리다가 옆에 한자리를 건너서 앉았다. 주머니를 뒤지는 모습을 보아하니 라이터가 없는 것 같아 팔을 뻗어 불을 붙여 줬다.

“담배 맨날 들고만 다니고 잘 안 피우더니.”

“저 원래 안 피웠어요. 형 드리려고 갖고 다니다 보니 피우게 된 거지.”

“무슨 소리야. 너 나랑 같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제현이 나랑 있을 때 외에 먼저 흡연실에 가거나 담배를 피우고 있었던 적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갈 때 따라와서 피운 적은 있었어도.

“그냥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면 이상해 보이잖아요. 뭐라도 물어야지.”

제현이 연기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뱉어 냈다. 그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멋진 것과는 별개로 동진이 담배 끊는다고 껌이니 사탕이니 달고 살다가 10kg가 넘게 살이 쪄서 이건 벌크업이 아니고 살크업이라며 우는소리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사실 진형이 물려 준 이후로 스트레스받을 때라거나 술을 마시면 담배부터 찾았다. 니코틴 중독에서 탈출하려고 몇 번 시도는 해 보았으나 매번 실패했다. 내가 사람 하나 버렸구나 싶어서 사과부터 했다.

“그, 미안하게 됐다.”

“괜찮아요. 형 담배 피우는 거 알자마자 든 생각이 뭔지 아세요? 같이 금연하려면 빨리 흡연자가 되어야겠다. 그거였어요.”

“나 금연 생각 없는데.”

“들게 할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 오히려 더 경고처럼 들렸다. 산속이라 서늘한데 제현의 얼굴에는 아직 식지 않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얘처럼 잘 웃는 애가 또 없는데 오늘은 제대로 웃는 모습 한 번을 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방 바뀐 게 그렇게 서운해?”

“네, 유치하죠?”

전혀 유치하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 살면서 원하는 거 못 가져 본 적 없어요. 인생 쉽게 살았다고 생각하셔도 돼요. 진짜 그렇게 산 거 맞으니까.”

제현이 담뱃불을 손가락으로 튕겨 냈다.

“형도 내가 더 노력하면 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시간은 노력으로 어떻게 안 되잖아요. 내가 지금 제일 필요한 건 시간인데. 아무리 날고 기어도 결국 뒤처진 채 도돌이표인 것 같아서 자꾸 짜증 나요.”

내가 진형의 곁에서 느끼는 세월이 주는 안정감이 제현에게는 그대로 불안감이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손을 뻗어 귓불을 매만졌다. 말랑말랑하고 따듯했다.

“하지 마요.”

가라앉은 제현의 눈과 마주쳤다.

“형한테 서운한 채로 있고 싶은데 형이 만지면 풀릴 것 같으니까 그렇게 막 만지지 마세요.”

“만지면?”

일어서려는 제현의 팔을 붙잡았다.

“막 만지면 어쩔 건데?”

“제가 형 앞에서 무슨 힘이 있겠어요.”

제현이 곤란한 표정으로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사람을 구멍이라도 낼 것처럼 곧은 시선을 보냈던 이후로 이렇게 자신 없는 표정은 지은 적 없었다. 구석진 흡연장은 어둑어둑했는데 제현이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역시 안 되겠다.

“너 내 거 하자.”

다분히 충동적이면서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여태까지의 제현이라면 드라마틱한 반응을 하며 놀라거나 할 줄 알았는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그 반응에 오히려 내가 좀 당황했다.

“전 예전부터 형 거였어요.”

또 당연한 소리를 묻는다고 가볍게 핀잔이라도 주듯이 말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깊게 한 번 하더니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흡연장을 나섰다.

나만 얼빠진 표정으로 남아 있었다. 하여간 내가 고백만 하면 다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는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한 건지,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한 번에 알아듣는 건지.

목발을 챙길 생각도 못 하고 제현을 뒤쫓아 뛰다가 휘청이자 제현이 한걸음에 되돌아와 나를 붙잡았다. 그대로 자빠지는 줄 알고 철렁한 가슴에 숨을 헐떡이며 급하게 말을 꺼냈다.

“너 내 거 하라고.”

놀란 제현의 심장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제현의 멱살을 붙잡고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며 다시 말했다.

“날 네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너 나한테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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