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나는 연습실에서 제현과 붙어 앉아 지난 준결승 경기를 복기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패배한 경기를 오늘 보는 것은 좀 잔인한 일이 아닌가 걱정했는데 제현은 미뤄 두느니 당장 자신의 잘잘못과 실수를 체크해야지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하나둘 좀비와 같은 모습으로 연습실로 들어왔다. 집에 갔을 줄 알았던 지운이나 진형이 들어왔을 때는 조금 놀랐다. 평소라면 빈방이 있겠지만 아카데미생들이 몰려온 마당에 잘 곳이 녹록지 않았을 텐데.
“어디서 잤어요?”
“그냥 뭉쳐서 잤어. 동동이랑 같이 잤더니 온몸이 아파. 야, 영화야 네 침대에서 거의 세 명 자지 않았어? 살아 있냐.”
“넵, 괜찮습니다.”
숙취로 좀비같이 걷는 지운의 옆에 조금 피곤해 보이는 영화가 있었다.
“너도 술 마신 거야?”
“아뇨. 저 그런 거 안 해요…….”
나쁜 짓을 했냐고 의심이라도 받은 것처럼 바짝 긴장해서 대답하는 모습이 놀란 햄스터 같았다.
“뭐야, 황제현. 어제 술자리도 피하더니 아침부터 뭐 하고 있었어?”
김준이 제현이 노려보고 있던 화면을 보더니 히익 놀랐다.
“독한 새끼…… 저걸 벌써 보고 있네. 나는 이번 주 내로는 복기 안 할 거야. 아니 못 한다…….”
“그래도 해야지. 하고 나면 의외로 개운해.”
준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옆구리 쪽으로 팔이 쑥 들어와서 나를 들어 올려 화들짝 놀랐다.
“왜 그렇게 놀라.”
분명히 늦게까지 술자리를 함께했을 게 분명하면서 혼자만 멀끔한 얼굴을 자랑하고 있는 진형이었다. 이게 얼굴 탓인지 아니면 동진처럼 체력이 좋아서 이겨 내는 건지는 모르겠다.
“잘 잤어? 열은 좀 내린 것 같네.”
“내려놔.”
“싫어.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발걸음을 떼는 진형의 팔을 제현이 턱 붙잡았다.
“찬희 형 아침 드신 지 얼마 안 됐어요. 점심 저랑 조금 늦게 먹을 예정이에요.”
그리고 넘기라는 듯 양팔을 내 쪽으로 뻗었다. 기묘한 기시감이 드는 게 분명 어제도 이랬던 것 같은데.
“잘 모르나 본데 찬희가 원래 좀 틈날 때마다 먹이지 않으면 마르는 체질이라.”
“강제로 먹여 봤자 역효과 나는 거 모르시는 거 아니죠?”
음, 왜 갑자기 또 이런 분위기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먹지 않는 쪽이 좋아 제현에게 몸을 뻗었다. 문제는 진형이 나를 붙잡고 버티고 있었다. 두 남자에게 붙잡혀 들린 채로 허공에 매달린 기분이란 유쾌하지 않았고 몸도 불편했다. 진형과 제현 둘 다 말없이 웃으며 그들만의 싸움을 펼치고 있었고 중간에 끼어 있는 나만 고생이었다.
“그만들 하세요.”
한숨을 푹 쉬는데 영화가 수줍게 배시시 웃으며 중간에 끼어들었고 한순간에 나를 낚아채 들어냈다. 아니, 이젠 나보다 10cm도 작은 애도 나를 이렇게 번쩍번쩍 들고 다닐 수 있는 건지.
진형과 제현도 당황을 감추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찬희 형 곤란해하시잖아요.”
160대의 키를 가진 영화에게 안겨 있는 느낌이란 생소했지만, 평소보다 시야가 낮아서 은근한 안정감이 있었다. 마냥 순둥한 아기 햄스터 같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힘이 센 편이었나 보다.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나만 찬희 형 못 드는 거야? 나만? 내가 여기 최약체인 거야?”
그 뒤로 나를 들어 보겠다며 준이 별 생쇼를 다 했지만, 안기는커녕 업는 것에도 실패해 내 자존심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
“자, 다들 모인 김에 어제 얘기했던 지리산 일정에 대해 말해 줄게.”
“와…….”
다들 축 처진 감탄사를 뱉었다. 또 3위를 하게 된다면 지리는 지리산 정기를 받고 오겠다던 공약을 걸어 버리는 바람에 업보를 청산해야 했다.
좋은 일로 가는 공약도 아니었으니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갔다가 서머 시즌 준비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이해되지 않는 점은 지운과 진형이 일정 설명회에 참여했다는 점이었다.
“일종의 단합 대회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영상 촬영을 계속할 예정이니까 참고하고. 콘텐츠는 일정표에 간략하게 적혀 있어.”
나눠 준 일정표를 보니 등산이 주요 일정이라 나는 가 봤자 거의 리조트에서 보낼 것 같았다.
‘그럼 딱히 가지 않아도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딱 걸렸는지 감독님과 눈이 마주쳤다.
“찬희는 다리 때문에 등산은 못 하더라도 가야 해. 이번에 지운이랑 진형이도 시간이 된다고 해서 함께 가기로 했다. 진형이는 NKL 2회 연속 우승팀 소속 딜러니까 다들 최대한 같이 시간 보내면서 많이 배워.”
지운을 보자 어깨를 으쓱했다. 제현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진형을 노려보고 있었다. 원래 싸우다 정든다던데 저거 저러다 둘이 눈이라도 맞는 거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때 제현이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형, 지금 이상한 생각 했죠.”
“너 혹시 독심술 할 줄 알아?”
“아뇨, 방금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쳐서요.”
본능적인 감각이었나 보다.
“그럼 다들 잘 추스르고 좀 쉬어. 너무 풀어지진 말고.”
“네.”
***
멀미약을 분명히 챙겨 먹었는데 버스에 올라타기도 전에 멀미가 나는 것 같이 울렁거렸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는 매 순간이 고비였다. 헛구역질을 참으며 눈을 감고 주먹을 쥐고 있자 따뜻한 손이 내 주먹을 감쌌다.
“형, 진짜 얼굴 안 좋아요.”
“토할 것 같아.”
“토할래요?”
옆자리에 앉은 제현이 가방을 뒤적여 봉투를 찾다가 마땅한 게 없었는지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너 지금 네 손에 토하라고 하는 거야?”
“딱히 쓸 만한 게 없는데 어떡해요.”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아니 손에 받아서 뭘 어쩔 건데.
“됐어.”
참지 못한 웃음을 흘리며 제현의 품에 기댔다. 따로 향수 같은 걸 뿌리지 않는 제현의 몸에서는 나와 같은 보디 워시 향만 났다. 당장이라도 뒤집힐 것 같던 속이 조금 진정됐다.
“머리…….”
“네?”
“머리 쓰다듬어 줘.”
요즘 버릇이 잘 못 들었는지 누가 머리를 쓰다듬어 줘야 잠이 잘 왔다. 잠이 들려 할 때 제현이 한숨을 쉬며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았다.
“미치겠네…….”
제현 덕분에 한숨 자고 일어나니 리조트에 도착해 있었다. 확실히 산속에 있어서인지 공기가 맑았다.
“누구 마음대로 그래요?”
“저번에는 반말 찍찍 잘도 하더니 다시 존대야? 하나만 해. 그리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상관이 왜 없어요?”
짐 챙기러 먼저 내린 제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가 보니 진형과 당장이라도 멱살잡이할 기세인 제현이 보였다.
“왜 싸워?”
둘이 내 목소리에 놀라서 돌아보았다.
“싸우는 거 아니야. 내가 방을 좀 바꿨다고 화가 많이 났나 봐.”
“방을 바꿔?”
“응. 나는 어차피 너랑 시간 더 보내고 싶어서 온 거고, 감독님도 내가 너랑 써도 된다고 오케이한 일에 이 난리네.”
진형이 곤란하다는 듯이 웃자 제현이 고개를 돌리며 인상을 썼다. 진형의 성격상 뭔가 하기로 했다면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감독님 구워삶는 거야 늘 해 왔던 일이니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현이 거기에 저렇게 화를 내봤자 자기만 예민한 사람이 될 텐데. 어휴, 아주 놀아나는구나.
“황제현, 형한테 짜증 낸 거 사과해.”
“제가 왜요.”
“방 바뀐 게 뭐 별거라고 형한테 그렇게 화를 내. 사과해.”
“싫어요.”
잠시 버티던 제현은 자기 캐리어를 번쩍 들고서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저 둘이 싸우니 정말 골치가 아팠다.
“왜 표정이 그래. 나랑 같은 방 쓰기 싫어?”
“싫고 말고가 어딨어. 형 맘대로 군 건 그렇다고 쳐. 그런데 내가 쟤 놀려 먹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언제 놀렸어?”
하여간 발뺌 하나는 명품이다.
“나 머리 아프니까 둘이 싸우지 좀 마.”
“알잖아. 나 평화주의자인 거.”
평화주의자라. 평화롭긴 하지. 본인만 평화로워서 문제긴 해도. 목발로 진형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때렸는데 아프지도 않은지 방긋 웃었다.
간단하게 리조트 앞 한정식집에서 식사하고 쉬다가 저녁에 리조트에서 바비큐 겸 촬영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내일 아침 일찍부터 지리산 등산을 가야 하니 표정이 어두웠다지만 다리를 다친 덕분에 리조트에서 휴양을 즐길 수 있는 나는 다른 이유로 어두웠다.
“놓으세요.”
“왜? 내가 먼저 집은 건데?”
“많이 처드셨어요.”
“나 먹을 거 아니야. 찬희 줄 거야.”
마지막 남은 고추튀김을 두고 또 신경전을 벌이는 제현과 진형이었다.
“제가 드릴 테니 놓으세요.”
“내가 더 가깝잖아.”
지겹지도 않은지 얼굴만 마주치면 저렇게 말다툼을 벌이니 저절로 두통이 일었다. 아까 4인용 테이블에 앉을 때만 해도 둘 다 내 옆 의자를 차지하겠다고 난리였다. 결국 진형이 내 옆자리, 제현이 맞은 편, 대각선으로는 영화가 앉아 있었는데 영화가 제현과 진형을 번갈아 보면서 한숨을 쉴 지경이었다.
“영화야, 다 먹었으면 일어나자.”
“네, 형.”
둘이 실컷 싸우게 놔두고 영화와 먼저 리조트로 향했다.
“저기, 찬희 형.”
“응?”
“잠깐 저랑 얘기 나눠 주실 수 있나요?”
리조트 입구 옆에 벤치가 잘되어 있길래 앉아서 얘기하면 좋을 듯해 앉고 목발을 내려놓았다. 멀뚱하게 서 있는 영화를 보면서 옆자리를 두드리자 냉큼 앉은 영화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했다.
“저, 저 찬희 형 데뷔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그 Chanini 계정 때부터요.”
그 계정이면 데뷔도 하기 전이니까 정말 한참 전이었다. 잠깐. 그 시절부터 나를 알던 버퍼라고 하니 머리에 한 사람이 갑자기 떠올랐다.
내가 딜러 할 때 함께 게임을 함께 했던 버퍼가 한 명 있었다. ‘황제반점’이라고 게임 머리가 워낙 좋았던 친구라서 왜 프로게이머 안 하는지 궁금했는데 이미 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가움에 밝아진 내 표정에 영화가 쑥스럽게 웃었다.
“KKCL에는 체크메이트 키즈라는 말이 있어요. 형 데뷔하고 버퍼 포지션 가고 싶어 하던 아카데미생들 그렇게 부르거든요? 제가 그중에 한 명이에요.”
“어, 영광이네…….”
버퍼가 단순히 딜러의 펫 취급에서 벗어나고부터 버퍼 포지션의 지원이 늘어났다고 듣기는 했다. 팀 트라이앵글이 트릭스 게이밍과 처음 계약할 때 연봉 계약을 진행하면서 정확히는 몰라도 내가 제일 높은 연봉으로 계약했다는 점은 형들에게 조금 미안한 점이었지만 다른 버퍼 포지션의 선수들이나 아카데미생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형처럼 완벽하게 플레이하는 게 꿈이었는데 못 할 것 같아요.”
“왜 그런 나약한 소리를…….”
“아, 아니. 제 성향이 버퍼랑 안 맞는 것 같다고 감독님이 딜러로 포지션 변경 권유하셨거든요.”
영화는 버퍼치고 공격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 수비적인 플레이를 잘하지 못하고 맵을 넓게 쓰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전투 지향적인 데다가 피지컬도 좋은 편이니 확실히 버퍼보다는 딜러가 잘 맞을 것 같았다.
“제 생각에도 딜러로 가는 게 더 맞을 것 같긴 한데 아쉬워서 선뜻 그러겠다고 못 하겠더라고요.”
“나도 아쉽네. 그래도 딜러가 더 잘 맞을 것 같아.”
“형 빈자리 제대로 못 채워 놓고 도망치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도 들었어요.”
2군에서 잘하고 있다가 내 부상으로 급하게 1군 팀에 합류한 거라 부담도 많이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동안 씩씩하게 견뎌 준 게 얼마나 고마웠는데 표현을 못 해 줘서 저런 생각이 들었나 싶었다.
“아냐, 잘했어. 그런 생각하지 마. 나는 네가 버퍼를 하든 딜러를 하든 항상 응원할 테니까.”
“네, 감사해요. 형 그, 그러니까 저 진짜 열심히 할 테니까…….”
영화가 얼굴이 홍당무처럼 변해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형한테 어울리는 딜러가 될 테니까 꼭 저랑 같이 게임…….”
“거기까지.”
언제 왔는지 제현이 나와 영화 사이에 손바닥을 팍 끼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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