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하, 가지가지 하네 진짜.”
거지 같은 기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내가 이를 갈며 말하자 진형은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아 보였다.
“걱정했는데 여유 없어 보이는 거 보니까 그럴 필요 없었나 보네.”
“그쪽은 여유로우신가 보네.”
“아무래도 그렇지? 아, 오늘 지고 온 사람한테 내가 너무한 건가.”
저 작자의 머리통을 갈라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람을 저리 쥐고 흔들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었다. 주먹을 콱 쥐었다. 당장 후려갈기면 후련해질 것 같았지만 소란을 일으키면 찬희를 깨울 것이 분명해 겨우 참고 있었다.
“원래 자신감 없는 쪽이 안달 나고 질투하는 법이라고 생각하거든.”
“큰소리 내고 싶지 않으니까 조용히 꺼져.”
“술자리에 불러서 어차피 가려 했어. 찬희 일어나면 약 한 번 더 먹여. 체력 남으면 물수건으로 몸 좀 닦아 줘. 열나면 땀을 많이 흘려서.”
“내가 알아서 해.”
내가 뭐라 하든 빙글빙글 웃으며 찬희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고 몸을 일으키는 진형에게 짜증이 치밀었다.
“아.”
문을 열다 말고 진형이 돌아섰다.
“너 이 간수 좀 잘해. 함부로 사람 깨물고 다니지 말고.”
내 가슴께를 쿡쿡 찌르며 확연한 경고의 표정을 했다. 무슨 개소리를 하나 했는데 불현듯 지난번에 찬희의 안쪽 허벅지에 남긴 잇자국이 떠올랐다.
그렇게 강하게 깨물었던 줄도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흔적이 심하게 남은 데다가 흰 피부에 붉게 남은 자국이 여간 야릇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이번에는 내가 피식 웃었다.
“자신감 없는 쪽이 질투한다고 하지 않았나?”
나름대로 신경 긁으려고 한 말인데 진형이 방긋하고 해맑게 웃었다.
“질투라니 무슨 소리야. 어차피 나한테 돌아올 건데 내가 그런 걸 왜 하겠어.”
내 어깨를 툭툭 치고서 손을 흔들며 가는 폼이 끝까지 여유로웠다. 뭐 저런 능구렁이 같은 자식이 다 있지.
문고리를 부러뜨릴 기세로 붙잡고 있다가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 나서야 얌전히 닫을 수 있었다.
보통 아무 소리도 없이 잠드는 찬희지만 오늘은 더운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수건을 적셔 와 얼굴과 목덜미를 닦아 주자 숨소리가 조금 편해졌다. 엉망진창이었던 기분이 그 숨소리에 조금은 나아졌다.
‘넌 내가 끝까지 안 넘어가고 버티면 어쩌려고 이러냐.’
병원에 데려가는 길에 찬희가 혼잣말처럼 했던 말이었다.
‘형한테 개처럼 울면서 빌어라도 봐야지 어쩌겠어요.’
헤드폰 때문에 듣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가 얼마나 울며불며 구차하게 매달릴 수 있는지 구구절절 설명해 주었지만 사실 정말 형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아마 나는 실없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할 것이 분명했다.
어디까지나 찬희가 우선이었지 내 시커먼 감정이나 집착 따위가 우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에, 혹시나 만약에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다면 나는 밑바닥까지 추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오늘 진형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여유로움을 마주치자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것 같아 분했다.
“형, 나 자꾸만 자신이 없어져요.”
찬희의 손을 두 손으로 간절하게 붙잡고 이마를 기댔다. 마치 경건하게 기도라도 하듯이.
***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조금은 살 만해졌다. 손이 뜨끈하게 느껴져 보니 제현이 침대에 기대앉아 내 손에 얼굴을 대고 잠들어 있었다. 목이고 허리고 죄다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자세였다. 손을 빼내 볼을 톡톡 두드리자 깊게 잠든 것은 아니었는지 금방 눈을 떴다.
“깼어요?”
제현의 목소리가 말이 아니게 거칠었다.
“왜 그러고 자고 있어.”
평소 같으면 내가 좁다고 난리를 쳐도 올라와서 부둥켜안고 잤을 녀석이 저러니 이상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별로 잔 것 같지도 않았다. 눈가도 조금 붉었다.
“졌어……?”
제현이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내가 일어나자마자 제현의 상처에 소금을 쳐 버린 것 같았다. 차라리 딱딱하게 굳으며 화를 내거나 슬퍼했으면 나았을 텐데 저렇게 애써 웃으니 더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아무리 정신머리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졌냐고 왜 물어봐서 저런 표정을 짓게 했나 후회가 밀물처럼 차올랐다. 제현의 팔을 잡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를 어린애 안듯이 번쩍번쩍 들어대는 제현처럼 제현을 안아 들고서 어떻게든 달래 주고 싶은데 그럴 만한 힘은 없었다. 팔을 몇 번 더 당기자 제현이 침대 위로 올라왔다.
“원래는 좁다고 쫓아내시면서. 지금 저 위로라도 해 주시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닌데. 기분 많이 안 좋아?”
제현이 대답 대신 내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다가 손바닥 살을 가볍게 잘근잘근 물었다. 가끔 이렇게 동물적인 행동을 할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고는 했다.
“아파요?”
“아니.”
“저 지금 조금 엉망진창이니까 봐주세요.”
또 입꼬리만 끌어올려 억지로 웃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제현의 입 안으로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자 잠시 주춤하더니 혀가 휘감아 왔다. 손가락을 빼내려고 하자 이를 세워 가볍게 물더니 다시 깊게 집어넣어 핥았다.
제현의 눈이 반으로 접히며 웃었다. 손가락을 빼내자 이번엔 손바닥을 지나쳐 손목을 자국이 남지 않게 힘을 조절해 가며 잘근잘근 물어 왔다.
“대답 안 해 줄 거야?”
“어디까지 받아 줄 수 있어요?”
“어리광이야, 투정이야?”
내 질문을 들은 제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이 상해 날렵해진 턱선 때문에 내가 알던 제현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귀여운 거만 받아 줄 건가요?”
“아…….”
손가락 끝을 강하게 깨물어 짧게 신음하자 제현이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던 손을 놓아주었다.
“저 오늘 자제가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좀 더 자요. 아침에 깨워 줄게요.”
제현이 몸을 일으켰다. 어울리지 않는 음울한 눈이 마음에 걸렸다. 자기 침대로 돌아가 벽을 보고 누워 있는 등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덩달아 착잡해졌다. 몸을 일으켜 절뚝거리며 걸어가 제현의 위에 올라탔다.
“어…….”
제현의 손이 나를 떼어 내지도 감싸 안지도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가슴팍에 엎드려 얼굴을 기댔다.
“형, 잠깐만…….”
“내가 별로 의지가 되는 편은 아닌 거 알아. 매번 도움이나 받고. 그렇지만 너도 좀 나한테 기대도 되잖아.”
기분이 안 좋으면 좋지 않다, 어떻다 공유해 주는 것은 사실 기대는 축에도 못 들지 않나. 그런 투정도 들을 수 없다는 게 속상했다.
‘무늬만 버퍼라는 소리를 골백번도 더 들었다지만 이렇게 도움이 못 되어서야.’
저한테 좀 기대고 의지하라는 말을 하면서 하는 짓이 남의 몸 위로 내 몸을 내던지는 일이라니 제현으로서는 내가 행패를 부리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가슴이 짧게 떨리며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누가 이렇게 몸통 박치기를 해요.”
“어쩌겠어. 시야 없으면 몸이라도 대야지.”
“진짜 뼛속까지 버퍼야.”
무늬만 버퍼라는 소리만 들어 왔는데 오늘은 또 뼛속까지 버퍼라는 소리를 다 듣는다.
“어때 첫 정규 시즌을 3등으로 끝낸 기분은.”
“자존심 상해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에요. 이걸 형이 어떻게 여러 번 견뎌 냈는지 모르겠어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에 온 걸 환영한다.”
마치 막 입단의식을 치른 신입 회원에게 말하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노카운트야.”
“뭐요?”
“너 나랑 하고 싶어서 여기 왔다고 했잖아. 이번 스프링은 나랑 합 맞춘 거 아니니까 노카운트라고.”
시선을 올려다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제현이 보였다.
“뭐야, 더 높은 곳에 보내 주겠다던 사람 어디 갔어.”
일부러 도발이라도 하듯 말하고 몸을 일으키자 어색하게 있던 제현의 팔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단단한 팔이 안정감 있게 붙들어 오는 기분이 좋았다.
“저 한번 말한 건 꼭 지켜요. 두고 봐요.”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도 마음 놓고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기대는데 빠른 속도로 뛰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터지는 거 아냐?”
“터지려면 진작에 터졌죠. 형 때문에 맨날 이러는데.”
“맨날 이러면 제 명에 못 살아.”
일종의 경험담이었다. 하루가 멀다고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어찌나 고생했는지.
“괜찮아요. 장수 목표는 없어서.”
제현은 사실 딱히 장수를 목표로 하지 않아도 무병장수할 것 같은 느낌이긴 했다. 건강함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만들면 딱 이렇게 생겨 먹었겠지.
천천히 잦아드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날 숙소에서 내보낼 때는 그렇게 단호하게 한마디 언질도 없이 강제로 보내 버린 데다가 지운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도 금방 가 버리더니.
이렇게 딱 붙어 있으니 내 아쉬움도 좀 달래지는 것 같기도 했다.
***
제현의 품이 따듯해서인지 간밤에 한숨도 깨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아주 푹 자고 일어난 몸이 개운했다. 신경에 좀 거슬렸다 싶으면 몸이 파업이라도 하듯이 시도 때도 없이 열이 오르는 것은 불편했지만 이렇게 열이 올랐다 내렸을 때의 개운한 기분은 조금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나왔는데 제현과 나를 제외하고는 어제 술자리에서 꽤 퍼마셨는지 이른 시간에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간단하게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놓고 휘휘 젓고 있었다. 씹는 게 귀찮아 불려서 먹는 편인데 제현은 바삭한 게 좋은지 우유를 붓기가 무섭게 와작와작하며 먹고 있었다.
“형, 지운이 형 집에서 뭐 가져올 거 없어요? 제가 오늘 가서 가져올게요.”
“어…… 아니. 네가 나 맨몸으로 내보냈잖아.”
“제가 소박이라도 놓은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저라고 좋아서 보냈겠어요?”
저렇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니 괜히 더 놀리고 싶었다.
“내가 아무리 귀찮아도 그렇지. 사람을 그렇게 짐짝처럼…….”
“아, 진짜…….”
답답함에 머리를 박박 긁어 대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안 그렇게 생겨서 진짜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후회했어요. 앓느니 그냥 죽을 걸 하면서 얼마나 후회했는데 말을 그렇게 하세요.”
“내가 뭘.”
“미치겠네. 자기는 걸림돌까지 당당하게 달고 왔으면서.”
“걸림돌? 아…….”
제현이 따지듯 한쪽 눈썹을 올려서 ‘이게 진형을 말하는 거구나.’ 하고 눈치챘다.
“혹시 그때 둘이 무슨 일 있었어?”
“그 인간이랑 제가 무슨 일이 있어요. 없어요.”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군 싶었다. 그날 숙소로 돌아온 제현이 워낙 부드럽게 받아 줬던 기억이 강해서 별일 없었겠거니 했는데 어제 흉흉하게 적대감을 대놓고 표현하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아마도 진형이 속을 긁어 댔겠거니 싶었다.
지운이나 진형이나 사람 속 긁는데 도가 튼 양반들이라지만 지운이야 사람 신경 건들 때는 자기가 캐낼 것이 있을 때나 일부러 그랬다. 반면에 진형은 그냥 개썅마이웨이였다. 웃으면서 사람 속 버리게 만드는데 능력치를 몰빵해 넣은 사람이었으니 제현이 당해내지 못했으리라.
“그 형 원래 그래. 매번 반응해 주지 마.”
제현이 부루퉁한 표정이 되어서 시리얼을 씹다가 급기야 수저를 내려놓았다.
“짜증 나요.”
“정 뭐 하면 이따 잡아 놓고 나이츠로 1:1이라도 해. 네가 이겨.”
“왜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누구 집 딜러인지 자존심과 콧대 하나는 끝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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