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42화 (42/100)

42화.

“기대되네. 네가 잘한다는 딜러 얼마나 잘하는지.”

진형이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응, 잘해. 경험이 좀 부족한 게 아쉽긴 해도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테니까.”

“이상하게 네가 내 앞에서 다른 딜러 칭찬하면 괜히 질투 나더라.”

“지랄 똥을 싸세요.”

지운이 진형의 말에 똥 씹은 표정으로 대신 대답했다.

“형도 예전에 동진이 형이 다른 힐러 칭찬하면 기분 이상하다 그랬잖아.”

“야, 괜히 탱힐이랑 딜버퍼를 부부 사이라고 하냐? 그리고 나랑 동진이랑 합 안 맞춘 지 얼마나 됐는데 아직도 그러겠냐. 너도 좀 작작 해. 이혼한 사이에 미련 남은 것같이 굴지 말고.”

“이, 이혼?”

“저, 저 멍청한 표정 짓는 거 봐. 에휴, 헛소리하지 말고 너나 나나 못 깼던 트라이앵글 3위의 벽 한 번 깨 주겠다고 잠 덜자고 열심히 한 애들인데 닥치고 응원이나 해.”

졸지에 이혼남이 된 우리는 지운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얌전히 화면을 보았다.

아무래도 제현도 영화도 공격적인 성향이 크다 보니 픽도 자연스럽게 유리 죽창형 픽이 됐다. 안정이 최우선인 메타를 철저하게 거스르고 있었다.

와일드캣 문즈는 이번 시즌 내내 거의 드러눕는 운영을 주로 사용하는 편이라 한방에 뚫지 않으면 무난하게 후반으로 끌려가기 쉬웠다. 내 기분이야 어떻든 간에 3:0으로 빨리 결승을 가 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쟤는 원래 저런 픽밖에 못 해?”

진형이 옆에서 속삭였다.

“안정적인 것도 하는데, 성향이 워낙 공격적이라서 차라리 생존력 떨어지더라도 데미지 딜링 빡세게 잘 나오는 기사가 더 잘 맞아.”

“요즘 KKL 안보냐, 진형아?”

“찬희도 안 나오는데 챙겨 보긴 좀. 우리 리그 경기 보는 것도 빡세서 서머부터 챙겨 보려 그랬지.”

“와, NKL을 우리 리그라고 하는 거 봐. 반년 만에 대한 미국인 다됐네.”

오늘 하루 실컷 지운에게 두들겨 맞는 진형이었다.

“저거 상대 딜러가 궁 한 번만 제대로 들어가도 한방에 다 죽겠는데.”

“안 맞으면 되잖아.”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는데 지운이 너까지 두들겨 팰 수도 없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했다.

“그게 너나 되지. 그래도 확실히 혀니혀니 들어오고 팀 색깔 레전드네. 무슨 픽이 유럽팀 경기 보는 거 같아.”

“유럽도 저렇게까지 극단적으로는 안 하지 않나.”

“응, KKL도 안 보시는데 유럽 리그라고 보셨겠어요?”

- 이야, 트릭스 게이밍 제대로 칼 갈고 온 것 같은데요? 하루 종일 두들겨 패겠다는 소리예요!

- 이 조합은 초반에 무조건 상대를 압살하면서 커야 합니다. 후반 가면 답도 없어요.

- 반대로 말하자면 와일드캣 문즈는 상대편 힘이 빠질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반드시 이깁니다.

- 어떻게 흘러갈지 기대되는데요. 말씀하신 순간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정말 첫 세트부터 작정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시작하자마자 넷이서 모여 있다가 상대방 버퍼를 깔끔하게 죽여 달달하게 골드를 나누어 먹고 흩어졌다. 누구 콜인지는 몰라도 똑똑한 생각이었다.

- 이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렇게 나오잖아요. 초반이 강한 조합일 때는 더 주의해야 했는데 와일드캣 문즈가 조금 안일했던 것 같네요. 아, 아쉬운 실점을 내주며 시작합니다.

- 하필 킬 골드를 조커가 먹었어요. 이거 초반 버티기가 더 쉽지 않아졌습니다.

제현이 초반 성장을 기반으로 경기 내내 기세 좋게 맵을 쏘다니며 20분대에 상대 성문을 무너뜨렸다. 이대로 기세를 몰고 간다면 결승전도 꿈은 아니었다.

벅차오르는 희망만큼이나 아쉬움도 차올랐다. 누구보다 저 자리에 있고 싶었다. 마치 축구 경기를 보며 내가 뛰면 더 잘하겠다고 외치는 아저씨들처럼 저 자리에 뛰어들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들 것이 분명해 이 전 경기도 애써 보지 않았는데.

“이겼는데 표정이 왜 그래?”

진형의 물음에 아래에 내려두었던 목발을 챙겼다.

“어디 가려고?”

“형, 나 더 못 보겠어요.”

“어, 그럼 애들한테 인사라도 하고 갈래?”

“아니…… 나 진짜 속이 좀 안 좋아서.”

“내가 찬희 데려갈게. 형은 다 보고 와.”

2세트가 시작되었는지 뒤에서 환호성이 크게 들렸다.

“몸 안 좋은 게 아니고 답답해서 그랬지?”

“응…….”

“아무리 응원차 부른 거라지만 부상으로 뛰고 싶어도 못 뛰는 사람한테 강제로 경기 보게 하는 건 좀 잔인하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경기장을 나와 바람을 쐬자 좀 살 것 같았다. 흡연 구역으로 걸어가 주머니를 뒤졌지만, 담배를 챙겨오지 않은 게 생각났다. 황망하게 서 있으니 진형이 외투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입에 물려 주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

안 괜찮아도 다 내 업보라서 우는소리를 할 수는 없다는 점이 더 서러운 점이었다.

“지운이 형 집으로 갈 거지?”

“아니, 숙소로 갈래.”

“숙소? 괜찮겠어?”

“응.”

응원하러 와서는 끝까지 자리 지키지 못한 것도 미안하니 이기든 지든 돌아온 팀원들과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형은?”

“나도 같이 가지 뭐.”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

경기장을 나오면 괜찮을 줄 알았던 컨디션은 시간이 지날수록 축축 처져 진형에게 업힌 채로 방으로 들어왔다. 진형은 익숙하게 방을 찾아 침대에 나를 눕혀 주었다.

“상태 보니까 밤에 열 오르겠다. 이따가 프런트에 해열제 좀 달라고 해 볼게.”

“응…….”

진형이 땀으로 젖은 내 이마를 닦아 주었다.

“여기는 변한 게 없네.”

몇 년간 함께 지냈던 방이니 진형도 새삼스럽게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은은하게 방 안에 진형의 향수 냄새가 감돌았다. 사실 나는 지운의 집에서 지내느라 제현의 생활감이 더 많은 방에 진형의 향이 나니 기분이 묘했다. 진형도 방을 둘러보며 같은 느낌을 받는 모양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너랑 이혼이라도 한 것 같다.”

진형의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형이나 나나 재혼한 거네.”

“전남편이 그립진 않았고?”

진형이 옆에 앉아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만 더 숙이면 입술이 맞닿을 것 같았다. 무겁게 느껴지는 손을 들어 진형의 입술을 막았다.

“그리웠지.”

자연스럽게 과거형으로 나왔다. 진형이 미련 없이 고개를 다시 거뒀다. 벌써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래, 한숨 자.”

진형의 손이 내 이마를 덮었다.

[KKL] 와일드캣 문즈,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3:1로 꺾고 사상 첫 결승 진출 성공…… 후반의 문즈

양 팀 모두 결승전을 밟아 본 적 없어 이번 경기로 어느 한 팀은 사상 첫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었고 이 대결에서 승리한 주인공은 항상 중위권에 머물렀던 와일드캣 문즈였다.

후반을 노리는 운영으로 1, 2라운드 모두 평균 승리 시간이 가장 긴 팀으로 유명한 와일드캣 문즈는 이번 준결승에서도 4세트 내내 안정적인 전략을 준비했다.

1세트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 강력한 초반 타이밍을 이용해 딜러 ‘조커’의 성장을 도모했고 승기를 잡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2세트부터 와일드캣 문즈는 앞선 맵 장악력을 기반으로 촘촘하게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성장을 막아 냈다. 20분까지는 골드 획득량이 큰 차이로 뒤처졌지만 20분 이후부터 점점 따라잡으며 30분부터는 골드 획득량뿐만 아니라 모든 지표에서 우세했다.

연달아 승리하며 상대적으로 큰 경기의 경험이 적은 신인 선수들이 많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피지컬이 필요한 한타에서는 종종 승리했으나 노장들이 많은 와일드캣 문즈의 노련함을 따라오지 못했다.

결국, 게임을 단번에 끝내지 못하고 후반으로 끌려갔고 결국 와일드캣 문즈가 KKL 스프링 시즌 준결승 경기에서 3:1로 승리했다.

(Y 뉴스 A기자)

[나이츠 KKL 게시판] 삼각이는 또 삼등인거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36개

ㅁㅁ : 트릭스 게이밍 뭐 해 팀 이름 바꿔 ㅅㅂㅋㅋㅋㅋ

└ㅇㅇ : 삼각형이라 삼등 하는 거면 도대체 뭐로 바꿔야 함?

└└ㅎㅎ : 동그라미?

└└└ㅋㅋ : 0등? 이름 바꾸고 화끈하게 꼴찌로 승강전 가나요?

└└└└ ㅎㅎ : 아니 원형이잖아 oneㅠ11111

ㅅㅅ : 쳌메 당신이 그립습니다……★

└ㅍㅍ : 쳌메 돌아와ㅠ 나 오늘 직관 가서 깐쳌메 보고 옴ㅠㅠ

└└ㅅㅅ : 자랑질 금지요ㅠ

ㅈㅈ : 아 진짜 나 이번에는 믿었는데 그저 눈물만 나온다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영화의 흐느끼는 소리만 들렸다. 동진이 말없이 영화의 등을 토닥거려 주고 있었다.

“제현이 형, 제가 죄송해요…….”

“아냐, 팀 게임에서 왜 사과해. 울지 마.”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영화가 재차 사과를 해 왔다. 2세트에서 영화의 폼이 영 좋지 않았다. 밴픽이 예상대로 되지 않아 픽이 좀 꼬여서 생존기가 부족한 기사를 하게 되었는데 맵 장악력이 뒤처지는 만큼 적팀의 위치 파악이 잘되지 않는 상황이 이어졌다.

영화도 답답한 심정에 몸이라도 대 가며 시야를 뚫는데 생존기가 부족하니 자꾸만 잘렸다.

상대 팀 딜러는 버퍼가 딱 붙어서 케어를 받고 있는데 나는 거의 혼자서 부단히 성장을 도모해야 했다. 결국에는 준이를 호출해 꾸역꾸역 성장했지만, 성장 차이가 심하게 나는 데다가 후반에 강한 조합도 아니어서 질질 끌리다가 결국 패배했고 3, 4세트도 비슷했다.

영화는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더니 아직도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나라고 기분이 처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는데 옆에서 저렇게 서럽게 울어 버리니 억지로라도 웃음을 쥐어짜 내야 할 것 같았다.

“3등도 잘한 거야.”

“맞아 인마. 그래도 네가 열심히 해 준 덕에 3등이라도 한 거지. 열심히 했으면 된 거야.”

동진의 말에 겨우 그쳐 가던 영화의 울음보가 다시 터졌다.

***

숙소에 돌아오니 착잡한 표정의 프런트 스태프분들이 고생했다며 맞이해 주셨다. 작은 술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딱히 술 마실 기분은 아니라서 방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

“아, 제현아. 방에 갈 거면 이거 찬희 좀 가져다주라.”

“찬희 형이요……?”

“응, 여기서 너희 기다린다고 진형이랑 같이 왔는데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더라고. 진형이가 해열제 있으면 달라고 해서 사 왔는데 네가 좀 전해 줘.”

안 그래도 오늘 겨우 얼굴을 봤는데 대화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머리도 예쁘게 하고 왔던데 제대로 안아 보지도 못했다.

지운의 집에 있으면서 내렸던 살도 좀 올랐고 숙소에 왔을 때만 해도 괜찮아 보이더니.

또 아프다니 걱정스러웠다. 하여간 눈만 떼면 어딘가 골골거리기 바쁜 사람이다. 한걸음에 달려가 방문을 열자마자 낯선 향수 냄새가 났다.

“일찍 왔네.”

침대 옆에 앉아 쌕쌕거리며 잠든 찬희의 이마에 손을 얹은 진형이었다.

“…….”

“왜 그러고 서 있어? 들어와.”

분명히 내 방인데 마치 손님을 초대한 집주인처럼 굴었다. 누가 백지운 친구 아니랄까 봐 이쪽도 사람 속 긁는 스킬이 상당했다. 말없이 노려보고 있으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거 찬희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야?”

약과 챙겨 온 생수병을 건네주자 툭툭 까더니 자기 입에 털어 넣었다. 형 먹이라고 가져온 걸 왜 자기가 먹고 앉아 있나 하는 의문이 다 스치기도 전에 찬희의 입을 벌려 제 입에 담긴 약과 물을 흘려 넣는 진형이었다.

“평범하게 좀 깨우던가…….”

찬희는 잠시 바둥거리다가 흐리게 눈을 떠 진형을 보고서 한숨을 쉬더니 다 뭉개진 발음으로 저 한마디만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았다.

진형이 웃으며 다시 자라는 듯이 가슴께를 몇 번 토닥여 주니 다시 고른 숨을 뱉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그저 숨죽여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와, 진짜 죽일 듯이 노려보네. 안 힘들어? 눈에 힘 좀 풀지.”

진형이 조용히 감탄하며 보란 듯이 입술을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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