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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이 트로피-41화 (41/100)

41화.

지운의 집에서 진형과 함께 지내다 보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그때는 각양각색의 이유로 힘들다고 불평하기 바빴지만,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미화된다더니 그냥 다 좋고 그립게만 느껴졌다.

창밖을 보면서 멍 때리고 있던 차에 진형이 와서 내 입에 떡을 물려 주었다.

“지운이 형이 슬슬 준비하고 같이 나가자고 하더라.”

“응.”

그동안 나이츠 관련은 싹 끊고 있었더니 소속팀의 준결승전이 마치 먼 나라 이야기같이 들렸다.

그래, 응원은 가야지. 티셔츠를 벗고서 지운이 저번에 챙겨다 준 유니폼을 뒤적였다. 어차피 대부분 실내에만 있을 예정이긴 했다.

벌써 4월이라 그렇게 춥진 않겠지만 그래도 밤에는 쌀쌀했다. 반 팔 위에 외투만 걸치면 집에 올 때 조금 추우려나 고민이 됐다. 언제 다가왔는지 진형의 손이 목덜미를 주물렀다.

“어떻게 그렇게 안 움직이는데 살이 하나도 안 붙냐. 뼈 드러난 거 봐.”

“하지 마.”

손을 쳐내고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바지를 벗으려는데 뒤에서 진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고 계속 보고 있을 거야?”

“왜? 너 나랑 갑자기 내외라도 해?”

진형의 말에 그런가 싶다가도 요즘 저 형이 왜 저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깁스에 걸려서 바지를 빼는 데 애를 먹고 있으니 다가와 바지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진형의 시선이 내 허벅지에 흐리게 남은 잇자국에 머물렀다.

“이거 뭐야?”

지난번에 제현이 있는 힘껏 물었던 흔적이었다. 이제는 꽤 흐릿해져 있었지만 원래 피부가 흉이 잘지는 편인 데다가 안쪽 여린 살이라 그런지 다 지워지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국을 따라 더듬거리는 진형의 손을 쳐내고 유니폼 바지를 다리에 끼웠다.

“신경 꺼.”

그 순간 진형이 바지를 끌어 내리더니 내 다리를 붙잡아 활짝 벌렸다. 내 다리 사이에 이미 진형이 들어와 있어서 다리를 오므릴 수도 없었다. 아니, 이거 자세가…….

민망함에 얼굴이 다 달아올랐다. 붙잡힌 다리를 빼내려는데 얼마나 단단히 붙잡고 있는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이거 뭐냐고 묻잖아.”

“무슨 상관인데.”

마주치는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남들 다 보이는 목덜미에도 흔적을 달고 왔던 사람이었다. 내게 보였을 때도 그렇게 담담하고 흔들림 없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흔들리는 모습이 재밌게 느껴졌다.

“왜 그래. 내가 다른 사람 손 탄 게 그렇게 놀라워?”

진형의 손끝이 제현이 만들어 둔 잇자국을 스쳤다가 떨어졌다. 당황한 진형의 얼굴에 짜릿한 통쾌함마저 약간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형이 이러니까 진짜 재밌다.”

“누군지 물어봐도 돼?”

“말하면 뭐가 달라져?”

진형의 손에 힘이 풀린 것을 보고 다리를 빼냈다. 바지를 다시 주워 입었다. 바지를 입고 나서도 진형은 내 허벅지 주변을 힐끔거렸다.

“나도 형이 자고 다닌 사람 물어본 적 없잖아. 형도 그렇게 해.”

“……알겠어.”

생각해 보면 진형은 항상 나를 잘 몰랐다. 예전에는 나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일부러 알려 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혹시나 내 진심을 알게 되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시무룩해 보이는 진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조건 형이 잘못했다고 우겨 왔는데 양심상 내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못 말하겠기에.

“왜 그래. 내 예상이랑 다르네.”

“어떻게 반응할 줄 알았는데?”

“내가 형한테 좋아한다고 했을 때 부담스러워했잖아. 조금은 좋아할 줄 알았지.”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을 품으면 짐을 덜어 낸 사람처럼 개운한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진형의 과보호는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유도한 것도 없잖아 있었기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 형 닮아가더라.”

“네가?”

“근데 나는 역시 형처럼은 못 살겠어. 난 완전한 내 사람이 갖고 싶어.”

진형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절뚝거리며 방을 나왔다.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진형과 있으면서 이렇게 마음이 편했던 적이 있던가.

거실로 나오자 머리 세팅을 마무리하고 있던 지운이 왁스를 들고서 자기 옆자리를 팡팡 쳤다.

“너도 오랜만에 카메라에 얼굴 비추는 건데 머리 좀 만지자.”

“형, 나는 만져 봤자야.”

“누가 그래? 빨리 와.”

지운이 왁스를 손에 덜고 비비더니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넘어가니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늘 말하잖아. 너는 이마가 예뻐서 머리를 까야 한다고. 두상도 예쁘고.”

“걔는 별로래.”

지운이 왁스로 모양을 잡고 헤어스프레이를 뿌리다가 말고 인상을 쓰며 멈췄다.

“누가, 혀니혀니가 그래?”

“응.”

“지랄.”

지운이 질펀하게 욕을 뱉더니 피식 웃었다.

“걔는 내가 네 머리를 박박 밀어놔도 멋있다고 기립박수 칠 거면서 지랄하지 말라 그래.”

“뭐야, 찬희 머리해 주고 있었어?”

한참 방에 있다가 이제 나온 진형이었다. 나랑 집에서 퍼져 있으면서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차림만 보다가 멀끔하게 셔츠에 슬랙스를 입으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나는?”

“너는 너 알아서 하세요. 맡겨 뒀냐?”

“형, 진짜 나한테 너무한 것 같아. 내가 동네북도 아니고.”

“그런 취급 받아도 싸지. 하지만 아무리 쓰레기라고 해도 멀리서 여기까지 왔으니 먹여 주고 재워 주고……. 나는 진짜 날개만 없지 그냥 천사라니까. 안 그러냐 찬희야?”

“너무 그러지 마.”

이쯤 되니 여기저기서 구박받는 진형이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

자기 집에서 출발하는데 대충하고 나가는 꼴 못 보겠다면서 가볍게 메이크업도 해 준 지운이었다.

조금 일찍 출발해 숙소에서 경기장으로 같이 갈 예정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내리려는데 진형이 번쩍 나를 안아 들었다.

“뭐 하냐.”

“나도 너 안고 다닐래.”

지난 지운의 영상에서 내가 오만 사람들한테 다 안겨 다닌 것이 여간 신경 쓰였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형!”

어떻게 알았는지 내리자마자 제현이 멀리서 이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진형이 고개를 내밀어 제현을 확인하자 제현도 진형을 봤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더 빠른 속도로 뛰어왔다. KKL이 아니라 올림픽에 내보냈어야 했던 거 아닌가 싶은 속도였다.

“왜 이 사람이랑 같이 와요?”

“어, 그게…….”

내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자 고개를 홱 돌려서 지운을 쏘아보는 제현이었다. 지운이 갑자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모르는 척 숙소로 뛰어갔다.

“그게…….”

“됐어요. 어차피 지운이 형이 부른 거잖아요.”

그러고는 내 앞으로 양팔을 펼쳤다. 나도 진형도 영문을 모르고 팔을 뻗고 있는 제현을 멀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현이 답답했는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뭐 해요. 넘어와요.”

아, 그런 뜻이었군. 요즘 하도 안겨 다니다 보니 내가 진형에게 안겨 있는 것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제현에게 팔을 뻗는데 진형이 내 허리를 붙잡아 돌려 안았다. 한 손은 내 허리를 감싸고 한 손은 내 허벅지를 받치고 있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진형의 목을 끌어안게 되면서 제현을 볼 수 없었다.

“뭐 하세요?”

“일단 올라가서 얘기하지? 찬희 옷 얇게 입었는데.”

내 핑계를 대자 제현이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진형이 발걸음을 옮기자 제현이 뚱한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였다.

이리 오라고 손짓하자 제현은 여전히 뚱한 얼굴이지만 바짝 뒤따라붙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몰라도 한층 턱선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래도 소년미가 느껴지는 얼굴이었는데 볼살이 빠지니 더 남자답게 느껴졌다.

남들이 며칠 사이에 얼굴이 상했다고 말할 때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얼굴이 변했다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제현을 보니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단박에 이해가 갔다. 얼마나 못 봤다고 애가 홀쭉해질 정도로 고생을 시킨 건지.

“밥은?”

“먹었죠. 형은요?”

“먹였지.”

진형이 대답을 인터셉트했다. 제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싸한 공기가 맴돌았다.

“저번에 보고 오랜만이네.”

진형이 먼저 제현에게 말을 건넸다. 저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풍기는데 잘도 말을 거는군 싶었다.

“제가 그때 다시 안 뵙고 싶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쩌겠어. 여기가 내 친정집인데. 네가 좋든 싫든 우리는 계속 마주칠 거라니까?”

“둘이 언제, 아…….”

둘이 만난 적 없을 텐데 하다가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숙소 앞 골목에서 진형과 대판 싸웠을 때 얼굴을 텄겠구나.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연습실에 도착하자 우르르 몰려와 진형을 둘러쌌다.

“와, 진형아! 이게 얼마 만이야.”

“이야, 미국물 먹더니 더 잘생겨졌다? 거기 햇빛 강하다더니 좀 탄 거야?”

“웬일이야. 진짜 너무 반갑다! 우리 애들 영상 찍는 중인데 나와도 되지?”

“어차피 찬희 찍으려면 저도 찍으셔야 할걸요? 오늘 종일 이러고 다닐 거거든요.”

진형이 들고 있는 나를 한번 흔들었다.

“어머, 찬희도 오랜만이다. 몸은 좀 괜찮지? 어머머, 멋 부리고 온 거야? 너도 은근히 꾸미는 맛이 있는 얼굴이라니까.”

진형과 제현 사이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려니 민망했다. 그래 봤자 서찬희지.

“제현아, 영화랑 인터뷰 하나만 따자.”

“네, 갈게요.”

제현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와 진형을 번갈아 보다가 촬영하러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진형의 볼을 쿡쿡 찔렀다.

“애 놀리니까 좋아?”

“애? 애라고 했어? 쟤를 어떻게 애라 그래?”

진형의 반응도 이해가 되는 게 제현이 애라기에는 좀 크긴 했다. 하긴 여러모로, 아주 다방면으로 크긴 하지.

“쟤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 형.”

“쟤가 애면 너도 애야.”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운과 동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동동아, 저 핏덩이들이 뭐라는 거냐?”

“몰라.”

그리고 그 뒤로 해탈한 것 같은 감독님이 인자하게 잘들 놀고 있군,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경기장에 도착하자 경기 중간중간 카메라에 얼굴이 찍힐 수 있게 관중석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양옆에 지운과 진형을 두고 가운데에 앉으니 동진과 제현 사이에 서기 싫어하는 준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다.

“야, 대박 저기 킹 있어.”

“내가 100% 온다고 했잖아.”

“대박. 쳌메랑 화페랑 있으니까 팀 트라이앵글 생각난다.”

뒤쪽에서 사람들이 대화 나누는 소리가 얼핏 들렸다. 진형이 그쪽을 돌아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찬희야, 너도 저기 봐봐. 사진 찍어 주신다.”

뒤를 돌아보니 기자들이나 들 법한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화려하게 들렸다. 옆 사람이 치어 플래카드를 들고 흔들었다.

[3위 탈출 넘버원 트라이앵글]

“나 죽기 전에는 탈출하겠지?”

지운이 씁쓸하게 말했다.

- 네, 오늘의 경기! KKL 스프링 시즌 준결승, 와일드캣 문즈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매치 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지난 플레이오프 첫 경기에서 3:2로 다섯 경기 꽉 채워서 1박 2일 경기를 했던 당사자들이 바로 이 트릭스 게이밍 아니겠습니까!

- 네, 맞습니다. 메인 버퍼인 체크메이트 선수가 현재 부상으로 출전 불가라서 준결승 진출을 못 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결국 올라왔습니다!

- 아무래도 신인 선수들이 반을 차지하고 있어서 불안한 부분은 있지만 그만큼 패기 넘치는 경기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 아, 말씀하시는 순간 관중석에서 체크메이트 선수가 보이는데요.

- 아니? NKL을 제패하고 돌아온 킹 선수와 화이트 페이퍼 전 선수도 있습니다.

- 참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갑네요!

셋이 나란히 화면에 잡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보는 제 눈이 참 호강하는 것 같고 좋네요.

- 하하, 하긴 팀 트라이앵글 시절에는 아이돌 그룹 아니냐는 소리도 종종 들었으니까요.

- 네, 훈훈한 와중에 경기 준비 완료되었다고 합니다. 와일드캣 문즈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스프링 시즌 준결승 경기 지금 만나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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