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다. 한없이 많을 것 같던 시간이 한정되자 더더욱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 서머 시즌의 우승자는 월드 시리즈 직행 티켓을 얻게 되는데 진형이 데뷔 때부터 함께한 팀과의 월드 시리즈 진출도 버리고 그렇게 주목도가 높지도 않은 서머 시즌 이적 시장에 뛰어들 이유가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우승만 할 수 있다면 지금도 줄어들고 있는 시한폭탄의 도화선을 잘라 버릴 수 있다는 거였다.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KJ 스노우의 플레이오프 준결승전 함께하시겠습니다.
- 네! 아무래도 팬분들의 승리 예측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는데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11%, KJ 스노우는 무려 89%입니다!
- 아무래도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천적으로 유명하다 보니 결과가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만, 트릭스 게이밍 입장에서는 이번에 보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내야죠!
- 맞습니다! 두 팀 모두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최신 메타에 잘 어울리는 운영으로 유명한데요. 그만큼 치밀하고 섬세한 극한 나노 운영으로 경기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걸 보여 주자. 다들 너무 기죽지 말고, 응?”
명진욱 감독님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한 명씩 꼼꼼히 살폈지만 네 명 모두에게 서려 있는 긴장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월드 시리즈 진출을 위해 각 팀이 모두 날이 서 있는 서머 시즌, 그것도 이를 박박 갈고 있는 스프링 시즌 우승자 KJ 스노우가 우리의 준결승 상대였다.
더운 날씨에 경기장은 냉방으로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자꾸만 손이 차가워져 벌써 핫팩을 두 개나 뜯은 차였다.
“많이 추워?”
“아니, 손이 자꾸 굳어서.”
진형이 옆자리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핫팩을 또 너무 오래 잡고 있으면 땀이 차 바지에 손을 북북 문질렀다.
***
그 어떤 점도 실수하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면, 내가 조금만 더 집중하면 될 것 같았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한 번만 해낼 수 있다면 두 번, 세 번도 가능하다고 믿었다.
문제는 지금 준의 집중력이 말이 아니었다. 딜러 포지션을 잡아 주며 전투 개시 각을 재는 것만 해도 벅찬데 준이 한 타 때마다 위치를 제대로 못 잡고 폭딜을 맞고 잘리거나 힐을 넣어 주지 못하고 있었다.
“김준, 집중 안 해?”
“죄송, 죄송해요.”
준은 유독 KJ 스노우와의 경기에서 자잘한 실수를 하는 편이었지만 오늘따라 치명적이었다. 상대도 눈치채고 묘하게 준을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었다.
준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내가 미친 듯이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한타가 벌어지기 직전의 상황이었고 준도 부활 직전이라 조금만 버티면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 전투가 이번 세트 마지막 전투가 될 수도 있으니 그 어떤 실수도 없어야 했다.
순간 투둑, 하고 뜨끈한 게 얼굴을 타고 흘렀다. 다급하게 손등으로 닦아 내고 다시 마우스를 잡는데 손등이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씹…….”
순간적으로 욕이 절로 나왔다. 이 긴박한 상황에 코피가 나고 지랄이었다. 손으로 몇 번 훔치고 게임에 집중하는데 멈추지 않고 흘러 유니폼에도 떨어졌다. 결국, 잠시 경기가 중단되었다. 뒤에서 심판이 휴지를 건네주었다.
-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는데요.
- 네, 지금 체크메이트 선수가 상태가 좀 좋지 않아 보입니다.
- 코피가 나고 있는 건가요?
- 상황 정확히 들어오는 대로 안내해 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경기 계속할 수 있겠습니까?”
“네.”
대답을 바로 하고 손과 마우스에 묻은 피도 닦아 냈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간 기권패였다. 몇 분 정도 지나자 아까처럼 줄줄 흐르지는 않았다.
- 지금은 좀 괜찮은 것 같죠? 아무래도 가장 치열한 서머 시즌이다 보니 우리 선수들이 고생이 많은가 보네요.
- 네, 경기 다시 시작됩니다!
- KJ 스노우 먼저 빠르게 이니시 스킬을 박아 넣습니다!
- 이거 들어가야죠, 가야죠!
서로 킬도 아이템 보유 상황도 엇비슷했던 상황에서 준의 합류가 조금 늦었던 데다 퍼즈로 인해 상대방이 우리 위치 파악을 빨리한 것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 역시 운영 명가 KJ 스노우! 단숨에 성문을 부수며 1세트 승리합니다!
- 아, 한 시간이 넘는 게임이 이렇게 한순간에 승패가 정해지나요!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입장에서는 조금 아쉽게 됐습니다.
***
첫 세트를 그렇게 패배하고 1세트의 퍼즈 페널티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2세트 맵 선택권을 잃었다. 최종 결과 세트 스코어 3:1, KJ 스노우의 승리였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책상 앞에서 키보드에 머리를 박은 채로 앉아 있었다. 프로게이머로 지내면서 아쉬운 경기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이번만큼 승리가 간절했던 경기는 없었다.
사실상 진형과의 마지막 정규 시즌 경기일 텐데 이토록 허무하게 패배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찬희야, 장비 챙겨야지.”
이미 장비를 전부 챙긴 진형이 내 가방을 책상 위에 놓았다.
“울어?”
옆에 쪼그려 앉아서 내 얼굴을 살폈다.
“내가 뭘 잘했다고 울겠어. 양심이 있지.”
주먹을 꽉 쥐었다가 몸을 일으켜 서둘러 장비를 챙겼다. 가방을 메려는 나를 진형이 말리더니 어디선가 물티슈를 가져와서 핏방울이 얼룩져 있는 내 유니폼을 닦기 시작했다.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나서 빨아도 지워질지 모를 얼룩이었다. 손을 밀어내는데 진형이 힘으로 버텼다.
“어차피 물티슈로 안 지워져.”
“지우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너랑 조금 더 경기장에 있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진형의 시선이 내 유니폼에서 내 눈으로 올라오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저 형은 마지막이라는 소리를 참 예쁘게도 말하는구나.
“표정이 안 좋아.”
“졌는데 좋으면 이상하잖아.”
뒤쪽에서 관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인사하는 KJ 스노우 선수들의 모습이 보였다. 진형의 손을 쳐내고 가방을 메고 빠른 걸음으로 경기장을 나섰다.
눈물이 앞을 가려 고개를 더욱 숙였다. 1세트와 2세트의 패배는 내가 가져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형에게 말한 것처럼 양심이 있으면 울면 안 됐다.
바로 차로 가려다 말고 주차장 구석으로 향했다. 앞을 보지 않고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혀 무슨 종이 인형처럼 나부끼며 튕겨 나가는데 상대가 서둘러 나를 붙잡아주었다. 놀라서 팔을 붙잡아 휘청이는 몸을 세웠다.
“괜찮으세요?”
“……네. 죄송합니다.”
우는 얼굴을 보이기 싫어서 인사를 꾸벅하고 가려는데 상대방이 잡은 팔을 놔주지 않고 있었다.
“…….”
“저기…….”
손등으로 눈물을 서둘러 닦아 내고 고개를 들었지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는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음, 아니에요.”
짧은 말을 남기고 남자는 내 팔을 놔주고 뒤돌아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주차장 구석으로 걸어가 쪼그려 앉았다. 조금은 궁상맞게 훌쩍이면서 눈물을 말렸다.
진형에게 안 운다고 당당하게 말해 놓고 울어 버린 게 창피했다. 밤에도 열대야가 이어지는 한여름이었다. 주차장은 텁텁한 더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차가운 손으로 눈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이거 드세요.”
올려다보자 아까 그 남자가 방금 자판기에서 뽑아 왔는지 물기가 맺힌 음료수병을 건넸다. 음료수병을 멀뚱하게 보고 있자 내 손에 직접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왜 우셨어요?”
그러고 보니 우는 얼굴을 코앞에서 보였지. 새삼스럽게 부끄러웠다. 음료수병만 말없이 꼭 쥐었다.
“울지 마세요. 잘하셨으니까.”
상대방 신발 앞코만 줄곧 보고 있었는데 더 할 말은 없었는지 남자는 뒤돌아 달려 주차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혹시 내 팬인가? 하지만 팬이라기엔 좀 많이 담백했다. 손에 쥐어진 냉기가 남아 있는 음료수병을 눈에 얹었다.
‘5분만, 딱 5분만 더 이러고 있다가 돌아가자.’
***
“진짜 같이 안 갈 거야?”
서머 시즌이 끝나고 월드 시리즈 결정전도 무난하게 탈락해 윈터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지 꽤 긴 기간이 남았다.
북미 리그에서 터줏대감인 메가 빅토리 피닉스, MVP에서 진형과 내게 오퍼가 들어왔다. 우승은커녕 준우승 경력도 없는 사람치고는 꽤 높은 금액의 연봉이었다. 이적을 결정한 진형은 요즘 숙소에서 짐을 하나둘 줄이고 있었다.
“응, 나는 여기 남을래.”
나라고 고민 없이 시원하게 결정한 일은 아니었다. 옷장에서 옷을 빼내는 진형을 보면서 옆으로 누웠다. 진형이 옷을 가방에 넣다 말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를 벽 쪽으로 밀어내더니 옆에 누웠다.
“그런 얼굴 할 거면 나랑 같이 가. 어떻게 두고 가라고 이래, 진짜.”
“내가 어떻게 봤는데?”
진형이 내 볼을 쓰다듬으며 살짝 웃었다.
“꼭 나 없으면 죽을 것 같이 보잖아.”
진형의 말에 짧게 웃었다. 나는 항상 형 앞에서 간절했는데 형은 이제야 그게 보이는구나.
“지운이 형도 나도 없이 괜찮겠어?”
“감독님도 있고, 동형도 있고…….”
사실은 나도 그리 자신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말끝을 흐렸다.
“서찬희 씨, 왜 이렇게 고집을 부리실까? 너 진짜 남을 거야?”
“응.”
이번에는 조금 힘이 실린 대답이 나갔다. 진형이 나를 지그시 보다가 품 안에 껴안았다. 은은하게 우디 계열의 향수 냄새가 났다. 진형과 참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진형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앞날이 걱정스러웠다. 사람이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윽박지르던 지운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새로운 딜러 영입 전까지 시간이 남아도는 비시즌이라 숙소에서 나온 진형과 빌라에서 내내 함께 지내다가 출국 당일에도 진형과 함께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갔다.
그간에는 그래도 붙어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저렇게 커다란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있으니 이제 진형이 진짜 멀리 가는구나 실감이 났다.
탑승수속을 마치고 출국장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았다.
“진짜 가네.”
“그럼 진짜 가지, 가짜로 가는 줄 알았어?”
진형이 내 볼을 꾹꾹 눌렀다. 내가 섭섭한 티를 낼 때마다 자기가 같이 가자고 할 때 왜 같이 간다고 안 했냐고 몇 번이나 뭐라 했던 진형이었다.
“아,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사냐.”
“잘 살 거면서 엄살 부리지 마.”
챙겨야 할 사람이 줄어서 오히려 더 편할 수도 있겠다. 진형이 서운하다는 표정을 했다.
“이제 다른 팀이라고 차갑게 구는 거 봐. 이제 나는 출가외인이라 이거지?”
“아, 미국으로 시집을 가시는 거다?”
서로 농담을 날리며 마주 보고 웃었다. 아주 오랜만에 이렇게 웃는 것 같았다. 진형의 탑승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멈추지 못한 시한폭탄은 이제 더 이상 태울 도화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진형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 이제 진짜 갈게.”
“잘 가.”
진형은 아마 정말 잘 지낼 것이었다. 알몸으로 무인도에 떨어뜨려 놔도 잘 살아남을 사람이니 큰 걱정은 없었다.
나는 100% 확률로 고생길이 선명한데 진형은 새로운 환경에서 또 다른 즐거움을 찾으며 잘 지낼 것을 생각하니 역시 조금 얄미웠다.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달려가 진형을 한 번 꼭 끌어안았다.
“찬희야, 누가 보면 나 전쟁터 나가는 줄 알겠어. 나 아예 한국 안 들어오는 거 아니야.”
“알았어. 이제 가.”
안고 있던 손을 놔주자 진형이 손을 흔들며 출국장 안으로 들어갔다.
땅바닥을 발로 몇 번 걷어찼다. 순식간에 불안감이라는 게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몇 번씩이나 나에게 숨을 쉬라고 다그쳤지만, 자꾸만 숨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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