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후회 없이 하자.”
진형은 자주 웃으며 그 말을 했다. 역대 최단기간 KKL 입성해 낸 기적의 아마추어팀 팀 트라이앵글은 KKL에 입성하자마자 트릭스 게이밍과 계약했다.
중간에 내가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한 번 탈주할 뻔하기도 했고 수없이 삐걱거리기도 했고 별별 일을 다 겪긴 했지만 우리는 결국 해냈다. 그때만 해도 성취감에 도취해 있던 우리는 우리가 앞으로 3위의 저주에서 한참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댈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
내가 조각가라고 생각해 보자. 그냥 조각가도 아니고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다면 모두가 극찬하며 한 시대를 풍미할 그런 천재 조각가라고.
그렇다면 나는 매일 아침 오랜 시간 정성스럽게 만들어 온 예술 작품을 하나씩 깨부수며 하루를 시작하는 셈이었다.
커다란 방 안 가득히 차 있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조각상들을 보며 이걸 언제쯤이면 다 부술 수 있을까? 동시에 이렇게 그냥 부숴 버리면 너무 아깝지 않냐는 생각도 하지만 결국은 매일 아침 망치를 사정없이 휘둘러 형체가 남지 않을 때까지 깨부숴야 숨을 좀 쉴 수 있었다.
너무 오랜 시간 앓아서 이제는 열이 끓고 있는지도 모르는 열병 같은 내 짝사랑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자면 대충 이랬다.
“결과가 정해져 있으면 원인을 제거하면 되는 건데 말이야.”
“뭐라고?”
“형한테 말한 거 아니야. 혼잣말했어.”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던 진형이 아리송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열일곱에 만나 이제 스물하나. 진형은 어느새 스물네 살이었다. 계속된 3위 성적과 더불어 작년에 지운이 은퇴를 선언하고 팀을 떠나면서 나는 진형에게 집착 아닌 집착을 하고 있었다.
지난 주말에 진형이 외박하고 왔는데 진형이 자리를 비운 동안 내내 손톱을 씹어 대다가 엄지손톱 반절이 사라졌던 일도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건지, 누구와 연락하는지는 몰라도 집중한 진형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핸드폰에 고정되어 있는 시선을 빼앗았다. 지금은 나와 같은 샴푸 냄새가 나지만 그날 형 몸에서 나던 낯선 샴푸 냄새라든가 은은하게 옷에 배어 있던 여자 향수 냄새가 생각났다. 어차피 나에게 돌아올 거라면, 나를 내치지 않을 거라면 그냥 온전히 내 것이 되어 주면 좋을 텐데.
“서찬희 씨, 왜 또 기분이 안 좋아 보일까?”
“안 좋으면 뭐 어쩌려고?”
“기분 좋게 해 줘야지.”
진형이 눈을 접으며 웃더니 핸드폰을 던져 놓고 달려들어 내 볼에 마구잡이로 뽀뽀를 날렸다. 하지 말라고 밀어내도 양 볼을 번갈아 가며 마음대로 쪽쪽거리다가 장난스럽게 볼을 깨물고는 놔주었다. 고개를 기울여 들이밀며 내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이제 좀 기분이 풀리셨나?”
“몰라.”
“풀렸으면서 새침하게 굴기는.”
진형이 아무렇게나 던져진 핸드폰을 주워 들고 다시 내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집중한 듯 눈빛에 장난기가 사라졌다.
요즘 내 기분은 널뛰기하듯 마구 오르락내리락하는 중이었다. 하루는 진형이 얄미워 꼴도 보기 싫다가 그다음 날이면 또 미치도록 좋았다. 나를 더 미치게 하는 점은 진형은 매일 똑같이 나를 대한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건 불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게임에 집중하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뭐라도 신경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고마웠다. 미치지 않으려면 다른 곳에 온 신경을 다 쏟아야 했다. 그마저도 진형과 함께해야 했지만 말이다.
***
- 이번 세트 MVP, 체크메이트입니다! 이 선수 요즘 아주 기량이 좋습니다!
- 영리한 플레이의 정석이죠. 이렇게 맵 구석구석까지 세밀하게 시야 봐주는 버퍼 찾기 힘듭니다.
- 이 장면이 핵심적인 장면이었죠. 상대가 여기 모여서 딜러 한 번 잘라먹겠다고 기다리는데 다 알고 있죠?
- 여기 모여 있는데? 콜이 나오자마자 하나로 모여서 역으로 상대를 전멸시켰죠. 그 전투의 시작, 그곳에 체크메이트 선수가 있었습니다.
- 스킬을 굉장히 정교하게 쓰는 선수로 유명한데 저 전투 개시는 정말 예술적이었죠.
- 어떻게 각도가 저렇게 나오냐고요!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든 감각입니다.
- MVP 인터뷰가 준비되었다고 하네요. 문은영 아나운서 나와 주세요.
“네, 이번 서머 시즌 2라운드도 기분 좋게 상위권을 달리고 있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인데요. 오늘 승리의 주역인 MVP 선수들 만나 보겠습니다. 1세트 MVP 딜러 킹 선수와 2세트 MVP 버퍼 체크메이트 선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세요.”
동시에 인사한다는 게 넋을 놓고 있다가 타이밍을 놓쳐 뒷말만 작게 따라 했다. 진형이 인사를 하고 카메라와 관중석을 향해 손을 흔들자 환호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킹 선수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이번 1세트 정말 안정감 있는 딜러란 바로 이런 것이다! 라고 외치시는 것 같은 모습에 중계석에서는 ‘딜러에게 교과서가 있다면 바로 킹이다!’라고 하셨는데 소감 한 번 들어 볼게요.”
“제가 좀 안정적인 맛이 있죠.”
“그래서인지 MVP 선정은 자주 밀려나시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요즘 찬희 MVP 포인트를 보면 조금 부럽기는 해요.”
차분한 진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마이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체크메이트 선수가 요즘 기량이 아주 최고조라는 평가를 받고 계시긴 하죠. 저번 경기에는 단독 MVP를 하셨는데 오늘은 이렇게 딜러, 버퍼 듀오가 함께 나오셨어요. 2세트 MVP로 선정된 체크메이트 선수의 승리 소감도 한 번 들어 볼까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어 짧게 대답하고 마이크를 내리자 진형이 카메라에 보이지 않게 팔을 뒤로 빼 등허리를 톡톡 두드렸다. 무슨 말이라도 더 하라는 눈치였다.
“어…… 팀원들이 잘 따라와 줘서 이길 수 있었습니다.”
“팀의 사령탑 역할을 제대로 해 주셨는데요. 그렇다면 오더를 제일 잘 따르는 팀원은 어떤 분인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은영의 질문에 진형이 자기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가리켰다. 당장 자기라고 말하라는 그 무언의 압박에 웃음이 나왔다.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아, 이렇게 피해 가시나요. 아쉽지만 두 분 눈빛 교환하시는 걸 보면 다들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요. 킹 선수, 저 답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연히 저라고 생각합니다. 저만큼 말 잘 듣는 딜러도 없거든요.”
진형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2:0으로 빠르게 승리해서 시간이 남았는지 인터뷰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고 진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시간이 말하는 시간보다 길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진형은 가기 전에 팬들에게 트릭스 게이밍에서 나눠 준 굿즈 몇 개를 관중석으로 던져 주고 몰려든 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뒤에서 멀뚱하게 서 있다가 먼저 차로 돌아왔다.
“진형이는?”
“어, 팬들이랑 인사 중.”
“쟤는 아주 아이돌이 다 됐다.”
동진이 킥킥 웃으며 오늘 경기 중계를 다시 보고 있는 준이를 툭툭 쳤다.
“너도 팬들이랑 인사하는 거 좋아하잖아. 가서 같이 인사하고 와.”
“됐어요. 진형이 형 옆에 있어 봐야 오징어밖에 더 돼요?”
준은 툴툴거리며 자기가 활약했던 장면을 되돌려 반복 재생했다. 자기 객관화가 확실한 편이지만 자기애도 강한 녀석이라 신기했다. 내가 저 녀석의 반만큼만이라도 자기애가 있었더라면 세상 사는 게 한결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씻고 나오자 진형이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요즘 왜 그렇게 핸드폰만 붙들고 살아.”
“어? 어. 다 씻었어?”
급하게 말을 돌리는 모습에 머리를 털다 말고 젖은 수건을 힘껏 진형에게 던졌다.
“뭔데 말 돌려?”
“젖은 걸 던지면 어떡해. 아프잖아.”
“뭐 숨기냐고 묻잖아.”
“왜 또 성질부리고 그래. 요즘 이상하네.”
뭐 숨기는 점이 있는 게 분명했지만 숨기려고 작정했다면 내가 더 캐묻는다고 말할 성격도 아니었다. 침대에 뒤돌아 눕자 뒤에서 진형이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찬희야.”
“…….”
“하, 알았어. 일어나 봐. 말할 테니까 머리 말리고 자.”
듣는 체도 안 하고 있자 진형이 내 팔을 잡아끌어 강제로 일으켰다. 화장실에서 수건을 한 장 꺼내와서 머리를 닦아 주면서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나 이번 서머 시즌 끝나면 계약 종료되잖아.”
“응.”
어차피 다른 곳에서 트릭스 게이밍보다 연봉을 높게 부르지도 않겠지만 높아도 데뷔 때부터 함께한 곳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진형도 재계약을 하리라 생각했다.
“그때 가 봐야 제대로 알 것 같긴 한데 나는 아마 북미나 중국으로 이적할 것 같아.”
깜짝 놀라서 진형을 바라보자 농담이 아닌 모양이었다.
“해외 팀에 있는 선수들이랑도 얘기 많이 나눠 봤는데,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리그 상금 규모도 더 크고 연봉도 오를 테고.”
“돈 때문에 가는 거야?”
“꼭 그런 건 아니야.”
진형은 이미 떠나기로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이미 작년에 지운이 은퇴했을 때도 적잖이 힘들었던 터라 덜컥 겁부터 났다.
“너도 무조건 재계약하지 말고 이적도 생각은 해 봐. 너는 해외 팬들도 많아서 나보다 조건도 좋을 거야. 환경 바뀌는 것 때문에 초반에 고생은 좀 하겠지만 외국어도 배울 수 있을 테고.”
이렇게 진형이 차분하게 얘기해 주면 어떤 상황에서도 금방 진정이 되곤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더 어지러웠다.
“나한테 언제 말해 주려고 했어? 시즌 끝나고? 이적 시장 열리고? 아니면 아예 계약서 도장 찍고 나서?”
“일부러 숨긴 거 아니야. 너 기분 좋을 때 봐서 얘기해 주려고 그랬어. 너 불안해할 거 뻔히 아는데 안 그래도 예민한 시즌 중에 그렇게 만들기 싫어서.”
“…….”
자기도 고민이 많았을 텐데,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괜히 서운해서 화를 낸 것 같았다. 처음 진형을 만났을 때보다 나이를 더 먹었는데도 나는 계속 어린애같이 굴고 있었다.
진형의 손을 떼어 내고 방을 뛰쳐나왔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있는 힘껏 달렸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숙소 밖이었다. 여태 당장 다음 시즌, 다음 경기, 다음 세트 하나에 정신을 팔고 살고 있었던지라 그런 미래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동진이 남아 있다지만 지운도 진형도 없이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러다 동진도 은퇴하면 혼자 남은 내가 이 바닥을 견뎌 낼 수 있을까?
내가 내게 던지는 질문마다 두려웠다. 숨을 몰아쉬는데 뒤쫓아온 진형이 내 팔을 붙잡았다.
“같이 가자.”
고작 그거 좀 달렸다고 숨을 헐떡이는 나와는 다르게 진형은 숨이 약간 거칠 뿐 여전히 목소리가 차분했다.
“찬희야, 내가 어디를 가든지 너랑 나랑 같이 가면 되잖아.”
“형, 나는, 나…… 나는 모르겠어. 모르겠어.”
나도 모르게 울먹이는 소리가 나왔다. 진형이 끌어안아 등을 토닥여 주는데도 손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괜찮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 천천히 생각하자. 응?”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이번 서머 시즌 남은 경기는 두 개. 이변이 없다면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것이었다. 플레이오프까지 치더라도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게 느껴졌다. 마치 시한폭탄의 타이머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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