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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이 트로피-38화 (38/100)

38화.

담배를 다 태운 진형이 전화가 왔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받았다.

“어, 여보세요?”

- 진진, 맥주 좀 사와.

“형, 죄송한데 저한테 맥주 맡겨 두셨어요?”

- 응!

“알았어. 동형도 마신대? 피처로 사가?”

- 엉, 알아서 사 와.

전화는 금방 끊겼다. 밖에 있는 것을 알고 심부름을 시킨 것 같았다.

“같이 가 줄까?”

“아냐, 금방 다녀올게. 너 먼저 들어가 있어.”

진형이 가벼운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

요즘 진형이 저럴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지 않았다. 뺨을 짝짝 소리가 나게 치고 나서야 진정이 됐다.

혼자 충분히 들고 올 수 있겠지만 백지장도 맞드는 게 낫다고 진형을 도와줄 생각으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시간이 그래도 꽤 지났으니 이쪽으로 오고 있으려니 했는데, 가는 동안 마주치지 않아 의아했다.

편의점에 다다르자 진형이 편의점 앞의 테이블에 앉아서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여자가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긴 생머리가 함께 흔들렸다. 지운이 예쁘다고 했던 저녁 알바생 같았다.

“어…….”

여자가 진형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점점 좁아지더니 입술이 맞닿았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을 경련하듯 깜빡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돌아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숙소에 들어서자 아직도 술판이 벌어지고 있는지 시끌시끌했다. 그대로 방으로 달려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눈을 감아도 떠도 눈앞에 두 사람이 키스하던 모습이 떠올라 괴로웠다.

벌떡 몸을 일으켜 콱 쥔 주먹으로 베개를 두들겨 패다가 다시 엎드렸다. 아직도 턱 끝까지 차 있는 숨을 몰아쉬며 해결되지 않는 의문들을 곱씹었다.

‘왜 그 여자랑 키스하지? 그리고 왜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이렇게 화가 나지?’

베개로 얼굴을 누르고 바로 누웠다. 내게 진형이 누군가와 키스를 못 하게 막을 자격이 있는가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조금 전에 나랑 키스 아닌 키스를 했던 진형이 아니던가. 그렇게 금방 다른 사람이랑 할 필요가 있나? 머리가 복잡했다.

확실히 예전에는 SNS에 여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도 많이 올라왔지만, 최근에는 학교와 대회 준비를 병행한다고 따로 만나는 여자는 없었다.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한 걸까?’

몸을 받아 줄 수 있다면 마음도 받아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오산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진형과 뭐 그리 대단한 미래를 꿈꾸었던 것도 아니었다.

거의 잠들뻔한 순간 누가 베개를 치우는 손길에 눈을 떴다. 눈이 부셔 찡그리며 눈을 깜빡였다. 진형이 침대맡에 앉아 있었다.

“…….”

진형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기분 안 좋아?”

“안 좋아.”

“……혹시 봤어?”

“봤으면.”

무슨 말을 하려고? 변명이라도 할 생각인지 궁금했다. 부스스 몸을 일으켜 제대로 마주 보았다.

“네가 좋아하는 사람인 거 알고 있었어. 네 기분이 상할 만하다는 것도 알아.”

진형이 머쓱한지 고개를 돌렸다.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지금 진형은 내가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가 자신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늘에서야 얼굴을 제대로 본 그 사람에 대한 짝사랑 때문에. 멋대로 오해하는 진형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 고백받았어. 내가 마음에 들었대. 키스한 건 미안.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나는 걔가 거기서 그럴 줄은 몰랐어. 걔도 충동적으로 그런 거지 그런 애는…….”

“됐어.”

굳어지는 내 표정에 당황했는지 빠르게 말을 잇는 진형이었다.

애초에 방향 자체가 글러 먹었는데 부연 설명을 더 들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들을수록 속이 좋지 않아 말을 끊자 진형이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거절했어.”

“어쩌라고.”

“거절했다니까?”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잘했다고 칭찬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거야 지금?”

날이 선 나의 말에 진형도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말없이 서로 노려보고 있는데 지운이 헛기침하며 방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중간부터 밖이 조용하다 싶었다.

“뭐야, 너희 왜 싸우고 그래.”

“아냐.”

“뭐가 아니야. 찬희야 너…….”

급작스럽게 토기가 밀려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야, 안 돼. 침대는 안 돼……! 권진형 뭐 해. 찬희 들어!”

입을 틀어막은 채 진형에게 들려 화장실로 배달된 나는 위장을 완전히 비워 더 나올 것이 없어 위액이 나올 때까지 한참 동안 변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

진형은 어제 말한 대로 부모님과 이야기하러 본가로 떠났다. 나는 간밤에 오른 열 때문에 침대에서 땀이나 뻘뻘 흘리고 있었다. 약국에 다녀온 지운이 해열제와 물을 건네주었다. 손에 힘이 없어 물컵이 바닥을 뒹굴며 축축하게 적셨다.

“아이고…….”

“미안.”

“아픈 애가 사과를 다 하고 그래. 그러지 마.”

수건을 가져와 물기를 닦고 새로 떠온 물을 입에 대주었다. 잠깐 몸을 일으켰다고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약 기운이 빨리 돌지 않으면 뇌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어제 일 진형이한테 대충 들었다. 맘이 많이 상했나 보네.”

지운이 토닥여 주자 눈에 눈물이 고였다. 더운 숨이 푹푹 쉬어졌다.

“아, 왜 울고 그래. 형 속상하게. 네가 지은이를 그렇게 좋아했는지 몰랐네.”

“……쓰레기.”

“야, 누가 키스 한 번에 그렇게까지 말해.”

“그럼 원래 그래? 형도 어떤 사람이랑 키스하고 바로 다른 사람이랑 키스해?”

“무슨 그런 쓰레기 같은……. 오, 이런 씨발.”

내가 서러움에 복받쳐 두루뭉술하게 말했을 뿐인데 지운은 무슨 외화 드라마 더빙 성우 톤으로 욕을 시원하게 내뱉으며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알아낸 셜록 홈즈 같은 표정을 했다.

“씨발, 너 지금 지은이 말하는 거 아니잖아. 와, 이 쓰레기 새끼가…… 와…….”

지운이 잠시 눈을 감고 뒷목을 잡았다가 깊게 심호흡하며 진정했다.

“네가 했어, 걔가 했어.”

반은 내가 하고 반은 진형이 했기에 대답이 쉽지 않았다. 대답을 고민하고 있자 지운의 분노가 다시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걔네, 걔야. 와, 이런 씨발…… 이 자식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지 마요. 형이 뭘 어쩔 건데.”

지운이 돌아 버리겠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푹 젖혔다.

“설마 좋아하냐?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 권진형이냐.”

“난들 알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많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진형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었다. 수도꼭지라도 틀어 놓은 것처럼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지운이 불쌍하다는 듯이 눈물을 닦아 주었다.

“걔 원래 아무나 만나. 꼴에 얼굴값 한다고 눈이 더럽게 높아서 아무나 만나는 건 아니긴 한데 그냥 자기 취향이면 막 만나. 아, 씨발 남자도 꾀는 줄은 몰랐네. 찬희야, 형이 부탁 하나만 하자.”

지운이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걔는 제발 접자. 진형이 친한 형, 동생으로서는 진짜 최고거든? 근데 진짜 좋아하는 순간 지옥이라고 장담한다.”

지옥이라. 그동안 지옥 불에서 펄펄 끓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나 싶기도 하다. 그만하자. 그래, 첫사랑 그거 원래 안 이루어지는 거라며. 여기서 접자. 신이 있다면 다른 사람을 보내 주겠지. 여태 기분 좋았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닌가.

결론을 짓고 나니 조금은 차분해졌다. 기분이 날뛰는 것이 요즘 사춘기 왔냐는 지운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제가 알아서 접을 테니까 형도 모르는 척하세요.”

코를 훌쩍이며 말하자 지운이 한숨을 쉬며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서럽게도 우네. 야, 너희 방 같이 쓰는 거 괜찮아? 동진이랑 바꿔 줄까? 아, 씨발. 그냥 딜러를 새로 구해 볼까?”

“됐어요. 숙소 마련도 그 형이 했는데 뭘 어쩌려고. 신청서 접수도 해 놓은 마당에 대회 포기할 일 있어요?”

맞는 말만 한다고 지운이 얼굴을 감싸 쥐고 괴로워했다.

“형은 제가 진형이 형 좋아한다는데 안 불쾌해요?”

“불쾌하지.”

겨우 멈췄던 눈물이 또 후드득 떨어지자 지운이 당황하며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니. 네가 불쾌하다는 거 아니야. 상대가 진형이인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지운이 옆에 드러눕더니 토닥거려 주었다.

“나는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으니까 네가 평범한 연애를 하면 좋겠어.”

“전제 조건이 틀렸어요. 남자끼리 어떻게 평범한 연애를 해요.”

“그런가.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 좋아하기 전에 나한테 검사받고.”

고인 눈물을 닦아 주며 자기 손을 내 이마에 얹었다. 열 때문에 닿은 손이 차갑게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아, 나 지금 좀 너무 자상하고 멋진 것 같은데. 나한테도 반하면 안 된다.”

지운의 농담에 나오던 눈물도 쏙 들어갔다.

***

“그래서 얘기는 그렇게 마무리된 거야?”

“응, 차는 반납했는데 집은 그냥 써도 된다고 하시네. 내년까지 데뷔 못 하면 그냥 복학하는 조건으로.”

“아, 그럼 장비들 들고 버스 타고 다녀야 할 수도 있겠다.”

“내년까지면 빡빡해졌네.”

“아마추어 대회, KKCL 전부 한 번에 뚫어야 기간 맞출 수 있겠다. 하긴 우리라고 여기에 몇 년이나 쏟을 생각 없었잖아. 안 그래, 지운이 형?”

“어? 어. 그렇지…….”

벌써 해가 졌는지 방 안이 컴컴했다.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키자 축축한 물수건이 툭 떨어졌다. 아마 지운이 올려 두고 간 것 같았다.

“오늘 형 좀 이상한데.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어, 있긴 있었지. 오늘 아니고 어제?”

“나 때문에 찬희가 힘들어하고 있는 거 아는데 그만 화내. 나도 지은이가 그럴 줄 몰랐다고 설명해 줬잖아.”

방문을 슬쩍 열어 보니 진형과 지운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 왜 또 오늘은 둘이 싸우려 들어. 우리 신청서 접수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래.”

“너 내가 여러 번 말했잖아. 가볍게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거 다 좋은데 내 주변에서 그러지 말라고.”

“형, 나 진짜 지은이 꾀어낸 적 없어.”

“이, 씹…….”

쾅 소리가 나게 문을 열자 세 명이 모두 동시에 내 쪽을 보았다.

“그만하지?”

나는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붙어 있던 지운과 진형 사이를 가로질러 비척비척 걸어가 식탁에 앉았다.

“나 배고픈데.”

생전 처음 말해 보는 말이었다. 진형이 눈이 동그래져서 지운을 툭 쳤다.

“형, 쟤 지금 뭐라고 했어?”

“나 요즘 귀가 좀 이상하긴 하거든? 야, 너도 들었어?”

뭐 별거 말해 줬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며 반응해 주나 민망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사다 줄게.”

“아무거나.”

내 대답에 뒤에서 지운과 진형이 머리를 맞대고 ‘죽을 먹여야 한다.’ ‘아니다, 이럴 때 맛있고 열량이 높은 것을 먹여야 한다’하며 토론이 이어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옆자리에 동진이 앉았다.

“짝사랑 실패했다며.”

형들 사이에서는 내가 지은이라는 사람을 혼자 짝사랑하다가 실연당한 것으로 결론이 정해진 것 같았다. 상대가 다르긴 해도 실연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니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형들이 되어서는 싸워서 애 눈치나 보게 하고 못 말린다. 그냥 네가 큰형 해라.”

동진이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턱을 괴고 내 저녁 메뉴에 대해 지운과 열심히 토론 중인 진형의 옆모습을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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