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한국 나이츠 1부리그 KKL 진출하기 위해서는 KKCL에서 우승해서 승강전을 치러야 했다.
KKCL은 프로 구단의 2군 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두 자리는 스피릿 게임즈 주관의 공식 나이츠 아마추어 대회 우승자와 준우승자에게 출전권이 주어졌다.
우리는 아마추어 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개개인의 기량이 중요해 모두 랭커 진입을 1순위 목표로 잡았다. 진형은 이미 본 계정이 랭커였고 그마였던 지운과 동진은 2인 랭킹전을 돌려 금방 랭커에 진입했다.
내가 제일 골칫거리였는데 버퍼 특성상 랭커에 오르기 쉽지 않았다. 나이츠에서 버퍼의 역할은 거의 딜러에게 껌딱지같이 붙어 있는, MMO RPG에서의 펫 느낌이라 재미도 없을뿐더러 게임에 영향을 주기도 힘들었다.
아는 버퍼와 합을 맞춰 딜러를 플레이하면서 억지로 쥐어짜듯 겨우 올렸다. 랭커에 진입했으니 이제는 버퍼로 랭커 생태계에 적응해야 하는데 영 쉽지 않았다.
버퍼의 스킬 구성은 대부분 팀원 혹은 자신에게 이로운 효과를 주는 버프를 걸거나 적팀에게 불리한 효과를 주는 디버프를 거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대부분 딜러에게 딱 붙어서 어떻게 내 딜러를 잘 보좌하는가가 중요했다.
유명한 랭커 버퍼의 경우 극미세 컨트롤로 딜러의 초당 데미지를 좀 더 올리는 것에 집중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1분 1초를 쪼개 딜러를 케어하는데 온 신경을 쏟았지만, 가뜩이나 4명 밖에 없는 인원 중 하나를 이렇게 펫처럼 사용하는 건 너무 낭비 같았다.
꼭 이렇게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진형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오래 해 본 결과 딜러를 혼자 성장하게 하고 맵을 좀 더 넓게 쓰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어서 랭킹전에서 시험해 본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처음에는 패배도 많았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지금은 꽤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했다. 게임 커뮤니티에 내 게임 영상이 올라갔고 의외로 화제를 끌어서 최근 랭킹전에서는 ‘Chanini식 버퍼 운영법’이라며 유행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은 버퍼 끼고 플레이하는데, 나는 버퍼 없이 초반을 이끌어야 하니까 힘들었어. 그런데 요즘엔 오히려 더 편한 것 같기도 하고.”
“맵을 더 넓게 쓸 수 있으니까 적팀 위치 파악도 더 정확하잖아.”
“맞아. 초반을 버리는 대신에 중후반의 메리트가 더 크니까.”
진형과 지난 게임의 리플레이 영상을 보면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회를 준비하면서 동시에 학교에 다닌 대학생 세 명은 학교에서는 수업, 과제, 중간고사에 시달렸고 숙소로 돌아오면 랭커 유지를 위한 랭킹전과 네 명이 합을 맞추는 일반전 플레이, 다른 아마추어팀과의 연습 경기 등 지옥 캠프 같은 일정을 경험했다.
지운은 그래도 듣는 수업이 몇 개 없어 그냥 버티기로 했고 진형은 중간에 휴학계를 신청했다. 오직 동진만이 모든 일정을 가볍게 클리어했다. ‘과제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야. 코어 근육으로 하는 거지.’ 그의 명대사 중 하나였다.
진형이 휴학하고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그 덕에 이득을 보는 것은 항상 나였다. 진형에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올려다보았다.
“왜.”
“아니야.”
슬쩍 몸을 일으키니 내 머리를 붙잡아 다시 기대게 했다. 가볍게 내 입에 입을 맞췄다.
“뭐야.”
“왜 해 달라고 본 거잖아.”
꼭 이럴 때만 귀신같이 정곡을 찔러 대서 할 말이 없어졌다. 게임 리플레이를 잠시 멈추고 진형의 위에 걸터앉았다.
나는 가만 생각해 보니 여자보다는 남자가 좋은 것 같았고 진형은 완벽한 이성애자였지만 우리 둘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쾌감에 약할 시기인 한창때의 남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진형의 눈치를 보면서 다시 입을 맞추자 혀가 얽혀 들었고 자연스럽게 진형의 손이 내 티셔츠 안으로 들어왔다. 가슴 부근에 손이 닿자 진형이 짧게 웃으며 입을 떼어 냈다.
“갑자기 왜 웃어.”
“아, 습관적으로 만지는데 너무 잡히는 게 없어서 항상 놀라. 내가 너 진짜 살 좀 찌워야겠다.”
진형의 말에 괜히 기분이 상해 어깨를 밀치고 일어났다. 그래, 전에 만나던 사람은 빵빵한 가슴이 한가득 잡혔나 보지.
“왜 또 삐져.”
“됐어. 생각해 보니까 지운이 형 올 시간 다 됐어.”
머리를 긁적이며 컴퓨터 앞에 다시 앉았다.
“오늘 뭐 한다고 했지?”
“팀 이름 발표한다고 자기 닉네임 생각해 놓으랬잖아. 닉변권도 준비하래.”
지운이 발로 뛰어다니며 고생해서 모은 팀이고 실질적으로 주장 역할을 맡고 있어서 지운이 팀명을 정하는 것에 아무도 반대 의견이 없었다. 하지만 역대 지운의 닉네임들이나 사람에게 붙여 준 별명들이 하도 큐티 뽀짝하기 그지없어서 걱정되었다. 지운이 만들어 준 아이디인 ‘Chanini’만 봐도 그랬다.
“형 요즘 프랑스어 수업 듣던데 쥬뗌므나 쁘띠봉봉 같은 거면 어떡하지.”
진형의 말에 소름이 다 돋았다.
“형은 닉네임 그대로 갈 거야?”
“바꿔야지. 킹진은 좀 쪽팔려. 지존 진형 같잖아. 너는?”
“모르겠네.”
작명에는 생각도 센스도 없는지라 머리나 식힐 생각으로 온라인 체스 게임을 켰다.
“한참 바둑 두더니 요즘은 체스로 갈아탔어?”
“바둑보다 이게 쉽더라고.”
연습하면서 쉬는 시간에 호흡이 긴 게임은 하기 힘들고 지뢰 찾기나 솔리테어 게임들도 질려서 포커, 고스톱, 섰다를 거쳐 바둑에서 체스로 넘어왔다. 여기도 고인 물이 많아서 어지간하면 패배하기 바빴지만, 머리 돌리기엔 나쁘지 않았다. 진형이 바짝 옆에 붙어 앉아 내가 체스 하는 것을 구경했다.
“너는 어떤 기물이 제일 좋아?”
“글쎄, 운용하는 건 나이트가 제일 재밌긴 해.”
“보통 체스 하는 사람들은 퀸을 제일 좋아하지 않나.”
“너무 사기캐는 취향이 아니야.”
진형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별생각 없이 몇 수를 두었을 뿐인데 어디로 움직여도 내 킹의 목이 날아갈 처지에 처했다. 체크메이트였다. GG를 치고 게임을 나왔다.
“어, 나 닉네임 정했어. 체크메이트로 할래.”
“그렇게 간단하게 정하는 거야? 와, 저번 달에 정했으면 닉네임 고도리 했겠다.”
그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혹은 삼팔광땡이라거나.
“그럼 나도 진 떼고 그냥 킹하지 뭐. 세트 같고 좋다.”
***
“자, 우리 팀명을 발표하겠습니다.”
지운이 물컵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일정이 있었던 명진욱 감독님도 합류했다.
“진짜 독하다. 감독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어허, 팀 지운 주목.”
농담처럼 팀 지운이라고 부르고 다녔던 지운이었다. 주섬주섬 돌돌 말린 종이를 꺼내 펴서 모두에게 공개했다.
[Team Triangle]
“줄이면 티티. 귀엽지.”
“별걸 다 줄이려 들어. 왜 하필 트라이앵글이야? 나이츠는 4인 게임인데 스퀘어가 낫지 않아?”
“동구리동동, 너는 미대 다니는 애가 센스가 없어. 삼각형만큼 완벽한 도형이 어딨어.”
음, 철저하게 본인 취향으로 이루어진 이름이라는 것은 알겠다. 쥬뗌므나 쁘띠봉봉이 아닌 것을 확인한 진형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멀쩡한 거라 다행이다. 한숨 돌렸네.”
“맞아.”
“거기 딜 버퍼 듀오 잡담 금지. 다들 닉네임은 생각해 뒀지? 오늘 대회 신청서 작성할 거라 닉네임 변경까지 싹 마칠 거라고.”
구동진: 동구리→TT Guri
백지운: 냥냥펀치→TT Whitepaper
권진형: Kingjin→TT King
서찬희: Chanini→TT Checkmate
닉네임 변경을 마치고 나니 한결 하나의 팀 같고 좋았다. 만족스럽게 뒤를 도는데 지운이 눈을 빛내며 소주병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형, 뭐 해요?”
“창단식 갈겨.”
지운이 거의 광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 이 형 한다고 마음먹은 건 무조건 하는 편인데.
“저번이 마지막 외식이자 회식이라면서요?”
“집에서 마시는 건 카운트 안 되잖아. 차니차니, 형 딱 두 병만. 응?”
지운이 강아지 같은 눈빛 연기를 펼치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형은 연극 영화과에 갔어야 한다니까.
“그런 억지가 어딨어요.”
“좆까. 난 마셔야겠어.”
애교작전이 통하지 않자 바로 걸걸하게 말하며 소주병을 화려하게 돌려 열어 버리는 지운이었다.
기본적으로 오는 술자리는 거절하지 않는 동진과 진형은 순순히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명진욱 감독님은 집에 가 봐야 하기도하고 어린애들끼리 재밌게 놀라며 첫 잔 건배만 하고 빠져준다고 하셨다.
“팀 트라이앵글 KKL 가자!”
“가자!”
동진이 건네준 물이 담긴 소주잔으로 건배했다.
“형, 솔직히 말해요. 게임하려고 사람 모은 거 아니지.”
“이번에 내가 너희를 이렇게 모은 건 당연히 술 마시려고 모았다.”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지운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대회를 준비하고 나이츠를 좋아하는 형이라 다들 농담인 것을 알고 있었다.
건배만 하고 간다던 명진욱 감독님도 아주 눌러앉아 지운과 주거니 받거니 하는 중이었다. 동진이 소주잔에 계속 물을 채워 줘서 다들 술에 취할수록 나는 물배가 차서 괴로웠다.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을 가는데 베란다에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심각하게 통화를 하는 진형이 보였다. 무슨 얘기길래 저런 표정으로 통화를 하지.
“네, 알겠어요. 끊어요.”
화장실을 나오자 베란다를 나서는 진형과 눈이 마주쳤다. 딱딱한 얼굴이 나를 보자 부드럽게 풀어졌다.
“표정이 안 좋아.”
“아무것도 아니야, 담배 피우러 옥상 갈 건데 같이 갈래?”
“응.”
진형이 핸드폰을 뒷주머니에 쑤셔 넣고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옥상에 도착해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여 나에게 물려 주고 새 담배를 꺼냈다. 그게 마지막이었는지 주먹을 꽉 쥐어 담뱃갑을 구겼다.
“엄마가 나 휴학한 거 아셨나 봐.”
“아, 부모님 몰래 했다고 했지.”
“응, 내일 차 반납하러 오라고 하시네.”
“집도 반납해야 해?”
“음, 그러진 않을 거야. 내일 적당히 협상하고 올게. 걱정하지 마. 대신 앞으로 이동할 때 좀 불편하겠다.”
담배를 빨리 피우는 진형은 얘기하면서도 벌써 반을 넘게 태웠다. 진형이 그 차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기에 표현은 많이 안 하고 있지만 섭섭한 모양이었다.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우승해서 우승 상금으로 사자.”
“저거 사려면 우승을 몇 번이나 해야 하지.”
손가락을 접으며 허탈하게 웃는 진형이었다.
“하면 되지.”
“그래 까짓거 우승하고 몸값 올려서 한 단계 위로 사지 뭐.”
진형이 담뱃불을 지져 끄더니 한 대가 모자랐는지 내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 저거 마지막이었지.
한 번 연기를 빨고 건네려는데 진형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고 내 숨을 빨아들였다. 입을 떼고서 장난기 가득하게 웃으며 얼마 나오지도 않는 담배 연기를 후 뱉어 냈다.
“이렇게는 잘 안 빨아지네.”
내 손에 아슬아슬하게 들린 담배를 빼앗아 자기 입에 물고서 태평하게 말했다. 누구는 자기 돌발 행동에 지금 숨이 턱 막혀서 제세동기가 필요한 것 같은데 느긋하게 담배나 태우고 있다.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옥상이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내가 날뛰는 심장을 다독이며 심호흡을 몰래 하는 동안 진형은 담배를 다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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