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어, 진진. 왜?
“어, 형. 나 오후 수업 휴강 났는데 같이 갈 거면 태우러 가고.”
- 미안, 나 시간 더 걸릴 것 같아서 먼저 가라.
“응, 알겠어. 끝나고 전화해 봐. 데리러 갈 수 있으면 갈게.”
- 엉, 땡큐.
어제 자신의 주량을 한참 넘길 정도로 퍼마시던 지운의 속도에 따라가다 보니 생각보다 많이 마셔 내 주량도 넘어갔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애착 인형 끌어안듯 찬희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귀신같이 알아챈 찬희는 내 팔을 떼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침대로 달려가 누웠다. 잔뜩 뿔이 난 그 뒤통수를 보며 어제 내가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해 봤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술이 그렇게 약할 줄은 몰랐지.”
아침에 다크서클이 내려와서는 퀭한 얼굴로 오만상을 하고 있던 찬희가 떠올랐다. 한 잔밖에 안 줬는데 숙취가 그렇게 올 일인가.
뒤늦게라도 숙취 해소제를 사 줘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들렀다.
“어서 오세요.”
“어…….”
저녁 알바생이 벌써 나온 모양이었다. 하얗고 순한 인상이 어딘가 찬희와 닮았다. 지운이 은근슬쩍 흘린 바로는 저 사람이 찬희의 첫사랑 상대였다.
“일찍 나오셨네요?”
“아, 네. 시간이 비어서요.”
계산대에 숙취 해소제 두 병을 올려놓으며 웃음을 지어 주자 여자의 큰 눈이 접히면서 마주 웃었다. 확실히 왜 좋아하는지는 알 것 같기도 하고.
“저, 혹시 지운 오빠랑 같이 사시는 친구분 맞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지운 오빠가 알려 줬어요. 같은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랑 같이 산다고.”
여기 이사 오자마자 떡이며 과일을 돌리면서 빌라 사람들 호구조사를 마치고 연락처까지 전부 따낸 지운이었다. 지운의 친화력이란 알고 있는데도 항상 놀라운 편이라지만 편의점 알바생과도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지운이 형이랑 친해요?”
“오다가다 인사 정도는 나눠요.”
“그럼 저랑도 인사 나눠요.”
“그래요, 결제되었어요.”
카드를 돌려받으면서 말랑한 손이 스쳤다. 편의점을 나서는 나를 보고 있는 알바생에게 손 인사를 해 주었다.
‘글쎄, 아무리 생각해도 좀 괘씸하단 말이지. 내가 그렇게 딱 붙어 있었는데 어떻게 짝사랑을 나 모르게 하지?’
심지어 지운이 아니었다면 나한테 말해 줄 생각도 없었던 것 아닌가. 찬희는 보는 사람을 불안불안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서 의지할 수 있는 믿음직한 형이 되어 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이럴 때마다 조금 서운했다.
집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찬희를 찾았다. 워낙 시체처럼 얌전히 자는 애라서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겠거니 했는데, 없었다. 어디 돌아다니는 애는 아닌데.
숙취 해소제를 책상 위에 올려 두는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났다.
“찬희야.”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읏……!”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찬희가 자신의 것을 쥐고서 억눌린 신음을 내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미 홍조가 피어 있던 찬희의 얼굴은 짧은 시간 동안 점점 더 붉어졌고 잘 익은 토마토색으로 변했다.
나도 찬희도 서로 무슨 말도 꺼내지 못하고 굳어 있었기에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가 화장실을 채웠다.
젖은 머리카락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마른 허벅지에 똑똑 떨어졌고 발기한 성기가 손가락 너머로 언뜻 보였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대로 문을 닫으면 평생 나와 말을 섞지 않거나 그대로 집을 뛰쳐나가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머릿속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을 때 찬희가 택할 온갖 행동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돌려댔다.
“같이 해 줄까?”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참지 못하고 결국 내 입에서 튀어 나간 말이었다. 내 말을 들은 찬희는 대답도 없이 손을 떨고 있었다. 실수했나 싶었지만 이미 저지른 이상 이대로 밀고 나가야 했다.
옷부터 벗어 던지고 다가가자 찬희가 욕실 벽에 납작하게 붙었다.
“왜 그렇게 떨어.”
언제인가 뒤척이다 잠에서 깼을 때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 나가던 뒷모습이 기억났다. 다음날 어제까지는 없던 속옷이 젖은 채 걸려 있는 걸 몇 번이나 쳐다봤었다.
야한 꿈이라도 꿨던 걸까. 이 애가 꾸는 야한 꿈이란 과연 어떤 꿈이었을까 궁금했다. 딱딱하게 굳어 있으면서도 내 손길 몇 번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에 그 궁금증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요즘 학교에 다니면서 숙소에 돌아오면 부대끼며 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쁘다고 이렇게 시원하게 자위를 한 것도, 사정을 한 것도 오랜만이었다.
후련한 사정감에 거친 숨을 뱉어 내는데 찬희가 내 목을 끌어안은 채 입술을 겹쳐 왔다. 짧게 맞닿았던 입술은 금방 떨어졌다.
찬희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맺힐 것 같이 물기가 어려 있었다.
“키스는 할 생각 없었는데…….”
입술을 깨물며 내 목에 두르고 있던 팔을 풀어내는 찬희였다. 내 입술에는 아직 아까 맞닿았던 저 입술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혀로 한번 입술을 핥고 찬희가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입을 열었다.
“나쁘진 않네.”
고개를 숙여 다시 입을 맞췄다. 단단히 닫혀 있던 입술은 거부감없이 열렸다. 열린 입 속으로 내 혀가 막힘없이 파고들었고 찬희의 고개가 한없이 넘어가 벽에 박고서도 입맞춤은 이어졌다.
***
“아, 전화하라며, 데리러 온다며!!”
부재중 통화 두 자릿수를 찍은 지운이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찡얼거렸다.
“미안, 씻느라고 전화 오는 줄 몰랐어.”
내 대답에 찬희가 갑자기 뭐가 찔린 사람처럼 헛기침했다. 웃으며 찬희의 목에 팔을 감자 눈도 못 마주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냥 기다리라고 할걸. 편하게 진진 차 타고 오는 건데.”
“달아둬. 다음에 한 번 데리러 가 줄게.”
“좋아.”
원하던 것을 얻어 냈는지 지운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야, 숙취 해소제 샀어?”
“어, 두 개 샀는데 하나는 찬희 먹였어. 맞다. 저녁 알바생이 형 친구냐고 물어보더라?”
“엉, 친구들이랑 같이 산다고 그래서 너희 얼굴 얼추 다 알고 있지 않을까? 걔 예쁘지?”
“흠…….”
찬희를 힐끗 보니 귀 끝이 붉어져 있었다. 아까 온몸이 다 빨갛게 달아올라 있던 게 생각나 피식 웃었다.
“그냥 뭐. 평범하던데.”
“넌 눈이 너무 높아. 아주 자기만 잘났지.”
지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타박을 줬다.
“네가 보기엔 예뻐?”
몰래 찬희 귀에 속삭였다. 가만히 눈을 깜빡이던 찬희가 목에 두른 내 팔을 풀어내더니 한 발짝 떨어져서 대답했다.
“몰라.”
새침하게도 말하더니 그대로 자기 침대로 걸어가 누웠다.
“뭐야, 서찬희. 안 일어나? 우리 동진이 올 때까지 손 풀어야 할 거 아냐.”
“몰라, 오늘 게임 안 해.”
“쟤 오늘 왜 저래? 사춘기인가?”
“음, 내가 얘기해서 데리고 나갈게. 컴퓨터 켜고 있어.”
지운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다가 알겠다고 하고 컴퓨터 방으로 향했다.
침대 옆에 앉아 드러난 목덜미를 주무르자 놀랐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진짜 안 해?”
“…….”
“왜 안 어울리게 고집을 다 부리고 그래. 어차피 할 거면서.”
옆에 같이 눕자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맑은 갈색의 눈동자가 아직도 물기가 어려 있는 것 같았다. 처음 봤을 때도 이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눈길이 가서 맘에 드는 여자에게 수작을 거는 것처럼 별별 개수작을 다 부렸다. 나도 나지만 내 개수작을 다 받아 준 찬희의 탓도 없다고는 못했다.
“오늘 왜 그랬어?”
방 밖으로 소리가 새어 나가 혹시라도 지운에게 들릴까 봐 걱정하는 건지 뭔지 바로 옆에서도 들릴까 말까 한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찬희였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되물었다.
“뭐가?”
“원래 친구랑 그런 거 해?”
그러고 보니 찬희는 또래 친구가 없었다. 아니, 아예 친구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켜본 바로는 주변에 있는 사람이 지운과 몇 없는 온라인 게임 친구들이 다였으니.
“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편인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의문형으로 대답이 나왔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따로 여자 친구를 사귀지는 않지만, 여자인 친구들과 밤을 보내는 것은 좋아했다. 걔들도 일단은 친구고 섹스 프렌드도 프렌드가 아닌가. 그렇다고 찬희랑 섹스를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구나.”
찬희가 차분해지면서 조금은 정리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남자끼리 키스도 해?”
“그건 처음 해 봤어.”
별로 생각해 본 적 없고 평생 해 볼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 보니 거부감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잠시 의문이 스쳤지만 금방 해답이 나왔다. 상대가 워낙 소동물 과라서 그런 건 아닌가? 마치 반려동물에게 뽀뽀하는 것에는 고민이 필요 없는 것처럼.
“나쁘지 않았어. 너도 좋았잖아.”
“응, 난 좋았어.”
찬희가 작게 웃기에 마주 웃어 주었다.
“형, 혹시 다른 남자랑도 할 거야?”
“어? 아니.”
즉답이 나왔다. 우락부락하고 건장한 남자한테 하라 그러면 좀 싫을지도 모르겠다.
편견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나는 날 때부터 확실하게 여자가 좋았다. 같은 남자끼리라고 생각하면 머리를 거치지 않고 척추에서 나오는 거부감 같은 것이 분명히 존재했다.
물론 찬희만큼은 무슨 프리 패스권이라도 들고 있는 것처럼 괜찮게 느껴졌다. 내 안에 서찬희존 같은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남자랑은 너 아니면 못 할 것 같은데.”
바라보는 모습이 퍽 귀엽길래 볼에 가볍게 뽀뽀를 해 줬다.
“형은 너무 가벼워…….”
“가볍긴 네가 가볍지. 햇볕에 아주 바싹 말린 멸치같이 말라서 말이야.”
“사람 보고 멸치라니 말이 심하네.”
찬희가 이불을 끌어와 머리끝까지 덮어버렸다. 정말 몸이 한 줌이라 이불째로 들고 산을 오르래도 금방 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말이 심했어.”
“알긴 알아?”
찬희가 이불 밖으로 눈만 내놓고 톡 쏘듯 말했다. 커다란 눈이 가늘게 접혀있었다.
“응응, 형이 잘못했다.”
“진심이 하나도 안 담겨있잖아.”
“무릎이라도 꿇을까?”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리액션을 취하자 벌떡 일어나 내 팔을 붙잡았다.
“내가 지금 형보고 무릎 꿇으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아니면?”
“도대체 형은 사람이 왜 그렇게…….”
“그렇게?”
내 말을 가만히 곱씹던 찬희가 교묘하게 찬희 말끝을 따라서 말한 것을 눈치챘는지 표정이 확 구겨졌다.
구겨지든 말든 내가 눈웃음을 살살 흘리며 바라보자 고개를 푹 숙이고 나이에 맞지 않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물어서 뭐해. 내 입만 아프지.”
“자, 그럼 이제 질풍노도의 사춘기 투정 그만 부리고 전장으로 가자, 버퍼야.”
어린애 안듯이 번쩍 안아 들고 컴퓨터 방으로 향했다. 바싹 마른 몸은 어지간한 여자애들보다도 가벼웠다. 아무래도 살을 좀 찌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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