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뭐?”
“왜 커피를 내뿜고 그래요. 더럽게…….”
“아니, 미안하다. 나 진짜 요즘 귀가 안 좋은가 봐. 뭐라고?”
“좋아하는 사람 생긴 것 같다고…….”
지운이 허허, 웃었다.
“수도승처럼 연애 같은 거 관심도 없던 애가 무슨 일이래. 만나는 사람도 적은데. 헉, 설마 너…….”
지운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아무리 어디 말할 곳도 없어서 답답한 심정이었다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지운에게 털어놓은 것은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긴장감에 입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어 커피를 벌컥벌컥 마셨다.
“너 나 좋아하냐?”
“푸읍……!”
이번엔 내가 지운의 얼굴을 향해 커피를 뿜어내고 기침을 거하게 했다.
“아, 시원하다.”
얼굴에 직격탄으로 커피 분무를 맞은 지운이 뜨거운 국밥을 먹는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휴지를 뽑아 얼굴을 닦았다.
“뭐야, 왜 말이 없어. 진짜 나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눈물까지 맺힌 눈으로 지운을 흘겨보며 말하자 지운이 웃었다.
“야, 농담이야. 그래서 누군데.”
“그, 아는 사람…….”
“예쁘냐?”
머리에 전날 옥상 문 앞의 계단에서 내 가슴에 귀를 대고 나를 올려다보며 웃던 진형의 얼굴이 두둥실 떠올랐다.
“응.”
“진짜 예쁜가 보네.”
그래도 지운에게 조금이나마 털어놓으니 속이 후련했다.
“진짜 나 아니지?”
“아니라니까요.”
“이상하다. 네 근처에서 제일 예쁜 건 난데.”
지운의 헛소리에 웃음이 다 나왔다.
“아, 걔인가? 숙소 근처 편의점 저녁 알바생? 걔 예쁘지. 너보다 두 살 누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사람 얼굴을 잘 안 보고 다니는 편이라 지운이 말하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는 바로 떠올랐는데 얼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긴 생머리에 하얀 손을 가진 여자였다. 지운은 그 사람으로 아주 단정을 지었는지 뭐라고 주절주절 얘기를 풀어놓았고 나는 그냥 지운이 계속 착각하게 그냥 두기로 했다.
“아무튼 나도 걔랑 수다 꽤 떨어 봤는데 남자 친구는 없고 약간 나쁜 남자 좋아하는 거 같더라. 아, 그렇다고 불량하게 진형이랑 담배 피우다 걸리고 그러진 말아라.”
“내가 뭘 해?”
뒤에서 진형이 불쑥 튀어나와서 내가 들고 있던 컵을 빼앗아 얼마 남지 않은 커피를 비워 냈다.
“야, 오늘 우리 외식하자. 우리 막둥이 드디어 사랑에 눈을 떴…….”
“아, 형!”
지운이 수줍은 소녀 같은 포즈를 취하며 말했고 내가 급하게 지운의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진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랑? 찬희가?”
내 손에 입이 틀어막혔으면서도 지운은 실실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얘가 부끄러워하는 건 또 처음 보네. 그 있잖아, 편의점……!”
“형 진짜 놀리지 마요!”
다시는 내가 지운에게 고민 상담을 하나 봐라. 속으로 후회의 눈물을 쏟으며 지운의 입을 막았다.
“너 나한테는 그런 소리 죽어도 안 하더니. 역시 나보다 지운이 형이라 이거지?”
“하하하, 권진형 이 몸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찬희가 요만할 때부터 봐 왔다 이 말이야.”
어느새 셋이 엉겨 붙어서 거실 바닥을 마구 뒹굴었다. 가장 늦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동진이 셋이 얽히고설켜 있는 것을 보며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했다.
“살려 주세요, 형.”
“다들 찬희 좀 그만 괴롭혀. 안 그래도 얘 사람들이랑 부대끼는 거 싫어하는데 뻔히 다 아는 사람들이 왜 저럴까. 배려가 없어요, 배려가.”
미술 교육과가 아니라 체육 교육과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근육이 빵빵한 동진이 내 팔을 붙잡고 힘을 주자 가볍게 번쩍 들렸다. 중간에 끼어 있던 내가 빠져나오자 진형과 지운은 둘이 진하게 포옹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저녁 뭐 먹지.”
동진이 나를 어깨에 걸쳐 맨 채로 냉장고를 뒤지자 뒤에서 지운이 손을 번쩍 들었다.
“오늘 외식!! 회식!!”
“또요?”
“우리 이제 대회 다니고 하면 밖에서 뭐 먹을 시간도 자주 없잖아. 그리고 대박 사건이 있…….”
“형!!!!!”
단언컨대 살면서 이번이 가장 큰 소리를 냈던 것 같았다.
***
숙소 근처의 삼겹살 가게에서 마지막 외식이 될 수도 있다며 소주를 얼마나 비웠는지 만취한 지운을 동진이 챙겨 먼저 숙소로 돌아갔다. 고기 몇 점이 남아 있었는데 돼지고기는 영 별로라서 청양고추를 리필해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진형이 동진이 있는 동안에는 눈치 보느라 주지 못했던 술잔을 채워 나에게 건네며 물었다.
“그래서 왜 나한테는 얘기를 안 해 준 건데?”
“뭐를.”
소주잔을 한 번에 비워 냈다. 술이 화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나랑도 충분히 얘기할 수 있었잖아.”
아무래도 진형도 오늘은 좀 과음을 한 것 같았다.
“가자, 형 취했다.”
“또 말 돌리지. 내가 그렇게 미덥지 않아?”
내쉬는 숨이 아주 소주에 절어 있었다. 항상 믿음직하고 단정한 모습만 하고 있다가 저러니까 괜히 미연시의 히든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아, 형 믿지. 완전 믿으니까 일어나, 빨리.”
진형의 팔을 끌어 일으키려는데 오히려 내가 진형에게 끌려와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근데 너 나한테는 그런 얘기 안 하잖아. 게임 얘기만 하려고 하고 제대로 된 이야기는 피하잖아. 하다못해 고민 상담 한 번을 안 하고.”
진형이 느릿느릿 한참을 쏟아내듯 말했다. 술기운에 반쯤 감겨 있던 눈이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떠지며 나를 보았다.
“넌 내 버퍼잖아.”
진형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떨어져 바닥을 뒹구는 것 같았다. 서둘러 진형을 부축해 가게를 나섰다.
“찬희야.”
“왜 자꾸 불러.”
“진짜 내가 뭐 잘못한 거 아니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줘야 믿어 주려고 그래?”
“내가 너한테 잘못해도 너는 말 안 해 줄 거잖아.”
요즘 게임할 때 나한테 제일 많이 잔소리 듣는 사람이 별소리를 다 한다.
“그러니까 알아서 잘해. 그러면 되잖아.”
“내가 어지간해서 어렵다고 느끼는 게 없는데 너는 너무 어려워.”
“예, 예. 제가 잘못했으니까 좀 스스로 걸어 보실래요. 무거워.”
내 말에 몇 걸음은 제대로 걷는 것 같더니 점점 무게 중심을 내 쪽으로 두는 진형이었다.
술에 취한 성인 남자를 끌고 5층이나 되는 계단을 오르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가까스로 해내고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 진형을 던져 두었다.
거친 숨을 고르는데 침대에 널브러진 진형의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속살이 보이고 있었다. 애써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해도 저렇게 자길 봐 달라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간단 말이지.
진형의 팔이나 얼굴은 그을린 편인데 드러나지 않은 곳은 생각보다 하얀 편이었다. 규칙적으로 호흡할 때마다 오르내리는 가슴에 드러난 옆구리도 함께 움직였고 그 모습을 정신없이 구경했다.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세워 옆구리를 콕 찔렀다.
“음…….”
내 손이 닿자 움찔거리다가 몸을 뒤집었다. 말려 올라간 티셔츠 덕분에 등허리가 완벽히 노출된 채였다. 이거 혹시 잠든 사람을 강제로 추행한 게 되나.
고민하는 머리와는 다르게 손가락은 욕망에 충실하게 곱게 파인 허리를 쓸어내렸다. 닿은 피부는 매끄럽고 따끈따끈했다. 양손으로 마음껏 만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속으로 그냥 해? 말아? 갈등을 빚고 있는데 진형이 나를 끌어당겨 안았다.
진한 술 냄새와 진형의 제향이 섞여서 났다. 남자다운 향기였다.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 할수록 강하게 붙잡아 왔다.
“빨리 자…….”
진형이 반쯤 잠들어 있는 채로 웅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자라는 건지.
바로 뒤에서 끌어안고 있어서 진형이 숨을 쉴 때마다 목 근처가 간질간질했다. 원래도 거리감이라는 게 없는 사람처럼 스킨십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같이 TV를 보다가 허벅지를 벤다거나 길 가다가 팔짱을 끼는 것도 매우 이상했지만 이러고 자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진형의 팔을 슬쩍 떼는데 귀신같이 알고 힘을 주어 바싹 끌어안아 왔다. 내 목에 진형의 입술이 닿았다.
“하지 마…….”
지금 누가 할 소리를 자기가 하는 건지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손을 벌벌 떨며 진형의 팔을 떼려고 힘을 조금 더 강하게 줬지만, 꿈쩍도 하지 않아 포기했다.
‘그래, 오늘 나를 말려 죽이고 싶은가 본데 아주 밤새 이러고 있어라.’
***
“찬희, 너 얼굴이 왜 그래?”
다들 술을 거나하게 마셨던지라 늦은 오후 식탁 앞에 모여 앉아 배달시킨 해장국을 들이붓고 있었다.
어제 만취 상태로 동진에게 업혀 온 지운이나 나한테 기대서 거의 네발로 도착한 진형도 멀끔한 얼굴이었는데 진형이 건넨 소주 한 잔이 전부인 나만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진해진 채 숟가락도 무거워 들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 덕에 간밤에 한숨도 못 잤다고 할 수도 없고.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만 짓눌렀다. 그때 동진이 숟가락으로 식탁을 딱 소리 나게 내려쳤다.
“권진형, 너 우리 가고 찬희 술 먹였어?”
“어, 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냐? 내가 애한테 술 먹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동진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진형이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아냐, 딱 한 잔만 줬어.”
“한 잔은 술이 아니야?”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동진에게 지운이 골 울린다고 소리 지르지 말라고 말리며 내 손에 숟가락을 쥐여 주었다.
“숙취 있나 보네. 쭉 들이켜. 그럼 괜찮아져. 그만하고, 다들 오늘 일정 브리핑하십쇼. 나는 오늘 조별 과제 모임 있어서 학교 가야 해.”
“나 일단 오후에 수업 두 개 있고 야간 수업도 하나 있어.”
“나는 오전 수업은 날아갔고 오후에 두 개.”
“오케이. 진형이 차 타고 다 같이 가면 되겠다. 저녁에는 동진이 빼고 같이 게임 돌리자고. 찬희는 오늘 뭐 할 거야.”
“연습할게요……?”
오만상을 하고 말하자 지운이 피식 웃었다.
“야, 됐어. 무리하지 말고 너도 오늘 우리 올 때까지는 그냥 쉬어. 자, 빨리 먹고 학교 갑시다.”
지운의 말에 다들 서둘러 숟가락을 놀렸고 성인 남자 셋이 해치울 수 있는 음식의 양이란 언제나 내 상상을 초월했다.
***
형들이 모두 학교에 가는 날엔 집이 너무 넓고 텅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탓일까, 자고 일어났는데도 눈 밑이 거뭇했다.
‘간밤에 자극이 좀 강했어야지.’
허리를 단단히 감고 있던 진형의 팔이나 목에 닿았던 입술의 감촉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조용한 집에 혼자 있으니 어제는 정신이 없어 정리하지 못한 생각들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여태 내가 야동을 보면서 별 감흥이 없었던 것은 내가 남자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을까?’
시험해 보기 위해 게이 야동을 일부러 찾아보기는 또 싫었다. 애초에 야동도 억지로 강제 시청 당한 거지 내가 찾아본 적은 없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자위는 그래도 했는데, 요즘은 자고 일어나면 속옷이 이미 축축한 상태인 적이 워낙 많아서 내가 따로 수고를 들일 필요까지도 없었다.
잠깐,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직접 했던 게 도대체 언제인가 떠올려보는데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옛날이었다.
“…….”
혼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화장실로 들어가 옷을 벗어젖혔다. 말라빠진 맨몸이 거울에 비쳤다. 오랜만에 마주한 본인의 벗은 몸이 어색하게 느껴져 샤워기부터 틀었다. 더운 김이 거울을 가리자 마음이 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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