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됐어요. 전철 타고 갈게요.”
“여기까지 헛걸음하게 하려고? 그냥 타 주라. 어제 같이 배치 돌린다고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해 주고 싶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타지 않으면 아무래도 싸가지 없어 보일 것 같았다. 진형의 뒤차가 빵빵거리기에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집 주소를 불러 주자 진형이 대충 길을 안다며 차를 출발시켰다.
“너 되게 잘 자더라.”
“그러게요.”
보통 낯선 곳에선 잘 못 자는데 어제 배치 고사 강행군이 고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아주 푹 잤다.
“근데 중학생이랬나? 고등학생? 평일인데 학교 안 가?”
“17살이고 학교 안 다녀요.”
“그게 되나?”
“앞에 보세요.”
어물쩍 대답을 흐렸다. 어색함에 입술만 질근질근 씹다가 핸드폰을 들어 어제 게임 전적을 돌려 봤다.
랭커는 랭커인지 적과 마주쳤을 때 킬 각을 재는 것이라든가 전투에서의 위치 선정 같은 것이 확실히 남달랐다.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설명까지 들으니 그냥 혼자서 영상 찾아보는 것보다 훨씬 배운 점이 많았다.
같이 게임을 돌린 만큼 저쪽도 분명 피곤할 텐데 운전시킨 느낌이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기, 고맙습니다.”
“응? 뭐가?”
“같이 게임해 주신 거랑 데려다주시는 거요.”
“아냐, 나도 간만에 재밌었어. 다음에 또 같이 게임 돌리자.”
전철로 두 정거장 정도 걸리는 집은 차로 가니 훨씬 더 빠르게 도착했다. 바로 내리려는데 진형의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뭐야, 그렇게 바로 가는 거야?”
혹시 차비를 좀 드려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으니 진형이 웃으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나 번호 좀 주라.”
“어…… 네.”
내미는 핸드폰에 번호를 찍어서 다시 건네주자 짧게 전화가 걸려 왔다가 끊어졌다.
“저장하고 게임할 때 불러. 나 시간 많은 편이거든.”
“네.”
“가 볼게. 잘 들어가.”
“안녕히 가세요.”
고개 숙여 인사하자 빙긋 웃던 진형이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
‘첫인상은 분명 수상하게 친절한 미남이었단 말이지.’
옆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진형을 가만히 구경하고 있었다.
몇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한국 대학교 뷰티 디자인학과 재학 중인 지운의 중개로 미술 교육과 구동진과 경영학과 권진형 그리고 이 오버 스펙 엘리트 팀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중졸의 내가 팀을 꾸리게 됐다.
원래 같은 한국대 출신인 동진의 친구가 버퍼 자리에 오려 했는데 진형이 내가 아니면 안 한다고 고집을 부려 지운이고 진형이고 자는 시간 빼고 나에게 매달려 결국 내가 합류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타 게임 선수 출신의 명진욱이 감독 겸 코치로 합류하기도 했다.
진형이 부모님 돈을 빌려 빌라를 사 와 거기에 숙소로 꾸렸다. 진형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것에 불만이 많았지만 나는 이 집이 퍽 좋았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보다 높아서 해가 잘 드는 것도 진형과 몰래 옥상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도 좋았다.
“왜 그렇게 봐?”
분명히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내가 마음껏 자신의 옆얼굴을 구경하고 있는 걸 눈치챘나 보다.
“안 봤는데.”
“다 보여. 넋 놓고 구경했으면서 왜 발뺌이야.”
진형이 괘씸하다는 듯 홱 돌아보더니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간지럼은 잘 타지 않는 편이지만 손길이 거칠어 아팠다. 두 손으로 항복 표시를 보내자 손길이 멈췄다.
“알았어. 봤어, 봤어. 이럴 때만 시야 넓어질 일이야? 게임할 때 좀 그래 봐.”
“네가 봐주는데 뭐 하러.”
“나 원래 주 포지션 딜러였는데.”
“싫어, 내 버퍼 해.”
‘내 버퍼’라는 소리가 듣기 좋아서 딜러 포지션을 포기한 보람이 있었다. 하긴 딜러만 잡으면 사람이 어쩐지 흉포해져 욕을 염불처럼 외웠던지라 내 더러운 성격을 버퍼가 눌러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성향도 더 잘 맞는 편이었다.
진형이 장난스럽게 헤드록을 걸어오는데 괜히 두근거렸다. 워낙 은둔 생활을 해 와서 이만큼 가까워진 사람이 처음이라 깊이 친해지면 가슴이 뛰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자기 전에 진형이 씻고 나왔는지 상의를 입지 않은 채 젖은 머리를 탈탈 털고 있었다.
“왜 그렇게 봐.”
놀리는 듯한 말에 내가 티가 나게 고개를 돌렸고 진형이 웃으며 내 침대 위로 올라탔다. 진형의 머리카락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내 얼굴로 툭툭 떨어졌다.
“안 봤어.”
“안 본다면서 항상 보고 있잖아.”
진형의 눈을 피하고 싶었는데 맨살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진형이 멈췄다. 맴도는 흥분감이 당혹스러웠다.
“놀리지 마.”
“놀리는 거 아니야.”
낮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벌어진 입술을 혀가 파고들었다. 서로의 살덩이가 얽히고 타액이 섞여들었다.
진형을 끌어안고 싶은지 밀어내고 싶은지 모른 채 팔을 뻗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미친…….”
꿈이었다. 바지를 들어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옆 침대에서 진형이 뒤척여 화들짝 놀라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급하게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벗어 던진 뒤 속옷을 세면대에 넣고 물을 틀었다.
‘내가 무슨 미친 꿈을 꾼 거지, 방금.’
거울에 비친 벌겋게 익은 얼굴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진형을 상대로 이런 꿈을 꾸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수치심으로 얼룩진 것만 같은 속옷을 온 힘을 다해 북북 빨면서 자꾸만 꿈이라기엔 기묘하게 현실감이 있었던 입맞춤과 진형의 말캉한 혀였다.
***
다른 나이츠 아마추어팀과의 연습경기가 끝나고 경기 내용에 대해 서로 얘기를 나눈 지도 한참이었다. 다들 이제 슬슬 마무리하고 자자고 얘기가 나왔다.
아까 손이 시려 뜯어 놓은 핫팩을 이리저리 쥐면서 경기 결과표를 보고 있었다. 옆에서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진형이 내 손등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너 왜 요즘 나 피해?”
“그런 적 없어…….”
손가락이 닿은 손을 황급하게 치우며 대답이 조금 어색하게 나갔다. 사실 그 꿈을 꾼 뒤로 진형의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둘만 남으면 은근슬쩍 자리를 피했다. 지금도 대답만 하고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데. 내가 뭐 잘못했어?”
“아무 일 없다니까…….”
계속 말끝을 흐리는 게 더 수상해 보였다. 나라고 이렇게 굴고 싶지는 않았고 똑 부러지게 말을 해 주고 싶었지만, 처음 그 꿈을 꾸고 난 후로 수시로 나는 진형을 상대로 야한 꿈을 다양하게도 꿔 댔다.
횟수가 늘어갈수록 진형에게 죄책감이 들 정도로 면목이 없었다. 이 일은 내 무덤까지 함께 가져가야 했다.
“따라 나와 봐.”
“아, 형……!”
내 팔을 강하게 붙잡고 옥상으로 질질 끌고 가는 진형이었다. 진형의 걸음에 맞춰 계단을 오른다고 몇 개 오르지도 않았는데 숨이 차올랐다. 밤이 깊은 시간이라 주택가인 동네가 조용했다.
“아프다고…….”
내가 우는 소리를 내자 진형이 붙잡고 있던 팔을 놔주었다. 손자국이 남았을 게 분명해 북북 문지르며 발끝만 노려보았다. 진형이 답답했는지 자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더니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왜 자꾸 나 피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말만 아니라고 하고 내 눈도 안 마주치잖아. 내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 줘야 알고 조심할 거 아니야.”
댁이 뭘 잘못했냐고, 잘못이라도 했으면 내가 했다고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의 상냥함을 이용해서 음란한 생각이나 하고 철저하게 내가 글러 먹어서 그러는 건데 뭘 조심할 수 있겠는가.
“형, 진짜 미안한데 형 문제 아니거든요.”
“허, 너 나만 피하잖아. 동형이랑 지운이 형한테는 안 그러잖아. 나한테 말 못 할 얘기가 있어?”
“…….”
형이 꿈에 나와요. 야동도 하품하면서 보는데 형이랑 꿈에서 키스만 해도 속옷을 적실 정도로 흥분해요. 다시 생각해도 죽어도 못 말할 내용들이었다. 죽어도 말 못 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아 그저 눈알만 굴렸다.
“매일같이 제일 옆에 붙어서 게임하고 너랑 그렇게 짧게 본 것도 아닌데 나는 아직도 너를 잘 모르겠다.”
진형이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한 듯 지친 목소리로 말하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담뱃갑을 나에게 던져 주길래 꺼내서 입에 물었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라이터에 불을 붙여 내가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컴컴한 가운데 진형이 담배를 빨아들일 때마다 담뱃불 빛에 수려한 얼굴선이 언뜻언뜻 빛났다.
“형이, 형이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다 공유할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
“나한테만? 아니면 지운이 형한테도?”
아무리 지운이 형한테도 할 말이 있고 못 할 말이 있었다. 고개를 젓자 진형의 딱딱한 표정이 은근히 풀렸다.
담배 연기가 진형의 얼굴을 가렸다가 흩어졌다. 언젠가 진형과 함께 보았던 홍콩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순간 담배 연기가 눈에 들어가 눈을 비볐다. 맺힌 눈물에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으니 그 꼴이 웃겼는지 진형이 손을 뻗어 눈가를 문질렀다.
“아까는 답답해서 화나려 했는데, 우는 거 보니까 화도 못 내겠다.”
“우는 거 아니야.”
“아, 눈에서 땀 났어?”
킬킬 웃으며 담배를 끄고 먼저 옥상 문을 나서는 진형이었다. 내 담배는 아직 태우지 못한 부분이 반절 이상 남아 있어서 이걸 다 피우고 가야 하나 그냥 끄고 진형을 뒤쫓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손에 들린 빈 담뱃갑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마지막 남은 담배였으니 그냥 버리기는 아깝게 느껴졌다.
혼자 남아 담배 연기를 뱉다가 문득 진형이 내 눈가를 만졌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심장이 쿵쿵거리며 진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꼭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에서 사랑에 빠질 때처럼…….
하하. 헛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꿈을 꾸더니 별 잡생각을 다 한다고 생각했다.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너털웃음을 연달아 터트리며 별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다.
담배를 끄고 계단을 내려가려고 옥상 문을 열었는데 진형이 문 옆에 기대어 서 있었다.
“혼자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웃었어?”
이건 놀라서, 너무 놀라서 심장이 뛰는 거잖아. 그렇지? 나에게 되물었다. 진형이 내 가슴팍에 귀를 댔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가슴팍을 뚫고 들리는 것 같았다.
“심장 뛰는 거 봐. 내가 많이 놀라게 했나 보네. 계속 사람을 역병처럼 피하더니 꼬시다.”
진형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데 계단의 센서 등이 켜져 웃는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형이 내 얼굴을 보기 전에 밀어내고 우당탕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내 얼굴은 매번 화장실에 달려가 마주쳤던 당혹감이 가득한 달아오른 얼굴일 게 분명했다.
온 힘을 다해 뛰어내려 빌라 밖으로 빠져나왔다. 옥상 쪽을 올려다보았다가 다시 무작정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
흔히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한다.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면 열병을 앓는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 주는 게 예의 아닌가.
나는 그날 밤 이후로 며칠 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첫사랑이 18살에 온 것도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남자일 필요까지 있었는지, 신이 있다면 무슨 생각인 건지 1:1 면담을 하고 싶었다.
“너 어디 아파?”
진형과 동진은 학교 수업을 들으러 가서 집에는 나와 지운뿐이었다.
“아니…….”
“상태가 영 안 좋은데. 보약이라도 좀 달여 먹여야 하나.”
“형,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나 봐요.”
지운이 마시고 있던 커피를 기세 좋게 뿜어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