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지운의 집에서 지내는 것에도 이제 익숙해졌다. 사실 지운도 삼시세끼를 챙겨 먹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기껏 데려왔는데 살 못 찌우면 타박을 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며 배달앱으로 시작해 엄마 찬스, 친구 찬스, 심지어 요리 스트리머 찬스까지 총동원해 온갖 음식을 조달해 왔다.
덕분에 잘 챙겨 먹었더니 며칠 새 야위었던 느낌은 좀 사라졌다.
“아, 맞다. 찬희야, 너한테 말해 줬어야 했는데…….”
지운이 말 끝나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아 씨, 벌써 왔네.”
“누가 와요?”
지운이 어물쩍 대답을 피하고 현관문을 열자 검은색 코트를 입은 진형이 서 있었다.
“아뿔싸 NKL 2회 연속 우승하고 돌아온 외화벌이 국위선양 쓰레기가 벌써 우리 집에……!”
“형, 사람한테 쓰레기라니 너무 하잖아요.”
“시끄러워, 인마. 넌 평생 나한테 트래시야. 이 재활용도 안 되는 타는 쓰레기야.”
분명히 미국에 있어야 할 사람이 내 눈앞에 갑자기 뚝 떨어진 상황에 기가 찼다.
“그렇게 반가워할 것까진 없잖아. 그저께 결승전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달렸지.”
내 얼빠진 얼굴에 농을 건네듯 웃으며 캐리어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왔다.
“형, 아까 말해 줬어야 한다는 게……?”
“하하, 나으리 저 쓰레기가 저희랑 일주일간 함께 지내게 됐습니다요.”
지운이 간신배 같은 말투로 대답했다. 나는 이마를 팍팍 쳤다.
“결승전 마치자마자 팀원들 버리고 향수병 핑계로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사람한테 둘이서 이렇게 열렬하게 반겨 주니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네. 아주 감동적이야.”
“그럼 나랑 찬희가 너 온다고 좋아할 줄 알았냐? 이 자식 근자감 장난 아니라니까.”
“방송에 얼굴 비춰 주면 숙식 제공해 준다던 사람이 왜 딴소리야. 찬희야, 이거 선물.”
진형이 담배 한 보루와 작은 상자를 건네주었다.
“내 선물은 어딨어?”
“형 거는 여기.”
진형이 캐리어를 뒤져 지운에게 종합 비타민을 건넸다.
“이제 스물여덟인데 늙은이 취급 고오맙다. 먹고 장수하마. 찬희 거는 뭐야?”
“열어 봐.”
포장된 상자를 열자 작은 향수병이 나왔다. 우디 계열 향수 추천 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니치 향수였다.
“센스도 없지. 찬희 향수 안 쓰는데 무슨 향수야.”
“찬희가 이 향 좋아해.”
“안 쓰는데 뭘 좋…… 하, 됐다. 그만 말하자. 닭살 돋는다. 어우, 저 난잡하고 로맨틱한 인간쓰레기.”
말하다 보니 진형의 말뜻을 불현듯 이해한 지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를 피했다. 뚜껑을 열고 한 번 뿌리자 언젠가 진형의 몸에 코를 박고 맡아댔던 그 향이 진하게 났다.
“좋아?”
“안 쓸 것 같은데 형이 가져가.”
“나도 있어. 너 주려고 사 온 거니까 그냥 갖고 있어.”
코트를 식탁 의자에 걸어 두더니 다가와 붕대 감긴 내 손부터 꼼꼼하게 살펴봤다.
“경기 못 뛸 정도라며.”
“지금 잘 봐 둬. 서머 때도 못 뛴다 그러면 잘라 버릴 거니까.”
“말 함부로 하지 마. 다리는?”
“몰라.”
괜히 대답이 퉁명스럽게 나갔다. 진형이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더 살펴보다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마중도 안 오고. 연락도 안 받고. 너 진짜 미운 짓만 골라서 한다.”
“형한테 예뻐 보여서 뭐 해.”
애초에 좋아할 적에도 예쁜 짓을 한 기억은 없었다. 진형이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아, 진짜 찬희 냄새가 나야 좀 한국 같아.”
“내려놔.”
“싫어, 지운이 형 채널 영상 올라온 거 보니까 오만 사람이 다 안고 다니던데 왜 나만 안 돼?”
안 어울리게 고집을 부리는 진형이었다.
“걱정 많이 했어.”
“…….”
“그리고 많이 보고 싶었어.”
진형이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어떤 얼굴로 저런 말을 쏟고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냥 진심이 느껴져서 진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야, 트래시야. 너는 소파에서 자.”
“싫어, 여기서 찬희랑 같이 잘 거야.”
“저 양심도 출타한 쓰레기가…….”
지운의 집에는 지운의 방에 있는 더블 사이즈의 침대와 손님방의 싱글 사이즈 침대가 있었는데 내가 괜찮다는데도 화장실이 더 가깝다는 이유로 내가 지운이 형 방의 큰 침대를 사용하고 있었다. 잘 준비하고 당연하게 내가 누워 있던 침대에 눕는 진형에게 지운이 한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됐어요. 침대에 자리 있는데 왜 소파에서 재워요.”
“그럼 내가 찬희랑 같이 잘게.”
지운이 진형의 다리를 붙잡고 질질 끄는데도 진형은 힘으로 버텨 냈다.
“형, 우리 숙소 국룰 잊었나 본데 잠자리는 무조건 선점한 사람이 먼저잖아. 민첩한 하루 되세요.”
“여긴 숙소가 아니라 슈퍼스타 백지운의 자가다. 건방진 놈아.”
한참을 아웅다웅 투닥거리다 결국 셋이 다닥다닥 엉겨 붙어서 함께 잤다.
***
지운을 빼고 나와 진형은 무슨 날백수처럼 빈둥거리며 놀다가 지운이 밥 먹자고 하면 쪼르르 나와서 먹고 다 먹으면 다시 빈둥거렸다. 지운이 한심 반, 부러운 반을 담아 보다가 다시 일하러 들어가곤 했다.
“얘들아, 일정 체크 하나만 하자.”
“무슨 일정이요?”
“이번 주말이 KKL 준결승이거든? 와일드캣 문즈랑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경기 보러 오라고 못 들었어?”
“깜빡했어요.”
“아, 나도 가?”
“진형이 너도 일단은 응원하러 와야지. 친정팀이잖아.”
솔직한 심정으로는 정말 가기 싫었다. 어차피 당분간 게임도 못 돌리고 경기도 못 뛰다 보니 나이츠 관련된 모든 것들을 차단하고 게임 커뮤니티도 끊었다. 남아도는 시간을 그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가벼운 킬링타임용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들을 넋을 놓고 봤다.
이번에 데뷔 때부터 함께한 팀의 첫 결승 진출이 나 없이 이루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된다면 너무 공허할 것 같았다.
“저 안 가면 안 되겠죠?”
“진형이도 가는데, 너도 가야지.”
소파에 드러눕자 진형이 내 다리를 들고 앉더니 종아리를 만지작거렸다.
“형, 저거 콘솔 게임 돌아가?”
“어, 어. 하고 싶으면 해. 게임 종류별로 있어.”
“역시 게임 스트리머.”
지운이 게임기를 켜 주고 게임 패드를 진형의 손에 들려 줬다.
“찬희 너도 할 거야? 아 미안.”
대답 대신 오른손을 보여 주자 지운이 빠르게 사과했다.
“나 편집자분들이랑 식사 약속 있어서 밥 먹고 올 거야. 알아서 밥 시켜 먹어. 카드 두고 갈게.”
“네, 엄마.”
한국 리그보다 훨씬 상금 규모가 큰 북미 리그의 우승 상금을 달달하게 챙겨 놓고 냉큼 지운의 카드를 받는 진형이 얄미워 발로 한 대 걷어찼다.
“발 좀 가만히 둬. 이거 할까?”
광대한 필드를 돌아다니며 온갖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여야 하는 피지컬 게임이었다.
“하든가.”
“나 옛날에 이런 거 진짜 많이 했어. 격투 게임도 잘했는데.”
진형이 신나서 게임 패드를 현란하게 눌러댔다.
“왼쪽. 아니 왼쪽. 왼쪽이라니까?”
“아, 잠깐만.”
“11시에 원거리 하나. 3시에 몹 세 마리. 후방, 후방, 뒤라고. 뒤 안 봐?”
“…….”
좀 버티는가 싶더니 적 몬스터의 숫자가 늘어나자 피가 쭉쭉 빠지더니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면서 캐릭터가 쓰러졌다.
[ YOU DIED ]
“이걸 왜 죽어. 프로게이머 타이틀 반납해.”
“이게 쉽지 않다니까.”
“주변을 안 보잖아. 눈은 장식이야? 형, 시야 지금 가로세로 3cm잖아.”
“야,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야.”
곧 죽어도 피지컬이 최우선인 나이츠 딜러의 시야란 거의 시야 가림막을 착용한 경주마에 가까웠다.
“왼손으로 네가 움직여 봐. 전투 스킬은 내가 쓸 테니까.”
말만으로 조종하려니 답답하던 차였다. 일어나 게임 패드를 잡았다.
“어디가.”
“여기 비었잖아.”
“저거 잡고 가자.”
“잡다 죽어. 저거 주변에 몹 깔려 있잖아.”
“왜지.”
왜지, 같은 소리를 하고 앉아 있다. 각각 게임 패드의 한쪽씩 맡아서 하는데도 아까 진형 혼자서 진행할 때보다 빠르게 보스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 이게 더 재밌고 편하다.”
“나도 덜 답답해서 좋아.”
그 정도였냐면서 진형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나이츠 게임 큐를 잡으면서 중간중간 지뢰 찾기나 리듬 게임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각 잡힌 콘솔 게임은 오랜만이었다.
“은퇴하고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네 성격에 은퇴 못 할걸. 경기 못 뛰게 하면 손가락 자른다던 사람이 무슨 은퇴야.”
“그건 맞아.”
진형의 어깨에 머리를 푹 기댔다. 진형의 몸에서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겼다. 사람은 기억을 시각이나 청각보다 후각으로 더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들었다. 아마 나는 평생 이 향수 냄새를 맡으면 곧바로 진형과 함께한 시간과 진형이 떠오를 것 같았다.
선물로 향수를 고르고 오늘도 집에만 있을 거면서 일부러 향수를 뿌린 이유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자기를 기억해 내라는 거겠지.
“형, 어제오늘 여우짓을 다 하네.”
“걸렸어?”
얼굴을 내 쪽으로 기울이며 웃었다. 지난번에 한국에 왔을 때는 사람 속 뒤집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더니 이번에는 꾀어내려고 작정한 사람 같다. 어느 쪽이 진짜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날 재미로 흔들어 보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마. 소용없으니까.”
“싫어. 계속할 거야.”
“왜? 나 가지고 노는 게 재밌어?”
나도 모르게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진형이 억울한 얼굴을 하다가 게임 패드를 멀리 던지고 날 끌어안고 뒹굴었다.
“네가 그렇게 신랄하고 차갑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 거 요즘 들어 알았잖아.”
잔뜩 찡그린 채로 웃는 진형의 얼굴이 낯설었다.
“나 미워하지 마. 지운이 형은 그러려니 할 수 있는데 너한테까지 미움받으면 어쩔 줄을 모르겠어.”
“…….”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나를 감싸고 지켜 주고 기대어 쉬게 해 주던 나의 첫사랑, 나의 집.
“내가 어떻게 형을 미워하겠어.”
진형을 꽉 안아 주었다. 이 바보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좋아하지 않으면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 형 안 미워해. 그냥 더 이상 안 좋아할 뿐이지.”
“왜 안 좋아해?”
이렇게 재수 없는 질문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삶이라니 조금 부러워지려 했다.
진형의 인생관이자 연애관은 지운의 표현을 빌리면 난잡하고 제현의 표현을 빌리면 추잡했다. 본인의 설명으로는 그 누구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거라고 했다. 그리고 애초에 진형은 남자가 연애 대상인 것도 아니었다.
“내가 여자였으면 형을 구속할 수 있었을까?”
진형의 눈이 흔들렸다.
“아니다. 내 성격에 형한테 말도 못 걸고 친해지지도 못했을 것 같아.”
자조적으로 웃었다. 우리는 아마 어떻게 만났더라도, 전제 조건이 얼마나 달라지더라도 인연의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결국 언젠가는 이 루트로 진입했을 것 같았다.
“형은 형 마음대로 살아. 나도 내 마음대로 살 테니까.”
내가 말해 놓고 언젠가 제현이 내게 했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제현과 내가 이렇게 의외로 닮은 구석을 발견할 때마다 참 재밌었다.
‘형은 형 좋을 대로 해 보세요. 나도 나 좋을 대로 할 테니까.’
제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네가 지금 어떤 뜻으로 말하는 건지 알겠는데 속상해.”
“속상할 게 뭐 있어. 형이나 나나 속 편해질 일이지.”
후련함에 진형의 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진형이 그 손을 붙잡아 내렸다.
“네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항상 내가 먼저였어. 너한테 말 걸었던 것도 친해지려고 노력했던 것도.”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진형의 눈동자가 깊었다. 잡은 손에 깍지를 끼더니 살살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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