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31화 (31/100)

31화.

내가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자 제현이 행동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무슨 오해를 했는지 모르겠는데…….”

술에 전 뇌가 다음 말을 빨리 정리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무슨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지?

“오해? 무슨 오해?”

제현이 인상을 쓰며 지운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잔뜩 힘을 준 손등의 핏줄이 더욱 두드러졌다.

“사람 잘 보살피겠다고 데려갔는데, 술에 잔뜩 취해서, 헐벗고, 울고 있는데 제가 오해했다고요.”

“어…… 어?”

그게 그렇게 되나? 생각해 보니 반쯤은 맞는 말이었다. 제현의 주먹이 지운에게 날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멈, 멈춰……!”

손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힘을 준 주먹이 허공에서 멈췄다. 저대로 날아갔다간 지운의 얼굴이 으스러질 것 같았다. 처참한 풍경의 상상이 너무 잘 돼서 술이 다 깼다.

“설명,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일단 이리 와서 앉아 봐.”

제현이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지운의 멱살을 내려놓고 내 곁에 와서 앉았다. 흡사 훈련 잘된 사냥개 같았다.

자초지종을 느긋하게 설명해 주자 제현이 아까보다는 진정한 것 같았다. 그래도 뭐가 그리 아니꼬운지 지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명 둘이 합심해서 날 숙소에서 내쫓을 때만 해도 죽이 잘 맞더니 또 꼬인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까 전화가 왔을 때도 오해할 만한 소리가 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 그냥 둘 다 취해서 행동도 사고도 굼떴던 거야. 술도 내가 먼저 달라고 했어.”

벗었던 옷을 다시 얌전히 주워 입고 뻘쭘하게 있는데 지금까지도 신발장 앞 현관에 앉아서 반쯤 졸고 있는 지운이 퍼뜩 깨더니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얘들아, 나 술 좀 깨게 담배 좀 피우고 올게. 얘기하고 있어.”

“형, 괜찮겠어요?”

“엉, 혀니혀니한테 말 좀 잘해 줘 봐.”

도어 록 소리가 들리고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왜 울었어요?”

“어…… 형이 너 문 열어 주려고 나가면서 엄청 많이 넘어졌는데 그게 웃겨서.”

제현이 내 눈 밑을 쓰다듬었다.

“웃느라 잠깐 눈물 좀 났던 거 아니잖아요. 눈이 퉁퉁 부었는데.”

잠깐 잤다고 눈이 벌써 부어올라 평소보다 시야가 반 절 이상 좁아졌다. 어쩐지 시야가 좀 좁은 것 같더니.

“저 형이 울렸어요?”

“어, 아니야. 절대 아니야.”

또 지운에게 주먹이라도 들이밀면 큰일이라 다급하게 대답했다.

“왜 울었는지 말하기 싫어요?”

“…….”

“그럼 말하지 마요.”

제현이 바닥에 구겨져 있는 외투를 주워 들었다.

“괜찮아요. 제가 아직 덜 파고들어서 그렇죠. 기다릴게요.”

순식간에 후련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오늘은 나도, 제현도 감정이 이리저리 널뛰는 날인가 보다. 미련 없이 정말 바로 가려는 제현의 옷자락을 나도 모르게 붙잡았다.

“왜요.”

제현이 내 얼굴을 쓰다듬다가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댔다.

“저 가 봐야 해요. 그렇게 보지 마세요.”

밖에서 와당탕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리고 지운이 급하게 들어섰다.

“야, 황제현. 주차를 저렇게 개같이 해 놓으면 어떡해?”

“제가 좀 급해서 그랬겠죠? 지금 갈 거예요.”

옷자락을 잡은 내 손을 두 손으로 감싸고 아쉬운 얼굴을 하더니 살포시 떼어 냈다.

“집 밖에 나가자마자 술이 확 깨더라 이 자식아.”

“형, 술 다 깨셨어요?”

제현이 살벌하게 웃으며 지운에게 물었다.

“아니, 안 깬 것 같아. 어, 안 깼어. 미안.”

제현이 픽, 비웃듯 웃더니 뒤돌아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갔다. 아닌 밤중에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았다. 이미 닫힌 현관문을 한참 바라보던 지운과 동시에 깊은숨을 내뱉었다.

“와, 진짜 나 아까 내 인생의 주마등이 보였잖아. 잘 놀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냐?”

지운이 중얼거렸다. 전화 한 통에 숙소에서 여기까지 한걸음에 쫓아온 제현의 등장은 정말 놀라웠지만, 못내 아쉽기도 했다.

숙소에서 폐인처럼 지낼 때는 제현이 바빠 며칠 동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이제는 생활 공간도 달라졌고 플레이오프 경기도 곧이니 더 못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쉽게 느껴졌다.

“왜 아쉽지?”

먼저 그만두자고 그러지 말자고 해 놓고 이제 와서 얼굴 못 보는 걸 아쉽다고 느끼는 내가 너무 아이러니했다.

“뭐가 아쉬워. 내가 살아남은 게 아쉬워?”

“아니요. 제현이가 돌아가는 게…….”

나는 아직도 망부석처럼 앉아서 닫힌 현관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아니, 그냥 두려운 것 같기도 하고. 쟤가 오늘은 날 좋아해 주지만 내일은 또 모르잖아요.”

“뭐야, 내가 너 피하지 말고 제대로 생각하라 그랬잖아.”

“그랬는데요?”

“결론이 어떻게 났는데?”

“그만하자고요.”

지운이 입을 쩍 벌리고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결론이 왜 그렇게 나?”

할 말이 없어서 고개를 숙였다. 상처받기 싫어서, 깊게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성급하게 결론지은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제현이 정말 나를 놓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제현을 시험에 들게 한 것은 아닐까.

여태까지 제현은 단 한 번도 변덕을 부린 적이 없는데 나는 세상에 없는 것을 핑계로 제현을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다시 뜨끈한 바닥에 지친 심신을 뉘었다.

“내가 널 이해하느니 대학원 기어들어 가서 석박사를 따고 말지.”

지운이 한숨을 푹 쉬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

지운은 휴방 일에도 숙취와 싸우며 영상 편집자와 통화를 한다고 바쁘다가 이제야 조금 시간이 빈 모양이었다. 짬뽕 국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게 아직도 숙취가 남아 있나 보다.

“맨날 이렇게 바빠요?”

“엉, 시간 빌 때는 또 엄청나게 비고 그래. 인터넷 방송이 다 그렇지.”

짬뽕 한 그릇을 말끔하게 비운 지운과는 다르게 내 그릇의 짬뽕은 열심히 먹었는데도 점점 면이 불어나 줄지를 않았다. 물려서 숟가락으로 국물이나 퍼먹고 있었다.

“아, 어디라도 데려가려 했는데 생각보다 늦게 끝나서 어딜 가기가 애매하네.”

“됐어, 나 어디 나가는 거 싫어요.”

“너 바다는 좋아하잖아. 우리 바다 보러 갈까?”

불면증이 심할 때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자는 버릇이 있어서 바다를 유독 좋아했다. 바다에 가본 지도 오래라 내심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싫지 않은 눈치인데? 당장 가자.”

“형, 저 옷 하나도 안 들고 왔는데요.”

“내 옷 입어. 얼추 사이즈 맞잖아.”

평소에 꾸미는 거 귀찮다고 트릭스 게이밍에서 지급한 유니폼만 돌려 입는 편이었다.

지운이 오늘은 좀 귀찮아 보자고 하며 드레스룸에서 옷을 스무 벌도 넘게 꺼내 와서 하나씩 나에게 대보았다.

“음, 나한테 작은 건데 너한테는 좀 크구나.”

“형, 나 힘들어.”

“가만있어 봐. 음, 모델 같고 좋은데.”

평소에 유니폼과 트레이닝복을 제외하면 다른 옷을 입어 본 적이 없어서 셔츠가 어색했다.

“좋아. 가자, 가자.”

***

지운이 타자마자 드라이브용 경쾌한 음악을 틀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멀미하기 전에 자도 돼.”

“혼자 운전하기 심심할 텐데.”

“나는 혼자서도 잘 노니까 걱정하지를 마세요. 서찬희 씨.”

그래도 좀 깨어 있으려고 했는데 결심한 보람도 없이 10분도 안 되어서 잠이 들었다.

깨 보니 벌써 밖에서 잔잔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지운이 차 문을 열자 바다 냄새도 물씬 났다.

“자, 업혀.”

내 쪽의 차 문을 열더니 내 앞에 쪼그려 앉는 지운이었다.

업혀서 해변 쪽으로 천천히 가는데 아직 날씨가 덜 풀려서인지 사람이 많이 없었다.

“와, 바닷바람 장난 아니네. 추워?”

“아니요. 안 추워요.”

오랜만에 보는 바다는 예뻤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왜 지운이 바다에 가자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금 마음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서해는 아무래도 좀 아쉽긴 하다. 동해를 보러 가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한참을 나를 업고 걸어 다니다가 힘들었는지 근처 카페에 나를 앉혀 놓고 아메리카노를 원샷하는 지운이었다.

다 마시고서 핸드폰으로 나를 이리저리 찍다가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 사진을 찍어 댔다.

“그만 찍어요.”

“꾸민 보람이 있다. 어떻게 찍어도 예쁘게 잘 찍히네. 셀카도 좀 찍자. SNS 올리게.”

어린애처럼 신난 지운이 귀여웠다. 해가 넘어가 어둑어둑해진 바다를 한 번 더 둘러보고 차에 돌아왔다. 밤의 바닷바람은 더 매서워서 둘 다 오들오들 떨면서 히터를 켰다.

“옛날 생각나네. 동진이랑 진형이랑 같이 강릉 갔었잖아.”

“진형이 형이 고기 다 태워 먹어서 동형이 화 많이 냈잖아요.”

“맞아, 맞아. 개웃겼는데. 물이 차서 얼마 놀지도 못하고 입술 시퍼레져서 밖으로 나오고.”

그때는 진형이 마냥 좋았지만, 마음은 지금처럼 지운과 있을 때 가장 편했다.

“형, 고마워요.”

“뭐가.”

“저 챙겨 주셔서.”

“너랑 나랑 벌써 몇 년인데 그런 인사를 다 하냐. 고마우면 좀 얌전하고 평범한 연애를 좀 해 봐. 내가 걱정 좀 덜게.”

“노력해 볼게요.”

지운이 작게 웃었다. 얌전하고 평범한 연애란 무엇인지 몰라도 나와는 별로 연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야, 그런데 너는 기막히게 딜러랑만 이 사달이 난다.”

“괜히 버퍼랑 세트겠어요. 형도 탱커 조심하세요.”

둘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킥킥 웃었다.

***

화이트 페이퍼 @whitepaper_trix

차니차니랑 바다왔음����

(사진)

“뭐야, 황제현 폰 볼 시간에 집중해. 내일이 플레이오프 첫 경기야. 이거 이겨야 준결승 간다.”

“어.”

“엥, 지운이 형이랑 찬희 형이네. 놀러도 가고 부럽다.”

준이 사람 속도 모르고 사진을 눌러 확대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저 형 사진빨 안 받는데 지운이 형 사진 진짜 잘 찍네.”

바닷가에 있는 카페인지 노을이 지고 있는 바다가 창밖으로 보였다. 역광을 받아 차분한 분위기로 노을빛이 찬희의 얼굴선을 따라 물들어 있었다.

못 보던 셔츠를 입은 걸 보니 지운의 옷인 것 같았다. 저렇게 꾸며 놓으니 마른 몸은 일부러 관리라도 한 모델같이 느껴졌다. 왜 저렇게 예쁘게 하고 다른 남자랑 밖을 돌아다니지.

‘나 질투하라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안 그래도 미친놈처럼 지운의 집에 찾아갔던 게 바로 어제였다.

TGT Joker @joker_tgt

@whitepaper_trix 곱게 좀 쓰시고 반납 꼭 하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답글이 달렸다.

@joker_tgt 님에게 보내는 답글

부럽나 보지?ㅎㅎ

만날 때마다 생각하지만 정말 사람 속 긁는데 도가 튼 양반이다.

@whitepaper_trix 님에게 보내는 답글

네^^

“제현아, 집중하자.”

“네.”

동진의 말에 핸드폰을 내려놨다. 영화랑 본격적으로 손발을 맞추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모두 신경이 예민했다. 찬희 형과 스타일도 너무 다른 데다가 영화의 시야 장악력의 범위가 찬희 형보다 좁아서 전략 자체가 달라져야 했다. 빈 옆자리가 너무 허전하게 느껴졌다.

게임이 잘 풀리지 않으면 자기 입술을 아프지도 않은지 남의 것처럼 잘근잘근 씹고 있던 작은 뒤통수가 너무 보고 싶었다.

“앓느니 죽을 걸 그랬지.”

“예? 형 죽어요? 지원 가요?”

혼잣말에 영화가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아니야…… 혼잣말이야.”

찬희가 숙소에서 폐인처럼 지내는 것이 신경 쓰이는데 일정이 빡빡해 보살펴 줄 시간은 없어서 참다못해 지운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도 자신이고 감독님께 허락을 구한 것도 자신인데 울적해서 눈물이 다 나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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