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29화 (29/100)

29화.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이 2라운드 마지막 경기를 2:1 승리로 장식합니다!

- 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에게는 정말 힘겨운 2라운드였죠?

- 2라운드 초반에는 정말 불안불안하고 다사다난했지만 그래도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 지었습니다!

- 이대로라면……. 3위로 진출하겠네요.

화면에 [삼각이들아 더 이상의 3위는 naver...★] 치어 플래카드를 든 관객이 잡혔다.

- 하하하, 그래도 4위보단 3위가 낫지 않나요?

- 더 이상의 3위는 없어야겠죠! 플레이오프에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선전을 기원합니다!

도대체 우리는 전생에 3이라는 숫자와 무슨 악연이 있어서 이렇게 허구한 날 3에 얽매여 있는지 모르겠다. 경기에서 이긴 사람들답지 않게 우리는 모여서 한숨을 푹 쉬었다.

“팬들이 우승 한 번만 하면 소원이 없겠대요. 저는 진짜 그날로 성불할 듯.”

“플레이오프 준비 빡세게 하자. 이번엔 다르다고 외치기도 이제는 민망하다…….”

준과 동진이 축 처진 채 대화를 나누었다. 제현이만 플레이오프 진출 확정 지었는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처져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KKL의 플레이오프는 4강 플레이오프로 진행되고 1, 2라운드 승점을 합산해 최종 등수 1위 팀은 결승전으로 직행, 4위 팀이 3위 팀과 경기 후 해당 경기 승자가 2위 팀과 경기를 치른다. 그리고 그 경기의 승리 팀이 1위 팀과 결승전을 통해 우승팀을 가리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2위 팀과의 경기에서 이겨 본 적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나마 정규 시즌 3위까지는 월드 시리즈 진출 포인트를 많이 줘서 조금의 위로가 되긴 했다. 정말 아주 조그마한 위로라서 별 티도 안 나기는 했지만.

“다들 2라운드 고생했다! 우리 조금만 더 고생하자!”

명진욱 감독님이 대기실의 분위기가 축축한 것을 보고 대기실에 곰팡이 슬겠다면서 크게 파이팅을 넣었다.

“김준! 하와이 안 갈 거야? 어! 가기 싫어?”

“알로하!!!”

“마, 동진이 너도 내년에 결혼한다며! 우승컵은 들어 보고 장가가야 하는 거 아니야?”

“승미야 사랑한다!!!”

“제현이 너도 데뷔하자마자 우승까지 하면 역대급 괴물 신인 되는 거다!”

“와, 괴물 신인!”

차례차례 기합을 불어넣어 주던 감독님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했다. 갑자기 눈시울이 촉촉해지시더니 엄지와 검지로 눈가를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감독님…….”

“우시는 거야……?”

요즘 들어 눈물이 많아지신 듯한 감독님이었다.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 주자 감독님이 코를 훌쩍였다.

“찬희야, 우리 우승하자.”

“예, 예. 열심히 할게요.”

감독님의 눈물 바람에 다들 의기소침한 모습을 버리고 머리를 맞댔다. 다행히 다들 힘내서 오늘 경기를 복기할 수 있었다.

다들 바쁜 틈을 타서 손목을 연신 주물렀다. 요즘 랭킹전을 오래 붙잡고 있어서 그런가, 손가락 통증뿐 아니라 손목을 타고 팔꿈치까지 시큰거리는 일도 잦았다.

인상을 쓰고 있는데 제현이 내 앞에 다가와 섰다. 괜히 아프지 않은 척 표정을 풀었다.

“주치의 선생님이 뭐라고 안 하셨어요?”

“어, 어. 괜찮다고 하셨어.”

“…….”

제현이 심각한 표정으로 내 오른손을 보다가 뒤돌아 감독님을 불렀다.

“어, 왜. 무슨 일 있어?”

“찬희 형 손 통증 심한 것 같아서 좀 봐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아파?”

“아니요.”

“엥?”

내 대답에 감독님의 얼굴이 다시 제현에게 향했다. 제현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현이 팔꿈치를 잡아 강제로 팔을 들게 하자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윽…….”

“형, 지금 손가락도 손가락인데 손가락만 아픈 거 아니죠.”

“뭐야, 그랬어? 인마 진작 말을 했어야지.”

팔꿈치를 붙잡고 제현을 노려보는데 나를 보던 감독님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렇게 심각한 거 아니에요.”

“그건 네 생각이고. 아무래도 정밀 진찰을 받아 보는 게 좋겠다.”

“하…….”

감독님이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답답한 마음에 머리를 박박 긁었다. 이럴 시간이 없는데.

***

“음, 이번 시즌은 아무래도 쉬는 편이 어떨까 싶은데.”

“예? 이제 플레이오프 경기가 곧인데 안 돼요. 2주 정도만 깁스하고 재활 운동하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의사 선생님이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골절도 골절인데, 손목에도 무리가 많이 간 것 같아. 내가 경기 출전이 가능하다고 말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평소처럼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거든. 이거 고질병 되기 쉬워서 당분간은 그냥 안 쓰는 게 제일 나을 것 같은데.”

억울한 얼굴로 감독님을 바라보자 감독님이 인상을 쓰다가 수첩에 머리를 박았다. 그러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쩔 수 없지. 이번 스프링 시즌은 영화가 마무리해야겠다.”

“감독님……!”

“네가 팀에 큰 전력인 건 맞아. 전력 손실인 것도 맞고. 근데 월드 시리즈 직행 티켓이 걸린 서머 시즌이라면 몰라도 스프링 시즌에 네 선수 생활 수명 갈아 넣으면서까지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김에 영화도 경험치 쌓는다고 생각하면 돼.”

그 뒤로도 여러 차례 감독님에게 항의 의사를 전달해 봤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아 왼손으로 벽을 내려쳤다. 그 소리에 제현이 달려와 내 손을 쥐었다.

“이제 멀쩡한 손까지 부숴 먹을 생각이에요?”

“너 사람 뼈가 이 정도로 간단하게 부러지는 줄 알아?”

“그럼 형 손이 부러지지, 벽이 부서지겠어요? 그리고 이미 한쪽 손발 부러진 사람이 할 말이에요?”

“그래, 이 중요한 시기에 손이고 발이고 다 분질러 먹고 팀에 피해 줘서 정말 미안하네?”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화를 못 이긴 내가 짓씹듯이 말하자 제현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무도 형이 팀에 피해 줬다고 생각 안 해요.”

“누가 그렇게 생각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내가 팀에 피해를 줬다는 건 그냥 팩트야.”

서로 식식거리는 숨소리가 오갔다.

“네가 말만 안 했으면 아무도 모르게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어.”

“형은 이번 시즌만 뛰고 프로게이머 안 할 거예요? 왜 그렇게 오늘만 살고 죽을 것처럼 굴어요?”

“내가 분명히 알아서 한다고 그랬지? 네 알 바 아니야.”

제현이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 감싸 쥐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

“저라고 형이랑 게임 못하는 게 즐거운 일인 줄 아세요?”

“…….”

“됐어요. 지금 이 상태로 형이랑 얘기 더 나눠 봤자 형 화만 돋울 거 아니까. 나중에 얘기해요.”

분이 풀리지 않아 돌아선 그의 등을 노려보고 있는데 제현이 돌아서서 몇 걸음 걷지도 않고 다시 내게 돌아와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경고했다.

“성질 안 풀린다고 한 번만 더 벽 쳐 봐요. 벽 다 부숴 버릴 테니까.”

***

똑똑.

제현이 방을 나간 뒤에도 혼자 분을 못 이겨 어쩔 줄을 모르고 한참을 식식대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영화의 얼굴이 빼꼼 들어와 내 눈치를 살폈다. 순둥한 얼굴을 하고 바싹 긴장해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불쌍했다.

“그러고 있지 말고 들어와.”

“네, 네!”

영화가 쭈뼛거리며 들어와 내 앞에 바른 자세로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

“뭐야,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아, 네. 그게……. 형 괜찮으신지 궁금해서 왔어요.”

“됐어. 그게 용건이었으면 그냥 가 봐. 안 괜찮아도 네가 뭘 어쩌겠어.”

가뜩이나 당장 플레이오프 메인 버퍼로 출전해야 하니 팀에서 제일 바쁠 사람이 이런 데까지 신경 쓰는 것이 거슬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영화가 머뭇거리다가 자기 두 손을 꽉 쥐더니 고개를 들었다.

“형 빈자리 제가 잘 채워 놓고 있을게요.”

사람 놀리는 건가 잠시 의심했지만 나를 향한 곧은 시선이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것이 그런 의미로 말한 것 같지 않았다.

“저 진짜 열심히 할 테니까, 형도 몸 관리 잘하세요. 어…… 저 그럼 가 볼게요. 쉬세요.”

영화가 문을 열자 얼음주머니를 들고 있는 제현과 마주쳤다.

“어, 제현이 형. 감독님께서 연습실로 오라고 하셨어요.”

“어, 이거 찬희 형 주고 따라갈게. 너 먼저 가 있어.”

“네, 형. 이따 봐요.”

영화가 달려가는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제현이 문을 닫았다.

“희한하네.”

다가와 수건으로 감싼 얼음주머니를 내 손목에 올려 주었다.

“쟤랑 무슨 대화를 나누셨길래 화가 좀 가라앉은 것 같지? 형은 이상하게 영화랑 얘기할 때 되게 편안해 보이더라고요. 부럽게.”

내 손목에 내려앉은 시선 때문인지 제현의 속눈썹이 반투명한 커튼처럼 눈동자를 가렸다. 약간 붉어진 왼손도 꼼꼼하게 살피더니 한숨을 쉬었다.

“은근히 한 성격 하신다니까. 연습실 같이 갈래요?”

“됐어, 혼자 가. 좀 이따 코치님이 할 얘기 있다고 오신다고 하셨어.”

“알았어요.”

제현이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다녀올게요.”

짤막한 인사가 이어졌고 나는 왠지 뒷모습을 보는 게 쓸쓸했다.

***

한 번의 결장이 전부일 줄 알았던 올해 스프링 시즌은 플레이오프를 통으로 날리게 됐다. 멘탈은 멘탈대로 흩날리고 종잇장 같은 몸은 스트레스에 흔들렸다.

며칠이나 반쯤 정신 놓은 사람처럼 이래도 뚱, 저래도 뚱, 묵언 수행을 하는 사람처럼 예, 아니오만 고개로 표현하며 지냈을까. 동진도 처음에는 어르고 달래다가 화내고 혼을 내보기도 하다가 두 손을 들었다.

모두 플레이오프 준비에 바빠서 원 없이 혼자 지낼 수 있었다. 어제는 20시간 정도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서찬희…….”

이불속에 파묻혀 있다가 익숙한 목소리에 얼굴만 내밀자 지운이 있었다. ‘어이구, 이 화상아.’ 연신 외치며 없는 볼살을 꼬집어 쭉쭉 늘렸다.

“결국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해? 이런 괘씸하고 귀여운 녀석 같으니라고.”

“으으…….”

“오죽했으면 황제현이 나한테 좀 도와 달라고 헬프콜을 다 넣었냐? 어?”

“아으이이 으으으 아이에어?”

“뭐라고?”

지운이 놓아준 볼이 얼얼해 문질렀다.

“감독님이 부른 거 아니에요?”

“아니, 혀니혀니가 불러서 왔는데.”

둘이 연락처를 주고받았는지도 몰랐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뿌리까지 백색에 가까운 탈색모였는데 머리가 자랐는지 뿌리가 검게 올라와 있었다.

“형 머리할 때 됐네요.”

“엉. 아니, 야 지금 그게 중요해? 너 밥도 안 먹고 지지리 궁상떨고 있다며.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니에요. 먹었는데 토해서 소용이 없었던 거예요.”

지운이 기가 질린 얼굴을 했다.

“아무튼, 짐 싸. 감독님이 너 나랑 지내도 된대.”

“싫어요.”

“여기 있어 봤자 경기 못 뛴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밖에 더 받아? 아니다, 짐은 무슨 짐이야. 어차피 우리 집에 다 있어. 몸만 가자.”

지운이 으라차차 하면서 나를 안아 들려고 하기에 내가 버둥거리자 떨어뜨릴까 무서운지 다시 내려놨다.

“혀니혀니, 멀뚱히 서 있지 말고 나 좀 도와주라!”

“네.”

있는 줄도 몰랐던 제현의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렸다.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내가 발버둥을 치지 못하게 이불로 둘둘 감쌌다. 그것도 부족한지 이불을 몇 개 더 가져와 단단하게도 말기까지 했다. 그리고 누에고치처럼 이불에 말린 나를 가볍게 어깨에 올렸다.

“내, 내려놔…….”

“저라고 형을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게 아니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김밥 같은 모양으로 제현의 어깨 위에 들린 채 숙소 안을 누비다 빠져나왔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구경했던 것이 생각나 부끄러웠다.

나를 지운의 차에 태우고 제현이 내 이마에 자기 이마를 맞부딪혔다.

“형 없이 경기 준비하는 거 너무 힘들어요. 기다릴 테니까 잘 지내다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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