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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이 트로피-27화 (27/100)

27화.

잠든 제현의 얼굴을 한없이 무료하게 구경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다. 제현이 깨워서 부스스 일어났다.

정확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따로 알람도 맞추지 않았던 것 같은데 저 녀석 몸속에는 알람 시계라도 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보통 제현은 늦게 잠이 들더라도 꼭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어떻게 눈 뜨자마자 몸을 혹사하러 나가는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상큼할 수 있는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1일 허용 의지력의 절반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으로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으니 제현이 내 칫솔에 치약을 짜서 가져다주었다. 평소보다 훨씬 늘어지게 오래 잔 것 같은데 아직도 잠이 덜 깨서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입을 벌리자 제현이 내 입에 칫솔을 넣어 주었다.

“양치질도 제가 해 드려요?”

“으으.”

“형은 술보다 잠에 취해 있을 때 가드가 더 낮은 것 같아요.”

“므애…….”

칫솔을 물고 웅얼거리자 인간의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대답이 나갔다. 제현이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곤 변기에 나를 앉혀 주었다.

“확 잡아먹을 수도 없고…….”

제현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세상 느릿하고 게으르게 양치와 세수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나를 다시 안아 들어 침대에 앉혀 줬다.

상쾌한 기분에 슬슬 뇌도 잠의 수마에서 벗어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물에 젖어 이마에 붙은 내 머리를 넘기는 제현의 손길이나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게 느껴졌다.

“왜 그렇게 봐.”

“이제 잠이 좀 깨셨나 보네요. 아쉽다.”

“목발 좀 갖다 줘.”

“어디 가시려고요? 저도 이제 조깅하고 올 건데 가는 길에 데려다드릴게요.”

잠시 고민하다 당장의 편안함을 선택했다.

“연습실에 내려 줘.”

“한 30분만 뛰고 데리러 올게요. 같이 밥 먹어요.”

***

이번 주는 따로 일정이 없어서 자율 연습과 개인 스트리밍을 하면 됐다. 샤워하고 왔는지 뽀송한 제현과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보통은 마주 앉아서 먹지 않아?”

모닝빵을 잘게 쪼개다가 하도 기분이 이상해 물었다. 4인용 테이블인데 맞은 편에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아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왜요. 좋은데.”

“이상하잖아.”

“전 형 옆자리가 좋아요. 다른 자리는 싫어요.”

“너 은근히 고집 세다.”

“은근히 아니고 완전 세요. 장난 아닌데.”

대답을 마친 제현이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더 이상 잘게 쪼갤 수 없는 모닝빵을 내려놓고 손을 탈탈 털었다. 제현이 자기 몫의 빵을 내 접시로 옮겨놓았다.

“음식 이리저리 잔뜩 휘젓고, 뭉치고, 쪼개다가 어느 정도 먹은 척하는 거 우리 누나가 밥 먹기 싫을 때 쓰는 수법이라 잘 알아요. 이번엔 쪼개지 말고 드세요.”

입맛이 없어 거의 먹지 않고 있었는데 들켰나 보다. 한숨을 쉬고 빵을 한입 물고 씹었다. 사람은 왜 밥을 먹어야 하는가. 이쯤 되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알약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인류는 정말 멀었다.

“체크메이트 먹방이 왜 유명한지 알겠어요.”

“그런 게 왜 유명해?”

“식욕감퇴, 다이어트용 먹방으로 유명해요. 오만 식욕이 다 사라진다고 용하대요.”

“그런 사람이랑 같이 밥 먹게 해서 미안하네.”

그래서 맞은편이 아니라 옆자리에 앉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현이 큭큭 웃었다.

“아뇨, 저는 형 먹는 거 좋아해요. 아, 이거 중의적으로도 들린다. 그렇죠?”

가만 보면 정말 창의적인 친구다.

“오늘 뭐 하실 거예요?”

“글쎄, 일정 없으니까 랭킹전이나 돌려야지.”

제현이 내 말에 미간을 좁혔다.

“병원에서 최대한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고정해 놨잖아.”

“그렇다고 계속 마우스 잡아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잖아요. 진통제 먹는 거 보면 통증 있는 거 뻔히 보여요.”

“내가 알아서 해.”

제현이 답답한지 머리를 북북 긁었다.

“알았어요.”

먹은 것도 없는데 속이 더부룩했다. 다리를 다치고 움직임이 없어서 더 그랬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에 보이는 날씨가 맑았다.

“다 먹고 밖에 좀 나갈래요?”

“이 다리를 하고 어딜 나가.”

“업어 줄게요. 형은 햇볕을 좀 쬐어야 해요.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도 덜 추워요.”

테이블 위로 손을 펼쳐 보니 평생 햇빛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처럼 창백했다. 제현이 자기 팔을 걷어서 내 팔 옆에 붙였다. 핏줄이 서 있는 남자다운 팔은 까만 편은 아니었지만 건강하게 잘 익은 색을 하고 있었다. 제현의 팔 옆에 내 팔을 두니 모든 혈색을 빼앗긴 사람처럼 보였다.

“이거 봐요. 형은 분명히 비타민D도 부족할 거예요. 광합성 좀 해요.”

빈 접시들을 치우고 오더니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제는 이 등에 업히는 것도 너무 익숙해졌다.

“너는 귀찮지도 않아?”

“제가 저 좋을 대로 한다고 그랬잖아요. 저는 지금 좋아요.”

제현이 힘든 기색도 없이 단번에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한층 높아진 시야가 마음에 들었다.

“제가 고집 세다고도 했잖아요. 저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해요.”

숙소 앞에 심어진 벚나무에 꽃망울이 맺혀 있었다. 겨울지나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넌 내가 왜 좋아?”

“좋아하는 데도 이유가 필요해요?”

제현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싫은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법이잖아요. 싫어할수록 많아지고. 정말 싫어하는 사람한테는 크리스마스트리보다 화려하게 이유를 잔뜩 달아 줄 수 있어요.”

제현이 걸음을 멈췄다.

“그런데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따로 없어도 좋더라고요. 저는 그래요. 형이 좋아요. 그냥 다 좋아요. 이유 같은 거 필요 없이 좋아죽겠어요.”

좋아요 콤보에 듣는 내가 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업혀 있어서 제현이 내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게 참 다행이었다.

“형은 그 뺀질이 왜 좋아했어요?”

“그 형이 내 집이었거든.”

언제든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런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처럼 느껴지는 사람. 하지만 완전히 내 것은 아니었으니 집은 집인데 셰어하우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그건 좀 어렵네요. 얼굴이 잘생겨서, 돈이 많아서, 다정해서, 그런 이유였으면 더 쉬웠을 텐데. 아직도 좋아해요?”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고.”

예전처럼 없으면 죽을 것 같고 텅 빈 느낌이 사무쳐서 미쳐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나고 보니 혹시 사랑이 아니라 단순한 분리불안은 아니었을까 싶어질 정도였다.

“그래서 아직도 저랑 그만하고 싶어요?”

“모르겠어. 근데 너를 나 좋을 대로 이용하고 싶지는 않아.”

“이용하는 게 싫으면 저 좀 도와주세요.”

제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는 형 행동 하나에 하루에도 수십 번 열탕과 냉탕을 반복해서 오가는데 아주 조금의, 일말의 동정이라도 가져 봐요.”

아직 꽃이 피지 않아 앙상하게 보이는 벚나무 근처 벤치에 제현이 나를 앉히더니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강아지 같은 눈을 하고 올려다보며 시선을 맞춰왔다.

“저를 이용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안 된다면 불쌍하게라도 여겨 주면 안 되나요?”

“그게 널 이용하는 거랑 뭐가 달라?”

“다르죠. 형이 저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용당하는 거랑 도움받는 거랑 어떻게 같아요.”

제현의 곧고 단단한 시선이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둘 다 제가 이득을 본다는 건 같지만요.”

제현이 내 허벅지에 얼굴을 기댔다.

“형도 제가 싫지는 않잖아요.”

“너 살면서 거울 본 적 없어?”

“제 얼굴이 무진장 형 취향이라는 건 잘 알겠어요.”

애초에 제현의 얼굴은 취향 범위를 뛰어넘는 무언가였다.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받을 무기를 들고서 내 앞에서만 겸손해지는 이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키스하고 싶어요.”

처음 제현과 키스한 곳도 이 근처였다. 그날 입맞춤의 기억이 단숨에 나를 뒤덮었다. 여기에만 오면 어쩌면 이렇게 사람이 충동적으로 변하는지. 누가 무슨 주술이라도 걸어 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 보고 있는 제현의 입술만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엄지손가락으로 제현의 입술을 문질렀다. 내 손길에 입술이 벌어지고 내 손가락을 입에 담았다.

뜨거운 혀가 내 손가락을 휘감았다. 살짝 깨물고 빨다가 쪽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혀를 길게 빼내어 핥아 올리면서도 시선은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시원하게 트인 눈이 반으로 접히며 눈웃음을 지었다. 핥아지는 건 엄지손가락이었지만 다른 것을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방에, 방으로 가자.”

제현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나를 안아 올렸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을 게 분명했다. 왜 나는 유독 여기만 오면 이렇게 단숨에 제현에게 함락되는가.

방으로 오는 내내 제현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고서 여기에 이를 박아 넣고 싶다는 생각만 줄곧 했다. 내 숨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제현의 걸음도 점점 빨라져 거의 달리다시피 방으로 향했다.

“흐읏…….”

제현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흔들려 앞섶이 제현의 몸에 비벼져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뛰다 말고 제현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저 이미 미칠 것 같으니까 자극하지 마세요.”

방이 이렇게 멀었던가. 애타는 심정에 제현의 목을 더 꽉 끌어안았다.

쾅!

방에 도착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제현의 얼굴을 쥐고 입술을 탐했다. 나를 받아들이며 부드럽게 열리는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 엉덩이를 양손으로 힘주어 주무르는 손길에 신음이 새어 나갔다. 깁스 때문에 통이 큰 펑퍼짐한 반바지를 입고 다녀서 바지를 벗기지 않고도 제현의 손이 수월하게 속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뜨거운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살이 좀 붙는 것 같더니 다친 뒤로는 빠지기만 하네요.”

“왜 만지는 맛이 없어?”

“그럴 리가요.”

제현이 자기 티셔츠를 올리고 입에 물었다. 탄탄한 가슴이 드러나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만지고 싶었다. 몸을 일으켜 제현의 티셔츠를 벗겨 내고 다시 입을 맞췄다.

제현이 다시 나를 눕히고 티셔츠 속으로 손을 넣어 유두를 비틀었다. 다른 팔로는 서랍을 뒤져 젤과 콘돔을 찾는 듯했다. 나는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떨어진 제현의 얼굴을 끌어당겨 다시 입술을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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