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26화 (26/100)

26화.

항상 제현이 날뛰려는 걸 묶고 가두기 바빴지만, 이번 게임만큼은 고삐를 제대로 풀어 줘도 되겠다 싶었다.

“저 진짜 이번에 안 참아요.”

“안 말릴 테니까 마음껏 들이박아.”

- 어떻게 시작하자마자 더블 킬이 나오나요? 지금 게임 시작한 지 5분도 안 됐는데요!!

- 조커 선수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KJ 스노우 비상입니다. 큰일 났어요!!!

6레벨 스킬이 문제라면 6레벨 전에 게임을 터트리면 그만이었다.

KJ 스노우가 전투를 피한다고 피했지만,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제현이 맵 시야에 적이 보였다 하면 경주마처럼 질주해 적진 한가운데까지 쫓아가며 킬을 따냈다.

6레벨 후 전투를 걱정했지만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KJ 스노우의 딜러를 제외하고는 회피기를 제 타이밍에 쓰는 사람이 없었고 이미 초반에 든든하게 킬을 먹고 아이템 보유를 끝낸 상태라서 일단 전투를 열면 승리했다.

- 오늘 조기 퇴근할 수 있겠는데요? 벌써 KJ 스노우의 성문이 함락되고 있습니다!

-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내일부터 경기하는 팀들은 제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좀 되겠는데요?

- 분명히 같은 기사인데 1세트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조커 선수가 ‘아, 제라 그렇게 쓰는 거 아닌데. 이거 이렇게 쓰는 거야!’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승리]

“나이스!!!”

2:0 완승이었다. 이번 승리로 3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남은 경기는 두 경기. 큰 이변이 없는 한 이번 스프링 시즌의 플레이오프는 진출 확정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진 촬영을 위한 카메라가 다가오자 뒤에서 준이와 얼싸안고 있던 제현이 달려와 손가락으로 브이를 하며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올렸다. 얘는 이럴 때마다 참 아이돌을 해도 잘했겠구나 싶었다. 무슨 마네킹처럼 가만히 있자니 눈치가 보여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풉.”

제현이 얼굴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따, 따봉을……. 큭, 크흡.”

“왜 웃어.”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잡고 웃는 제현을 보는데 촬영 기사님이 여기 보고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해서 혼자서라도 찍혔다.

“아, 너무 웃기다. 저도 따봉하고 찍을래요.”

“조커 선수 여기 봐주세요.”

얼마나 웃은 건지 맺힌 눈물을 다 닦아 내며 카메라 앞에서 양손으로 따봉을 하는 제현이었다. 내가 할 땐 되게 어색했는데 제현이 하니까 다른 것이 역시 세상이 좀 불공평한 것은 아닌가 고민했다.

“체크메이트 선수, 조커 선수 MVP 인터뷰 준비해 주세요.”

“네, 갑니다.”

제현이 나를 번쩍 안아 올려 인터뷰 스테이지로 향했다. 어정쩡하게 몸이 굳어서 제현이를 쳐다보자 제현이 귓속말로 속삭였다.

“단 한 걸음도 본인 의지로는 걷기 싫다면서요. 즐겨요.”

“그냥 업히면 안 돼?”

“안 될 건 없는데, 업으면 제가 형 얼굴을 못 보잖아요.”

내 얼굴이 뭐가 그리 좋다고 못 봐서 아쉽다는 소리를 다 하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업든, 안아 들든,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라는 심정이었다.

솔직히 승차감이 너무 좋다니까. 이래서 비싼 차에 타 본 사람들이 그 승차감을 못 잊고 허덕이나 보다 싶었다.

스테이지에 도착하니 의자 3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보통은 서서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나를 배려해 앉아서 진행하는 것 같았다.

제현이 날 의자에 앉혀 주고 마이크를 받으러 다녀오다 문은영 아나운서와 마주쳤다. 제현을 본 은영이 밝게 웃음을 지었다. 전방 100m 범위가 덩달아 화사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조커 선수! 이번에는 오랜만이 아니네요?”

“더 자주 와야죠. 우승컵 들어야 하는데.”

“좋아요. 우승 인터뷰에서 꼭 봐요, 우리.”

준비되는 동안 제현과 은영은 짧게 지난번에 함께 촬영한 프로그램 얘기를 나누었고 나는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나운서 문은영입니다. 네, 점점 더 치열해지는 KKL 스프링 시즌 2라운드 다시 만나게 된 KJ 스노우와의 경기를 2:0으로 완승한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체크메이트 선수, 조커 선수 함께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인터뷰가 너무 어색해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급하게 제현을 따라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천적을 상대로 당당히 2:0 승리를 손에 쥔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입니다. 이번 1, 2세트 모두 신기사 제라가 나와서 모두를 놀라게 했죠. 1세트 첫 전투에서 잠시 퍼즈가 있었는데요. 모두가 범위 내 확정 스킬이라고 생각한 스킬의 캔슬이라니, 정말 놀라웠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셨나요?”

“찬희 형이 부상으로 쉬는 동안 알아내서 팀원 모두가 특훈을 좀 했습니다.”

“그런데 구리 선수의 경우 계속해서 회피에 실패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특훈이 모자랐던 걸까요?”

제현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형이 박치라서 그렇습니다. 연습은 제일 열심히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MVP 인터뷰에도 딜러, 버퍼 세트로 와 주셨는데 오늘도 두 분이 함께 올라오셨어요. 조커 선수 이대로 선전하면 MVP 1위도 노려볼 수 있는데 이번에 MVP 포인트를 독식하지 못해 아쉽지는 않으신가요?”

“팀원이 잘한 건데 기쁘죠. 버스 승차감 달달하거든요.”

“조커 선수도 버스 기사보다 승객을 원하실 줄은 몰랐네요.”

은영의 눈이 반으로 접히며 웃음을 짓다가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체크메이트 선수 1세트 활약이 굉장했습니다! 스킬을 썼다 하면 4인 궁이 연신 터져 나왔어요!”

“네, 감사합니다.”

“다인 궁을 쓸 수 있는 나만의 꿀팁이 있을까요?”

“적팀이 모여 있을 때 쓰면 됩니다.”

관객석에서 웃음소리와 야유가 동시에 나왔다.

“하하, 교과서 위주로 예습과 복습을 매일 철저하게 한다면 서울대에 갈 수 있다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는걸요? 그러면 조커 선수에게 질문해 볼게요. 논타겟팅 스킬 맞추는 꿀팁이 있나요?”

“음, 제가 딱히 알려 드릴 만한 게 없어서 찬희 형이 전에 했던 말로 대신 답변해도 될까요?”

“체크메이트 선수가요? 어떤 말씀을 하셨나요?”

“그냥 쏘면 맞던데요.”

이번에는 더 큰 웃음과 야유를 부르는 말이었다.

***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은 승리의 기쁨이 가시지 않은 듯 시끌시끌했는데 나는 어쩐지 피곤해 꾸벅꾸벅 졸았다. 창문에 머리를 박을 뻔했는데 타이밍 좋게 제현의 손이 내 머리를 감쌌다.

“많이 졸려요?”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예 제현의 손을 베개 삼아 머리를 기대자 나를 끌어당겨 자기에게 기대게 했다. 머리에 얹어진 손이 따끈따끈해서 기분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에 도착했는지 차가 멈췄다. 문이 열렸는지 찬바람이 들이쳐 잠에서 깼다. 하지만 잠에서 깬 것과는 별개로 몸은 완전히 수면 모드였다. 그냥 이대로 차에서 한숨 자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제현도 차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잠에 취한 상태로 눈을 반쯤 감고 그 모습을 보는데 제현이 뒤돌아 나를 보는 게 느껴져 안기 좋게 팔을 벌렸다. 제현이 잠시 멈칫했다.

“뭐 해…….”

“아, 아니. 와…….”

제현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다가 돌연 자기 뺨을 치더니 나를 안아 들었다.

“진짜 형은 사람 속도 모르고.”

날씨가 풀릴 거라고 말만 여러 번이고 실제로는 풀렸다가 추웠다, 반복해서 한겨울보다 요즘이 더 춥게 느껴졌다. 제현의 품이 따뜻해서 조금 더 파고들자 제현이 한숨을 쉬었다.

“제현아, 찬희 무거워? 내가 들까? 오늘 하루 종일 네가 챙겼잖아.”

“괜찮아요. 찬희 형이 무거워 봤자 얼마나 무겁다고.”

“원래 차를 오래 타면 멀미해서 잠드는 편이긴 한데 오늘은 숙소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그새 잠들었냐.”

“어제 늦게 자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제현이 등을 토닥거려 주는 게 느껴졌다.

[나이츠 KKL 게시판] 쳌메 썩소 지렸다ㅋㅋ

제라 스킬 씹자마자 퍼즈 난 거 보고 웃는 쳌메ㅋㅋㅋㅋ

댓글 115개

ㅅㅅ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ㄷㄷ : 근데 나 사용자 설정에서 봇이랑 해 봤는데 회피 왜 안 됨?

└ㅎㅎ : 되는데요? 영상 올라와 있는 거 보면서 따라 해 보셈

└└ㄷㄷ : 보고 따라 하고 있는데도 안 돼;

└└└ㅊㅊ : 동구리형도 못하던데 포기해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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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츠 10.01 패치 노트]

기사 업데이트

제라

제라의 스킬 구성이 저희가 의도한 바보다 더 강력해 플레이를 단순화시켜 다양한 전술의 등장을 퇴색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지난 공지를 통해 제라의 스킬 계수 및 스킬 재사용 시간 등 일부 변경 사항을 미리 전달해 드린 바 있습니다. 그 외에 추가로 스킬의 적용 기준을 변경하여 제라의 특징을 더 살리면서 밸런스를 맞추어 나가려 합니다.

▶ 각 스킬 계수가 낮아져 공격력이 줄어들지만, 스킬 재사용 대기시간 또한 줄어들어 조금 더 자주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 스킬 계수 조정 0.8 → 0.4

▶ 이런, 제라의 칼이 스치는 순간을 노려 제라의 공격을 회피하는 기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분노한 제라는 피나는 훈련을 통해 더욱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 6레벨 스킬 [절대 감옥]이 이제 스킬 발동 시 거리 범위 내의 모든 적을 확정적으로 공격합니다.

※ 10.01 패치 전까지 제라가 비활성화됩니다.

이거 삼각이들 저격한 거 맞지?ㅋㅋ

댓글 65개

ㅇㅇ : 제라 왜 글로벌 밴 됐나 했더니 훈련소 들어감ㅋㅋㅋㅋㅋㅋ

ㅁㅁ : ㅋㅋㅋㅋ아 ㅅㅂ 훈련하고 오는 거 개웃기네 회피되는 거 진짜 의도한 거 아니었나 봄

ㅅㅅ : 그 짧은 시간 동안 회피되는 거 어떻게 알아냈냐 진짴ㅋㅋㅋㅋ

ㅎㅎ : 아 제라로 개꿀 빨고 있었는데 망함

ㅋㅋ : 명불허전 트릭스 게이밍…… 삼각이들 경기 있는 날 랭킹전 하면 안됔ㅋㅋㅋㅋ

ㅈㅈ : 그래도 내일부터 글로벌 밴이라 개다행ㅋ

일어나 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언제 침대로 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나에게 팔베개를 한 채 잠들어 있는 제현의 얼굴에 현실 감각이 더 희미해졌다. 팔이 저릴까 걱정돼 서둘러 몸을 일으키자 제현이 눈을 끔뻑거렸다.

“좋은 아침.”

아침이라 그런지 목이 잠겨 더 낮아진 목소리가 거칠지만 듣기 좋았다.

“팔에 피 안 통했을 것 같은데.”

“형 머리가 무거워 봐야 얼마나 무겁다고.”

그렇게 말하며 아직 졸린 지 꾸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리는 모습에 나도 다시 몸을 눕히고 싶은 마음이 치밀었지만, 벽시계를 보자 꽤 오래 잠들었던 것 같았다.

이제 곧 봄 날씨가 완연할 텐데 겨울잠에서 덜 깬 곰도 아니고 하루의 절반 가까이 잠으로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양심이 아프다.

“저 아직 졸려요. 형도 더 주무세요.”

제현이 발음이 다 뭉개진 채 웅얼거렸다. 잠투정하는 것도 아니고. 허리를 휘감고 있는 길쭉한 팔을 일단 치워 냈다. 목발을 잡으려고 팔을 뻗는데 애매하게 거리가 닿지 않았다.

깽깽이 발로 갈 수도 있겠지만 귀찮은 마음에 몸을 더 빼내 팔을 뻗다가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져 방바닥과 진한 키스를 할 뻔한 순간 어느새 제현이 내 허리를 붙잡았다.

“아, 놀라라.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지. 왜 그렇게 위험하게…….”

잠결에 자기도 모르게 잡았는지 본인이 잡아 놓고도 놀란 눈치였다. 어떻게 했는지 역시 리치는 길고 봐야 하고 민첩 스탯은 만렙을 찍고 봐야 한다.

“미안.”

“미안하면 같이 좀 누워요. 한 시간만요.”

그대로 나를 끌어당겨 제 품에 안아 버렸다.

“어제 늦게 잤단 말이에요.”

얌전히 있으니 금세 고른 숨소리가 났다. 탄탄한 가슴에 얼굴이 파묻힌 상태라서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둘 다 놀라서 그런지 살짝 빠른 서로의 심장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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