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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마이 트로피-24화 (24/100)

24화.

한 입만 더 먹자는 제현과 더 먹다가는 체할 것 같다는 나의 대립이 첨예하게 이루어지다가 결국 남은 죽은 야무지게 챙겨 온 반찬통에 담아가 이따 숙소에 가서 먹는 거로 결론이 났다.

이제 슬슬 병원으로 출발해야 했다.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몸이 뻣뻣해졌다. 차라리 누가 망치로 머리를 때려서 기절한 사이에 병원을 다녀올 수 있으면 좋겠다.

한숨을 쉬자 제현이 뒤통수를 쓰다듬다가 헤드폰을 씌워 주었다. 잔잔한 피아노곡이 나오고 있었다.

‘안대는 깜빡하고 못 가져왔으니까 눈 감고 계세요. 그리고 오늘 선곡 기대해도 좋아요. 엄청나게 고심해서 골랐어요.’

핸드폰 메모장에 써 놓은 글을 보여 주며 제현이 방긋 웃었다. 제현의 웃는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도 참 지극 정성이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 나를 안아 드는 제현에게 슬쩍 머리를 기댔다.

“넌 내가 끝까지 안 넘어가고 버티면 어쩌려고 이러냐.“

제현이 뭐라고 말하며 입을 움직이는데 헤드폰의 노이즈 캔슬링이 너무 잘 되는지라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

제현이 밥도 든든하게 챙겨 줬고 완벽에 가깝게 케어해 줬지만, 몸이라는 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병원에서 내내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벌벌 떨어야 했다.

숙소에 도착하고 땀으로 축축해진 몸이 긴장이 풀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제현이 들고 놓는 대로 만취한 사람처럼 줄줄 흘러내리며 진료 내용을 들었다.

생각보다 새끼손가락 뼈는 잘 붙고 있는 모양이었다. 2주 정도만 더 깁스하고 재활 훈련을 하며 예후를 보자고 했으며 좋은 소식은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경기 출전도 가능하다는 거였다. 트릭스 게이밍에서 보내 준 값비싼 칼슘이며 한약을 억지로 먹은 보람이 있었다.

물론 병원에서 통증에 대비해 진통제도 처방해 주었다. 진료 내용을 다 듣자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당장 남은 스프링 시즌을 못 뛰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제일 큰 불안이었는데 다행이었다.

“음, 그럼 일단 찬희가 선발로 나가고 상태 보고 안 좋다 싶으면 영화가 들어가는 거로 하자. 영화야 괜찮지?”

“네!”

벤치 버퍼 행이 되었는데도 기분 상한 티도 내지 않고 씩씩한 영화였다.

신기사 제라의 공략법을 공유하기 위해 연습실로 들어가 장비를 연결했다. 키보드를 이리저리 옮기는데 영 위치가 맞지 않는 것 같아 노려보고 있으니 그런 나를 슬쩍 보던 제현이 키보드 각도를 살짝 비틀었다.

신기하게도 제현이 만지고 나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게 제대로 들어맞은 느낌이었다. 내 정리법을 왜 제현이 더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방금 감독님께 영상은 보내 드렸는데 일단 다들 모여 보세요.”

쿨타임 초기화가 빠른 모드를 적용한 사용자 설정 게임을 열어 AI가 스킬을 10초에 한 번씩 사용하게끔 했다.

“여기서 따닥 따다다 할 때 따랑 다 사이에 따닥 따다. 이때 회피기를 쓰면 광역 스턴 피할 수 있어요.”

“이거 거리 범위 내 확정 스킬 아니었어?”

스킬을 멀쩡하게 피하고 이리저리 무빙을 치고 있는 내 기사를 보며 동진이 많이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었어요. 시간이 좀 짧기는 한데 여기 모션이 끝날 때 즈음에, 끝나기 직전에 회피하면 돼요. 빨라도 느려도 스턴 그냥 맞으니까 타이밍 잘 맞추는 게 중요해요.”

“어어……?”

제현만 어느 정도 알겠다는 눈치고 동진과 준은 아직 감이 안 오는 것 같았다.

“그니깐 여기서 따닥 따다다에서 따다. 이거 맞죠?”

제현이 키보드를 쥐더니 곧잘 따라 했다. 역시 피지컬이 좋으니 단번에 성공했다. 고개를 끄덕여 주고 몇 번 더 해 보라고 하자 열 번 중에 여덟 번 정도는 피하는 것 같았다.

“야, 김준. 쟤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저라고 알겠어요? 미쳤나 봐. 자기들끼리 따닥 쿵딱 부다닥하더니 스킬을 씹어. 동형, 형은 저거 할 수 있겠어요?”

“어유, 난 절대 못 할 것 같은데.”

감독님이 코치님들과 보내 드린 영상의 분석을 마쳤는지 우르르 들어왔다.

“찬희야, 대박이다. 우리 KJ 스노우전 1세트에서 제라 열어 주자. 사기캐로 유명하니까 열어 주면 반드시 픽할 거야. 이거만 익히면 딜러 바보 만들 수 있겠다. 장하다. 우리 찬희. 찬희가 또 한 건 해내는구나.”

감독님이 달려와 사람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끌어안아 짓이겨지는 줄 알았다.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던 준도 처음에는 헤매더니 몇 분 뒤에는 회피에 성공해냈다. 오직 동진만이 입으로만 ‘따닥, 따, 따닥?’하면서 계속 스턴을 먹고 있었다.

제현과 내가 양옆에 붙어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아바타 다루듯이 수십 번을 하고서야 이해해서 그래도 조금은 피할 수 있게 됐다.

“KJ 스노우 경기 전까지 마스터해 두세요.”

“아, 진짜 리듬 게임도 아니고. 너는 연습 안 해도 돼?”

“동형, 제가 나이츠 랭킹 1위인 거 잊으셨나 봐요? 오랜만에 1:1 해 드려요?”

“내가 미안하다!”

탱커를 많이 해 본 적은 없어도 1:1이라면 종일이라도 동진을 가지고 놀며 괴롭힐 수 있었다. 예전에 동진의 피지컬 향상 프로젝트로 하루에 두 시간씩 1:1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의 기억이라도 떠오르는지 동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뒤에서 준이 신이 나서 따닥쿵딱쿵따닥쿵따다닥 하며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현란하게 회피 연습을 했다.

“어디 유출되면 안 되니까 다들 입단속 잘하고, 일반전, 랭킹전에서 써먹지 말고.”

“네.”

며칠 정도 게임을 안 한다고 떨어질 감은 아니지만 그래도 좀 빡세게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게임에 들어갔는데 뭔가 이상했다.

뭐가 이상한데 정확히 뭔지 알 수 없어서 클라이언트를 두고 멍때리고 있는데 제현이 옆에서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렇게 충격받을 줄은 몰랐는데요.”

“어?”

제현이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톡톡 두드렸다. 오른쪽 상단에 내 랭킹이 3위로 표시되어 있었다. 3위? 데뷔 후로 생전 처음 보는 숫자였다. 시즌 초기화 때도 아닌데?

“참고로 제가 4위예요.”

“미친.”

지금 손가락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3위? 데뷔 이후로 만년 3등인 것도 모자라 랭킹 3위? 순위표를 찾아보니 KJ의 딜러와 버퍼가 나란히 1위와 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3위인 것도 못 참겠지만 제현이 4위인 것도 속이 끓어올랐다.

“당장 파티 받아.”

“저 회피 연습도 해야 하고 형도 무리하면 안…….”

“시끄럽고 오늘 잘 생각하지 마.”

***

“제현아, 거기 적 딜러 간다.”

“싸워도 돼요?”

“걔가 너보다 레벨링이 더 잘되긴 했어.”

“그 정도 차이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해 보든가. 지원 가 줄게. 아마 저기 버퍼도 올 거야. 오기 전에 끝내야 해.”

하도 신경이 예민해 무지성으로 싸우고 다니지 말라고 화를 몇 번 냈더니 이제는 싸우기 전에 허락부터 받는 제현이었다.

초반부터 우리 듀오를 작정하고 피해 다녀서 잘 성장하고 있는 딜러를 한번 끊어 주긴 해야 했다. 가는 사이에 벌써 전투가 시작됐다. 딜러들끼리의 1:1이야 뭐 상성도 있다지만 일단은 피지컬이 우선이었으니 걱정은 없었다.

“나보고 빼는 거 같은데 좀 잡아놔 봐.”

내 말을 듣자마자 일부러 몇 대 맞아서 자기 피를 쭉 빼놓는 제현이었다. 딜러가 이성을 잃고 내 쪽을 향하는 제현을 뒤따라왔다. 거리가 좁혀지고 공속 버프를 주자 제현이 바로 뒤돌아 적을 제압했다. 깔끔한 킬이었다. 역시 최고의 이니시는 딸피지. 어시 골드가 참 달달했다.

[ 승리 ]

“몇 판째지?”

“여섯 판이요.”

중간에 한 번 졌으니까 5판 정도인가. 순위표를 보니 이대로 대여섯 판 정도만 더 이기면 될 것 같았다. 중간에 죽 그릇을 넘겨줘서 한 숟갈씩 퍼먹으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숟가락을 입에 물고 다음 게임을 돌리려는데 제현이 막았다.

“저희 조금만 쉬었다 해요.”

“큐 잡힐 동안 쉬어. 죽어서 쉬면 되잖아.”

지옥 캠프에 끌려온 것 같다며 제현이 울상을 지었다.

“형 솔큐 한판만 하세요.”

“네 랭킹에 쉴 시간이 어딨어.”

준이 뒤에서 ‘말넘심.’ 이러고 앉아 있다. 준이도 초반에는 랭킹 좀 올리라고 나한테 잔소리를 들으며 애를 좀 먹었던 터라 극성 학부모에게 들들 볶이고 있는 것 같은 제현의 심정에 공감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아예 90위 이러면 상관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머리 위에 당장 다음 경기 상대가 올라앉아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진통제를 와작와작 씹어 먹고 있으니 제현이 자기 텀블러를 건네줬다.

“그거 씹어 먹으면 안 돼요.”

“됐고, 큐 잡혔으니까 집중해.”

“네…….”

***

[나이츠 KKL 게시판] 얘네 미친놈들 아니냐?

(체크메이트 대전기록과 순위표 스크린 샷)

쳌메 부상 크리에 KJ 딜벞 듀오가 ㅈ빠지게 랭킹전 돌려서 1, 2위 나란히 먹고 자랑했는데

오늘 조커랑 둘이 하루종일 랭킹전 돌리더니 바로 1위 탈환

1일 천하 지렸고ㅋㅋㅋㅋㅋㅋㅋ

댓글 4개

ㅇㅇ : 다친 거 구라아니냐 미친놈이다 진짜

ㄴㄴ : 삼각이 팬도 아닌데 순위표 맨 위에 쳌메 없으면 기분 이상하긴 해

ㄱㄱ : 몇 년째 부동의 1위였잖아 이번에 KJ 애들이 이 갈고 올리긴 했는데 내려간 게 신기하긴 했음

ㅅㅅ : 평소에도 2위랑 명성 차이 ㅈㄴ 많이 난다고 유명했는데 KJ도 독기 품었지만 1일 천하ㅅㄱ

적당히 하라는 감독님과 대판 입씨름을 벌이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게임을 돌려 결국 1위 탈환에 성공했다. 더 차이를 벌리고 싶었는데 이제는 나도 완전히 집중력이 바닥이라 더 했다가는 오히려 내려갈 것 같은 데다가 새벽 시간대가 지나자 큐도 잘 잡히지 않아서 1위 탈환에 만족하기로 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형은 게임을 할 때 사람이 바뀌는 것 같아요.”

“그래도 성질 많이 죽은 거야.”

“그래요?”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내 마음대로 게임이 풀리지 않으면 망나니처럼 굴어서 형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네가 데뷔 초의 나랑 게임을 해 봤으면 그 말 못 할걸.”

제현이 웃으며 내 침대에 누웠다.

“너 되게 당연하게 내 침대에 눕는다?”

“형 없는 동안 여기가 제 자리였어요. 이미 반쯤은 제 침대라고요.”

“좁다고.”

쫓아내려다가 어차피 잠깐 눈 붙이고 나면 스크림 하러 연습실로 다시 가야 했다. 둘 다 거의 24시간을 깨어 있는 거나 다름이 없어서 그럴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게 좋았다.

“이 정도는 봐주세요.”

제현이 벌써 눈이 감겨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목소리로 말하자 마음이 누그러졌다. 끌어안는 품 안이 따뜻했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기분 좋았다. 좁다고 뭐라고 했던 게 민망해질 정도로 편안했다.

요즘 계속 혼자 널찍한 침대에서 잤는데도 선잠을 자고 숙면이 힘들었는데 제현의 손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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