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23화 (23/100)

23화.

선잠을 자다 깨다 반복하다 보니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더 누워 있어 봤자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 찌뿌둥한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고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오래된 컴퓨터지만 나이츠가 그렇게 높은 성능이 필요한 게임은 아니라서 괜찮을 것 같았다. 문제는 몇 년간 하지 않은지라 업데이트가 꽤 오래 걸렸다.

[나이츠 KKL 게시판] 삼각이들 이번에 플옵 갈 수 있냐?

쳌메 빠졌으면 불가능 아님?

댓글 5개

ㅋㅋ : 못가지 여태 쳌메 데리고도 만년 3등이었는데

ㅇㅇ : 근데 볼드가 잘하긴 하잖아

ㅋㅋ : 응 니네 팀 딜러 좆커

└ㅅㅅ : 나 꾸준히 댓글 다는데 이거 칭찬 아니냐?

└└ㅂㅂ : ㅁㅊ놈앜ㅋㅋㅋㅋ

[나이츠 KKL 게시판] 다음 KJ 스노우랑 트릭스 게이밍 경기부터 신기사 제라 쓸 수 있는 거 아님?

제곧내

댓글 4개

ㅎㅎ : ㅇㅇ 근데 안 나올 거라고 본다 정신머리 있는 놈들이면 무조건 밴 해야지ㅋㅋ

ㅁㅁ : 랭킹전 안 해 봤냐? OP도 적당히 해야지; 제라 픽 성공만 하면 게임 이김

ㅂㅂ : 신기사 팔아먹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공지 보니까 다음 주에 너프 ㅈ됨 제라 개쓰레기된다ㅋㅋ

ㅅㅅ : 너프를 이제야 하네 미친놈들

아무래도 파괴적인 광역 군중 제어 스킬과 압도적인 데미지 딜링을 할 수 있는 스킬셋의 희대의 사기 캐릭터 제라의 리그 적용과 관련된 얘기가 제일 많았다.

강하다고는 하나 약점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영화랑 제현도 신기사 대응 연습을 꽤 하는 것 같았다. 나라고 부상을 핑계로 마냥 쉬기보다는 대응 연습을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업데이트가 끝나고 사용자 설정 게임을 열었다. 고급 모드로 적팀에 AI 제라를 네 명 놓고 4:1을 해 볼 생각이었다. 인공지능 AI가 수많은 업데이트를 거치면서 고급 모드로 설정하면 어지간한 하위티어 사람들보다 더 잘했다. 이 정도면 손 풀기는 되겠지.

아무리 행동반경이 빤한 AI라고는 하나 4:1이라서 어지간히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전선이 자꾸 밀렸다. AI도 나도 어느 정도 아이템은 갖췄으니 슬슬 마구잡이로 전투를 벌여서 스킬 범위나 타이밍에 익숙해질 심산이었다.

“어?”

혼잣말하며 스킬 쿨타임이 돌았는지 다시 전속력으로 나를 향해 돌진하는 AI 제라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라는 먼저 광역 군중 제어 스킬로 스턴을 넣고 그 후 딜링을 쏟아붓는 타입이었는데 어쩐지 이 스턴 스킬 사용 모션이 끝나기 직전에 회피기를 사용하면 스턴이 들어가지 않았다.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기 어려울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번 시도해 보니 어지간하면 스턴을 피할 수 있었다.

게임 커뮤니티를 급하게 뒤져 보았지만, 공략 팁 게시판이나 랭커들의 기사 소개에도 딱히 이 내용은 없었다. 이거 잘하면 리그에서도 먹히겠는데.

처음 한두 세트 정도밖에는 사용할 수 없겠지만 지금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은 그 몇 번의 승리마저도 간절했다.

영상을 찍고 핸드폰으로 옮겨 담았다. 감독님에게 미리 보내 두려다가 마우스 잡았냐고 혼날 것 같아 말았다. 아무래도 박치인 동진은 무리더라도 제현과 준은 숙소로 돌아가서 가르쳐 주면 충분히 익힐 수 있을 것 같았다.

뻐근한 어깨를 빙빙 돌리고 있는데 게임 1:1 메시지가 왔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부계정이라 친구도 몇 없는데 누가 말을 다 거는지 신기해서 들여다보니 예전에 한참 부계정 랭킹전 돌릴 때 가끔 게임을 같이 하던 녀석이었다. 나중에는 접었는지 접속이 뜸하더니 내가 접속한 것을 용케 알았나 보다. 상태 창을 보니 핸드폰 접속이었다.

[황제반점 : ?]

[Chanini : ?]

[황제반점 : 게임해요?]

[Chanini : ㄴㄴ]

[황제반점 : ㅇㅇ;]

함께 게임을 함께 했을 뿐이지만 내가 게임을 업으로 삼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게이머는 다 그런지는 몰라도 옛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Chanini : 님 잘살고 있죠?]

[황제반점 : 네]

[Chanini : 아직 고등학생?]

[황제반점 : ㄴㄴ]

[Chanini : 곧 군대 가시겠네]

[황제반점 : ㅋㅋ]

[Chanini : 다음에 게임 한판 해요]

[황제반점 : 좋아요]

‘나중에 밥 한번 먹자’라는 말과 별다르지 않은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시즌이 끝나기 전까지 같이 게임을 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대화하니 좋았다. 잘살고 있다니 다행이었다.

친구 목록을 보다가 코치님 부계정이랑 친구등록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해 혹시나 걸릴까 서둘러 게임을 종료했다. 사용자 설정 게임만 했으니 혹시 걸렸더라도 기록을 찾기 어려울 테니 발뺌하면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거 잠깐 했다고 손가락에 가벼운 통증이 일어나 짜증이 치솟았다. 이걸 자르면 좀 덜 아플까? 드는 생각이라고는 그런 흉흉한 생각이 전부였다.

***

며칠 동안 안락하게 침대와 컴퓨터 책상만을 오가며 게으르게 살았다. 그냥 은퇴하고 계속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되먹지 못한 생각이 들 때쯤 월요일이 되었다.

띵동-!

월요일 아침 꼭두새벽부터 초인종 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저예요. 문 여세요.”

왜 문 열라는 말 앞에 ‘좋은 말로 할 때’가 묵음 처리되어 들리는 것 같은지 모르겠다.

이제는 그나마 좀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된 목발을 짚고 비척비척 문 앞으로 가다가 문을 열면서 무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 넘어졌다. 그대로 바닥에 코를 깨 먹는가 했는데 제현의 탄탄한 가슴에 얼굴을 냅다 박아 버린 셈이 되었다.

“…….”

“미안.”

가슴에 얼굴을 박은 채로 제현을 올려다보며 사과하자 제현의 얼굴이 미묘했다.

“또 다치면 어쩌려고 몸을 그렇게 막 던져 대냐고 화를 내야 하는지, 아니면 서비스가 좋다고 좋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라는 거야.”

“그만큼 제가 보고 싶었다고 생각해도 되죠?”

“문 부술 기세로 두드리고 있었던 게 누군데. 방금 깨서 그래.”

빈말로라도 그냥 보고 싶었다고 해 주면 어디가 덧나냐면서 삐죽거렸다.

“저 뭐 달라진 거 없어요?”

“너는 무슨 앞머리 자르고 온 여자 친구 같은 말을……!”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제대로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안경, 안경을 쓰고 있었다. 아니, 안경?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저 얼굴에 안경은 반칙 아니야?’

입을 벌린 채로 굳어 있자 제현이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형은 진짜 내 얼굴 좋아한다. 그렇죠?”

누가 이걸 싫어할 수 있지. 머릿속에 안경이라는 단어만 수만 번 지나가면서 모든 사고 회로가 멈췄다. 딱히 안경 페티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충격적일 수 있나? 안경 페티시가 있었다면 그대로 코피가 터져 과다 출혈로 요단강 건너기 딱 좋았으니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좋아하면서 왜 안 받아 줘요.”

그러게.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내가 이렇게 시각적인 유혹에 약한 사람이었나? 여태껏 살아온 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정리 실컷 하라고 다 뒤집어 놓겠다던 제현의 말이 100% 진심이었다는 것을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저 안경일 뿐인데. 뭐, 안경은 그저 안경일 뿐 아닌가 하며 장신구 취급하던 지금까지의 인생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템전은 치사하잖아.”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요?”

제현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안 보려고 해도 자꾸만 저절로 시선이 제현의 얼굴로 향했다. 진짜 너무한다.

“형 하나 꼬실 수 있으면 이 정도 수고는 해야죠.”

장난스럽게 혀를 내미는 모습조차 환장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다가오는 황홀한 얼굴을 애써 밀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좀 심장에 좋지 않은 것 같다.

“병원 예약은 11시인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형 밥 먹이려고요.”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이 제현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병원 갈 생각을 하니 벌써 심란해 두통이 오는 것 같았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자 제현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붙잡아 돌렸다.

“표정이 안 좋아졌어요.”

“기꺼운 일은 아니니까.”

내 대답에 어린아이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너 막내라는 거 거짓말이지.”

“형 하나, 누나 하나. 완전 막둥인데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여동생, 남동생 둘이 있다는 게 더 신빙성 있는데.

“혹시 너희 형이랑 누나도 너랑 닮았어?”

“제가 아빠를 닮았는데 누나는 저랑 똑같이 생겼어요. 형은 엄마를 더 닮았고요.”

말만 들어도 이기적인 유전자 풀에서 태어났다는 건 알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태 보니까 그동안 제대로 챙겨 드시지는 않은 것 같고.”

제현이 손으로 내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음, 가볍게 드시기 좋게 낙지죽 해 드릴게요. 약간만 매콤하게.”

“매콤한 것보다 매운 게 더 좋은데.”

“그간 제대로 챙겨 드신 것 같으면 맵게 해 드릴 수 있는데 형 상태 보니까 안 될 것 같아요.”

왜 저렇게 커다란 배낭을 들고 왔나 했더니 음식 재료부터 냄비까지 도●에몽 주머니도 아니고 끝없이 나왔다. 제현은 소매를 걷어 올리더니 바로 요리 준비에 들어갔다. 안경을 쓰고 있으니 저번에 봤을 때랑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얌전히 앉아서 제현이 요리하는 걸 지켜봤다. 주변에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언제 봐도 신기했다. 어쩌면 행동이 저렇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착착 진행되는지 감탄이 나왔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ASMR처럼 편안하게 들려 팔을 베고 있다가 깜빡 졸았다.

“사람 요리하는 동안 자면 어떡해요.”

“미안.”

“사과는 됐고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드세요.”

눈앞에 정갈하게 담긴 죽이 대접으로 나왔다.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양이 좀 많아서 기가 질렸다.

“진짜 형은 요리한 보람 없는 얼굴을 해도 밉지 않으니 이걸 어쩌면 좋죠.”

“이래도 계속 요리해 주는 네가 이상한 거 아니냐.”

“맞아요, 저 이상해요.”

꽃받침을 하고서 내가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제현이었다. 숟가락을 들다 말고 한숨을 푹 쉬었다. 미치겠네. 안경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설렐 수도 있는 건지.

“너 그거 도수 있는 거야?”

“아뇨. 알도 없어요.”

제현이 손가락을 안경테에 넣으며 뻥 뚫려 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숟가락을 입에 물고 나도 손가락을 집어 넣어 보았다. 정말 알이 없었다. 기왕 손을 뻗은 김에 제현이 쓰고 있는 안경을 낚아채 들었다. 플라스틱인지 꽤 가벼워서 장난감같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안경은 살면서 한 번도 써 본 적이 없었다. 신기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안경을 쓰자 나를 보고 있던 제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바로 쓰고 있던 안경을 낚아채 뺏어 갔다.

“형 시력 좋죠? 어디 가서 함부로 안경 쓰지 말아요.”

그렇게 안 어울리는 건가 싶었다. 모니터와 핸드폰을 달고 사는데 시력이 양쪽 다 1.0인 게 다행이었다.

안경을 손에 쥐고서 입을 벌리고 경악하고 있는 제현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수저로 아직도 김이 나는 죽그릇을 휘휘 저었다.

“템전은 치사한 거였네요.”

“네가 한 짓이잖아.”

“치사한 거였어요.”

“그러니까 그거 너라니까.”

제현은 넋이 나간 채로 알 수 없는 소리를 반복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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