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22화 (22/100)

22화.

회사 차를 빌려 제현이 운전하는 차로 집 앞까지 오면서도 대화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잘못된 버튼이라도 건드린 것처럼 제현은 낯설게 웃으며 운전했고 나는 그런 제현을 옆눈으로 보면서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아까부터 애가 웃고 있기는 한데 눈에 좀 광기가 도는 것 같았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만 같은 공포심이 들게 만드는 그런 광기였다.

익숙한 골목이 보이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xx 빌라, 여기 맞죠?”

“응, 여기서 내려 줘.”

제현은 또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골목으로 진입했다. 언제나 세상 상큼하게만 보이던 제현의 웃음이 이제는 무서웠다. 왜 저러는 건데.

굳이 빌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가 들겠다고 한 가방도 본인이 들고,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걸 알자마자 그대로 나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계단을 올랐다. 성인 남자를 들고 5층을 오르면서도 숨이 차지 않을 수 있다니 경외감이 들 정도로 놀라웠다.

너무 놀라서 목에 감고 있던 팔을 떼는 것도 잊고 있었나 보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팔을 거두는데 순간 제현이 입술이 다가왔다. 벌어진 입 사이로 뜨거운 혀가 파고들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

피하려고 머리를 뒤로 빼자 더 가까이 다가올 뿐이었다. 머리를 문에 박기 전에 제현의 손이 내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내 숨을 다 가져갈 기세로 잡아먹을 듯 입 안을 훑던 제현이 내 입술을 가볍게 핥고서 떨어졌다.

“하아, 하아….”

성인 남성을 안아 들고 계단을 오른 사람이 내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친 숨을 뱉어야 했다. 이게 뭐냐고 따지듯 보자 제현이 방긋방긋 웃으며 내 손에 가방을 들려 줬다.

“혼자 정리 실컷 하고 오세요. 다 뒤집어 놓을 거지만.”

정말 말 그대로 다 뒤집힌 상태로 입을 벌리고 있자 아랫입술을 쪽 소리 나게 빨고서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멀리서 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서 있다가 그대로 철문에 기대 주르륵 쏟아지듯 주저앉았다. 아마도 시뻘겋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이게 아닌데……!’

그렇게 얼마간 주저앉아 있었을까. 가져온 짐 정리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바닥에 누워 뜨거운 얼굴에 차가운 손을 대서 열을 식혔다.

익숙한 천장, 익숙한 장판 그리고 적막함이 주는 편안함을 즐기러 온 것인데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한동안 바닥에 누워 허송세월하고 있었다.

그만하자고 하면 ‘네, 그러죠.’하고 바로 받아 주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올 줄 예상도 못 한 탓이 컸다. 시종일관 웃으며 사람을 이렇게 뒤흔들고 갈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었다.

띠링-

[황제현]

형 저 숙소 도착했어요

월요일에 병원 제가 데리러 갈 거니까

보고 싶어도 얌전히 기다리세요 오전 (01:12)

저도 얌전히 기다릴게요 (오전 01:13)

아래로 내 침대에 누워서 찍은 듯한 셀카가 첨부되어 있었다.

“허…….”

서찬희, 22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이런 타입의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조용하니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것 같아서 여기서 살 때도 몇 번 켜 본 적 없는 TV를 켰다.

- 선배 좋아해요. 계속 좋아했어요.

로맨스 드라마 패스.

- 몸쪽 꽉 찬 직구!!! 패스트볼로 삼진을……!

야구 패스.

- 머리 숙여!!! 무너진다!!!

뭔가 마구잡이로 폭발하고 무너지고 있는 시끄러운 액션 영화도 패스.

이어서 종교 채널과 홈쇼핑 채널 그리고 골프 채널을 지나 게임 채널에 도착하자 내 부상 직전 경기였던 와일드캣 문즈와의 경기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 제가 알던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어요!

- 2라운드 내내 무너지고 있습니다. 1라운드에서 한 번도 져 본 적 없었던 탓일까요?

- 아, 트릭스 게이밍. 상황이 좋지 않을 때의 이견 조율이 잘 되지 않는 것 같은데요. 지금 조커 선수의 위치!

- 깊어요!!! 시야도 없는데 조금 돌아가야 하지 않나요?

- 마주쳐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같은데 지금 세 명이 조커 선수 쪽으로 향하고 있거든요!

상황이 좋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스플릿 운영이었다. 그래도 혼자서 클 수 있는 제현을 사이드로 돌리고 동진과 준을 케어하며 상대방을 막아 내느라 사이드 쪽 시야까지는 보지 못했고 그사이에 제현이 제압당하며 순식간에 게임을 패배했다.

매사에 안정을 추구하는 진형이었다면 아마 당연히 돌아갔을 것이라 제현이 저렇게 직선 루트로 막 들어갈 줄은 몰랐다. 내가 적절하게 제어해야 했었는데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한 내 탓도 있었다.

경기를 곱씹다 보니 전에 진형이 함께 게임을 하자 했을 때 내가 거절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습관적으로 진형을 디폴트값으로 놓고 게임을 하다 보니 제현의 저런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더 힘든 탓이었다.

제현은 진형과 비슷했던 성환보다는 색깔이 확실히 다른 딜러라서 최근에는 그래도 차근차근 맞춰 가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진형과 게임을 같이 했다가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도루묵이 될 것 같아서 본능적으로 거부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고, 지금은 미국에 있다지만 다시 한국에 안 들어올 사람도 아닌데 이대로 진형의 연락을 계속 무시하며 내버려 두기는 좀 그랬다.

[권진형]

보면 시간 상관없이 전화해 +999

‘+999’라는 표시가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 스크롤을 올리니 보이스톡을 시간대별로 걸고 중간중간 왜 안 받냐, 무시하냐, 차단했냐 따지는 메시지들이 눈에 띄었다.

한숨을 푹 쉬면서 한참 채팅창을 올리고 있는데 내가 메시지를 읽는 순간을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기라도 한 건지 타이밍 좋게 진형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귀신같다. 받지 말까 3초쯤 고민하다가 그냥 받았다.

- 서찬희.

“…….”

- 왜 연락 안 해? 너 진짜 누구 피 말리려고 작정했어?

“핸드폰 잘 안 보는 거 알잖아.”

- 그렇다고 해서 사람 연락을 이렇게 무시해? 내가 당장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너 걱정했다는 걸 믿을래?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 너 진짜 나랑 장난하냐?

어지간해서는 화도 잘 안 내는 사람인데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LA는 아직 아침일 텐데 아침부터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눈앞에 있었더라면 눈도 못 마주치고 정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겠지만, 다행히 진형은 미국에 있었다. 바닥에 다시 대자로 누우며 핸드폰을 반대쪽 귀로 옮겼다. 요즘 왜 이렇게 나한테 화내는 사람이 많은지.

“왜 화를 내고 그래.”

- 야, 서찬희. 진짜 돌아 버리겠네. 내가 너 다쳤다는 걸 기사로 알아야 해? 우리 사이가 그 정도밖에 안 돼?

“원래도 미주알고주알 다 터놓는 사이는 아니었잖아.”

뭔가 쾅 하는 소리가 들려서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멀리 떼 놨다가 조용해지자 다시 귀에 붙였다.

“형도 미국 가고 연락 그렇게 자주 하는 편 아니었잖아.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 그거랑 이거랑 같아? 내가 답답해서 원. 계약 끝나면 한국으로 완전히 돌아가든가 해야지.

다를 건 또 뭐람. 한숨을 쉬며 등이 아파 몸을 일으켰다. 앓는 소리를 내자 진형도 한숨을 푹 쉬었다.

- 하, 그래. 아픈 사람한테 화내서 뭐 해. 다친 데는 좀 어때.

“어, 괜찮아.”

- 뭐가 괜찮아. 손가락 때문에 경기도 못 뛰고 있다며.

침대에 누워 붕대가 감긴 손가락을 봤다.

“괜찮아.”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애초에 여기로 들어온 이유도 숙소에서는 보는 눈이 많아 내가 컴퓨터 앞에만 앉아도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 키보드 마우스를 뽑아 버린 탓도 있었다. 내일은 몰래 부계정으로 들어가 게임을 돌려 볼 예정이었다.

- 목소리는 하나도 안 괜찮은데.

걱정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걱정하지 마. 형 말고도 걱정하는 사람 많아서 버거워.”

팬들까지도 죽었니, 살았니, 난리였다. 그나마 지운과 찍은 영상이 올라가면 좀 줄어들겠지만. 어디 그뿐인가. 인간 불도저 같은 놈도 하나 생겼다.

- 혹시 새로 온 딜러가 너 괴롭혀?

“무슨 소리야.”

- 게시판 보니까 걔가 너 밀었다는 루머도 있던데?

진짜 별 개소리를 다 듣겠다.

“뭐래. 걔가 지금 제일 극성이야. 오늘도 5층까지 날 들고 계단을 올랐는데.”

- 뭐야, 너희 숙소 4층까지밖에 없잖아?

“아, 나 xx 빌라에 왔어. 머리 좀 식히려고.”

- 거기에 걔를 데려갔어?

“아냐, 그냥 나 다리 불편하니까 데리고 와 준 거야.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진형도 이 집에 애정이 많다 보니 다른 사람을 들인 줄 알고 기분이 상할 뻔한 모양이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 오랜만이다.

“뭐가?”

- 너 웃는 소리 듣는 거.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함께 연습할 때는 하루가 멀다고 뒹굴고 장난치며 웃었는데 프로 데뷔하고부터는 그렇게 편안하게 웃고 떠든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고 흔들리기 바빴다. 지금까지도.

- 찬희야, 너 새로 온 애랑 뭐 있어?

“있긴 뭐가 있어.”

- …….

변명하듯 급하게 말이 나갔고 그게 오히려 수상하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짧게 침묵이 흘렀다. 통화를 시작하고 시간이 꽤 흘러서인지 핸드폰이 따끈했다.

- 걔가 너 상처 줄까 봐 걱정돼서 그래.

“지운이 형도 그 말 하더라.”

내가 얼마나 겁쟁이인지 잘 아는 사람들이 쓸데없는 걱정들을 다 한다. 아, 하긴 이 겁쟁이도 실수를 하긴 했다. 진형은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믿다가 누적 데미지가 쌓일 만큼 쌓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으니까. 그런데 최근에 제일 크게 데미지를 넣은 사람이 고양이 쥐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누굴 걱정하는지.

“그래도 거리가 멀면 데미지도 안 들어오더라고.”

- 갑자기 무슨 소리야?

“아냐, 그런 게 있어.”

영어로 와글거리는 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들렸다. 킹 어쩌고 하는 것을 보면 진형을 부르는 것 같았다.

“바쁘면 끊어.”

- 어, 가 봐야겠다. 거기 새벽 아니야? 빨리 자.

“알아서 할게.”

- 진짜 말 서운하게 한다. 또 전화할게.

“응.”

통화가 끊기고 통화 기록을 한참 보다가 꺼 뒀던 진형의 알림을 다시 켜 뒀다. 나중에 숙소로 돌아가면 동진과 준에게도 차단을 풀라고 말해 둬야겠다.

내 바람을 말하자면 진형이 계속 미국에 있어 줬으면 했다. 눈앞에 있었으면 이렇게 평온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했을 것 같으니까.

핸드폰을 뒤적이다가 아까 보내온 제현의 사진을 다시 열었다. 다시 봐도 잘생겼다. 화면 속 제현의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너는 이 얼굴을 하고 도대체 왜 나한테 그러는 거냐.”

내가 제현이었다면 문은영 아나운서처럼 밝고 화사한 사람이 좋을 것 같았다. 나처럼 어딘가 고장 나 있어 보이는 칙칙한 사람보다.

아까 잠깐 잠든 탓인지 안락한 침대로 자리를 옮겨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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